- 세월호 참사 5주년을 앞두고

해방은 제국주의 식민통치로부터 단절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해방공간에서 한국교육이 나아갈 방향은 일제 식민지 교육의 잔재를 말끔히 씻어내는 일입니다. 그리고 민족 정체성을 확립해 민족교육을 강화하며 민주주의 교육의 새 틀을 짜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종전 후 오랜 식민생활에서 해방된 신생 독립국가들의 한결같은 소망이자 모든 국가의 공통된 과제였습니다. 그러나 여타 신생 독립국가들과 다르게 한국에서 해방은 곧 분단이었습니다. 한반도가 전후 국제질서인 냉전체제를 강요받는 최전선에 놓인 탓이었지요. 그 결과 미소 패권주의 틈바구니에서 한반도는 냉전이 격화되는 비극의 땅으로 전락합니다.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전략은 3천만 국민의 요구와는 달리 한국을 대소 전진 기지이자 반공의 보루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한국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주변부로 편입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는 자연스럽게 일제 통치하 관료의 인적구성을 그대로 물려받는 현상으로 귀결됩니다. 실제로 미군정은 친일청산을 거부했으니까요. 그런 연유로 식민 지배세력에 협력했던 반민족 행위자들이 미군정 3년 동안 해방된 조국에서도 여전히 지배집단으로 군림합니다. 결과적으로 해방공간 한국교육은 왜곡될 수밖에 없었으며 오늘날 모든 교육문제의 단초를 제공하는 원죄를 배태시킵니다.

요컨대 일제 식민지 교육이 정신적으로나 외형상으로 해방 후 한국교육을 지배해 왔습니다. 그 결과 민족정기를 확립하고 민족 교육을 지향하는 삶의 가치가 좌절되고 부정돼 왔습니다. 1946년에 시작돼 1947년에 종결된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약칭 국대안) 사건이 바로 그 단초가 되었습니다. 나아가 역사가 청산되지 못한 상태에서 봉건적이고 낡은 권위주의 질서가 학교현장에 온존했지요. 민주주의 교육은 예나 지금이나 학교현장에서 구호로만 존재할 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부유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미군정기 교육은 20c 중반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의 큰 틀을 유지하고 충족시키는 선에서 관철되었습니다. 먼저 한반도를 대소 전진기지로 인식하는 만큼 한반도는 공산주의를 막아내는 최전선이었지요. 따라서 교육은 반공이라는 냉전 이념교육을 강화시키는 소용돌이 속으로 한없이 빨려들게 됩니다.

▲ JTBC 드라마 <스카이 캐슬>은 교육문제 특히 입시제도인 학생부종합(약칭 학종)전형을 소재로 최상류계층의 욕망을 그린 작품이다. 학종 전형은 미국 입시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교육적으로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역사청산이 부재하고 사회정의의 토대가 취약한 한국사회에선 교육과정보다 입시결과에 집착하는 등 오히려 불공정 논란의 중심에 놓여 있다.(사진 출처 : 한겨레 이정윤 기자)

또한 미군정기 교육은 미국식 자본주의 문화를 한반도 남쪽에 전파 이식하는 도구로서 기능하였습니다. 교육이념과 교육목표, 그리고 교육내용과 교육방법 등 교육의 전 과정을 미군정당국은 통제하였고 이를 적극 활용합니다. 실제로 해방공간 미군정기 교육의 틀은 해방 후 70년이 넘도록 그 정신사적 기저에서 거의 변함이 없이 유지돼 왔습니다. 최근 뜨거운 시청률 끝에 종영된 드라마 『스카이 캐슬』의 주된 소재가 학생부 종합전형(약칭 학종)인데 바로 그 학종 전형 역시 미국 입시 제도를 모방한 것이지요. 미국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한국교육의 준거집단으로 작용합니다. 그 결과 오늘날 미군범죄가 발생해도 별로 문제시하지 않는 나라가 되어 버렸습니다. 17년 전 어린 여중생이 장갑차에 깔려 죽어도 공무수행 중 발생한 일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처벌조차 못하는 슬픈 나라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교육적으로 그만한 이유가 집단적으로 내면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미군정 3년 동안 교육개혁의 이념은 형식적으로 '민족화, 민주화, 탈(脫)일본화'였고 기간 학제 등 교육제도의 기초를 닦았던 곳은 미군정청 학무국이었습니다. 모든 교육행정이나 교육재정 전반의 결정권은 미군정당국에 있었던 점에 비춰 볼 때 이를 부정할 순 없습니다. 그런데 미군정당국은 한국 실정에 어두웠던 데다 한국을 대소 반공기지로 안착시키는 자국의 국가 이익에만 충실했습니다. 그런 연유로 식민지 시대 일제에 협력했던 교육계 인물 내지 교육관련 인사들이 대거 미군정청 교육 자문위원으로 위촉됩니다. 그들은 대개 미국 등 해외 유학생 출신들로서 영어에 능통했고 미국 문화에 익숙했으며 대부분 기독교적 배경을 지녔습니다.

바로 한국민주당(한민당)과 관련 깊은 인사들로서 반공주의자들이고 미국의 이해관계를 적극 수용한 인사들이었습니다. 한민당은 반세기 가까이 한국 야당의 모태이자 현재 집권 정당의 모태로서 그들 중 일부는 일제강점기 친일인사이거나 대지주 출신입니다. 1945년 해방과 동시에 여운형 선생이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춘 건국준비위원회(이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를 출범시키지요. 그러자 보수 친일 세력들이 진보적인 민족 세력인 건국준비위원회에 맞서기 위해 해방 공간 급조한 정당이 한민당입니다.

이들은 미국유학파 출신인 오천석을 매개로 미군정청 자문기구인 <한국교육위원회>와 <조선교육심의회>에 적극 결합합니다. 그리하여 미군정통치 기간 한국교육의 중심인물이 되어 교육의 큰 틀을 짜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합니다. 대표적인 인사들이 바로 김성수, 김활란, 유억겸, 백낙준, 오천석, 최규동 등이었습니다. 해방 직후 이들은 서울 서대문구 천연동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미군이 진주할 것을 예견하고 교육 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했습니다.

<한국교육위원회>와 <조선교육심의회>는 비록 미군정청 자문기구에 지나지 않았지만 실질적으로 해방공간 미군정기 교육개혁의 핵심주체로 활동했습니다. 그리하여 각 도의 교육 실무책임자인 학무국장과 각 급 학교 교장 인사에 절대적 영향을 미칠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적어도 교육계 내부에선 '준 국가 행정기구'의 역할을 수행하였고 이들은 그 기구의 중심에 서 있었지요.

▲ 미군정 통치 기간 <한국교육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한 김활란의 동상. 이화여대 본관 옆에 세워진 김활란 동상은 김활란의 친일 행적 등으로 철거를 주장하는 등 논란의 중심에 놓인 적이 있다.(사진 출처 : 한겨레)

실제로 미군정기 교육개혁 당시 <조선교육심의회>는 교육 분야 자문기구 중에서 가장 결정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기관입니다. <조선교육 심의회>는 교육이념을 다룬 제1분과(위원장 : 안호상, 제 1공화국 초대 교육부 장관)를 비롯해 제2분과(교육제도), 제3분과(교육행정) 등 모두 10개 분과를 두고 한국교육의 이념 설정과 교육제도의 근간을 마련하는 작업을 수행했습니다. 글자 그대로 한국교육의 뼈대를 갖추는 큰 틀을 획정한 기구였습니다.

여기서 일제가 내건 팔굉일우(八紘一宇)와 유사논란을 빚은 홍익인간을 교육이념으로 제시하자 사회경제사학자 백남운이 거세게 비판하는 등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기간학제로서 미국식 단선형 학제인 6-3-3-4제를 채택하고 9월1일 새 학기가 시작되는 신교육제도를 수립합니다. 또한 1951년까지 6년간 66억 원을 투여해 전체 학령기 아동을 대상으로 의무교육을 시행하고 초등학교를 우선적으로 설립하는 등 학교설립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에서 한자를 전면 폐지하는 개혁안을 미군정청에 건의하기도 했지요. 한글전용 정책의 경우는 이극로, 최현배 등 일제 강점기 민족주의 성향 교육자들 일부 인사가 <조선교육심의회> 분과 위원장 내지 분과위원으로 참여한 덕분으로 그분들의 숨은 노력이 결실을 맺었습니다.

미군정청에서 볼 때 <조선교육심의회>의 개혁안은 미국의 대한반도 전략 및 미군정청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대체로 일치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식 제도와 미국의 자본주의 문화를 이식시키는 데 대단히 성공적인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미군정이 한글 전용을 정책적으로 지원 한 것도 미국식 민주주의를 대중화시키는 데 문맹해소가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었기 때문입니다. 교육과정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1945년 미군이 진주하면서 1945년 9월에 발표한 <교수요목>은 교육과정을 대변해 주었던 내용입니다. 이는 1955년 이승만 정부 문교부에서 <교과과정>이 공표되기까지 10년 동안 한국 교육과정의 준거로서 충실히 기능하였습니다.

김성수, 김활란, 유억겸, 백낙준, 최규동, 조동식 등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들이거나 그에 준하는 반민족행위자들입니다. 그럼에도 이들 친일세력들이 <조선교육심의회> 등 미군정청 교육자문기구에 들어가 활약함으로써 한국교육은 출발부터 왜곡되지요. 그들은 식민지 시대 교육행정조직을 그대로 활용해 지시와 명령 그리고 교육에 대한 통제와 감독을 주된 임무로 규정해 시행했습니다.

그 결과 21세기 오늘날까지 권위주의 학교 문화가 조직의 풍토로 온존하고 있습니다. 개혁의 이름으로 개혁을 하지 않은 채 외양만 미국식 민주주의 제도를 이식한 꼴이었습니다. 위계적인 조직문화와 권위주의적인 학교문화는 식민지 시절과 별반 다를 게 없었습니다. 따라서 해방 공간 「새교육」 운동을 표방하지만 무늬만 듀이의 진보주의 교육사상을 입혀 놓았을 뿐이지요. 한국교육의 내면은 식민지 국가주의 교육의 잔재가 그대로 온존하는 모순된 상황을 연출했으니까요.

그들 스스로 일제 강점기 교육기득권을 미군정 하에서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 식민지 잔재를 청산할 의지가 없었던 탓입니다. 그렇지만 해방을 맞아 당면한 제1의 과제인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대목은 이후 한국교육에서 두고두고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거기다 민족의 정체성을 기초로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지향해야 할 민족교육을 교육내용으로 확보조차 못했습니다.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의도적으로 배제시켰습니다. 오히려 극단적인 반공교육으로 교육의 전 과정을 직접 통제함으로써 민족의 동질성 회복보다 이질화를 심화시켰으니까요.

1946년 「국대안」(‘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의 약칭) 사건은 해방공간 미군정기 교육정책의 숨은 동기가 현실 속에서 그 민낯을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당시 교육개혁을 주도했던 친일세력은 기득권 유지와 맞물리면서 교육에 대한 관료적 통제를 강화하려는 의도를 노골화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국대안」 사건은 겉으로는 교육의 효율성에 기초하여 해방 후 한국에 국립대학교 설립을 지향한 사건이지만 초-중-고교-대학에 광범위하게 존재했던 진보 내지 민족주의 성향 교직자들을 일거에 갈아치우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토대 위에 초-중-고교-대학 교육을 반공 이데올로기 일색으로 강제함으로써 반공 교육이 학교현장에 깊이 뿌리내리게 된 단초가 되었던 사건입니다. 서울대 교수가 좌파로 몰려 죽음을 당하고 국문학자 조윤제조차 의심을 받았을 정도로 매우 경직된 분위기를 초래한 사건이 「국대안」 사건이었으니까요.

결론적으로 해방공간 미군정기 교육은 일제 식민지교육을 청산하기는커녕 그대로 계승하였습니다. 오히려 식민지 교육주도세력의 계승은 교육모순을 확대 재생산하면서 미국의 동아시아 냉전전략 구도에 조응한 반공교육을 수행하는 것으로 귀결되었습니다. 그 결과 비민주적인 관료행정과 권위주의적인 학교문화 풍토를 조장했습니다.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여전히 관료행정의 지시와 통제, 그리고 수직적인 학교문화를 청산하지 못한 채 학교모순이 심화된 것은 그 뿌리가 「국대안」 사건에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5년 전 세월호 참사로 16개 시·도 교육청 가운데 13 시·도 교육청에서 진보교육감이 대거 당선되면서 학교현장은 조금씩 변화를 보였습니다. 교육활동에서 아이들 참여를 이끌어내고 자율성을 신장시키려는 혁신교육이 시도되었습니다. 교육의 이름으로 수십 년 동안 자행돼 온 체벌이 학교현장에서 사라져 갔지요.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고 아이들 인권감수성을 키우려는 교육이 진행 중인 것이 이를 반증합니다.

2016년부터 서울시 교육청은 단위학교에 ‘토론이 있는 교직원회의’를 권장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교직원회의가 토론이 없이 일방적인 지시와 전달, 그리고 마지막에 학교장 훈계로 끝나곤 했습니다. 민주주의가 살아 움직였어야 할 학교가 비민주의 극치를 관행처럼 반복했으니까요. 공문 지시와 통제에 익숙한 교육행정은 과거 독재시절 권위주의 교육 관료들에 의해 주도된 측면이 큽니다. 또한 이명박 정권에서 부르짖은 학교장 책임 경영이란 미명 아래 더욱 고착된 측면도 큽니다. 지시와 통제의 권위주의적인 학교행정이 교육의 본질을 끊임없이 왜곡시켜 왔지요. 나아가 ‘지시와 전달을 위한 교직원회의’가 교육의 자주성을 지속적으로 침해하였습니다.

▲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당시 해경 123정에서 찍은 모습(출처 : 세월호 특조위 제공)

2014년 4월 16일 오전 9시 45분! 304명 승객의 생명과 안전을 저버린 채 세월호 선장은 해경의 도움을 받으며 팬티 차림으로 황급히 세월호를 탈출합니다. 바로 그 시각! 퇴선 안내방송이 나왔더라면 7분 이내에 304명 승객 전원을 살릴 수 있었다고 선박 재난 전문가는 법정 증언을 했습니다. 참으로 애통한 일입니다. 그러나 더욱 안타깝고 애통한 일은 60도 이상 기울어진 그 시각! ‘객실이 안전하니 이동하지 말고 객실에 대기하라’는 안내 방송을 믿고 따랐던 교사와 학생들의 통한의 죽음입니다. 교사와 학생들은 안내 방송을 믿었고 골든타임의 상당시간대에 선실에 머물렀습니다.

차라리 절체절명의 그 시각! 교사와 학생들이 방송 지시를 따르지 않고 위험을 주체적으로 판단하여 선실 밖으로 탈출했다면 250명 꽃 같은 아이들이 그렇게 황망한 죽음을 맞진 않았을 것입니다. 바닷물이 무섭게 출렁거리며 3층 객실을 덮치고 4층으로 바닷물이 거세게 들이칠 때 교사들은 뒤늦게 아이들을 선실 밖으로 탈출시킵니다. 그리고 다시 선실 복도에 줄지어 대기하던 제자들을 구하려고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가 의로운 죽음을 맞습니다.

지시와 통제에 익숙한 학교문화! 권위주의적인 교육행정을 이젠 청산해야 할 시점입니다. 수직적인 학교문화! 한국 교육의 프레임을 근본에서 바꿔야겠습니다. 아이들 자율성을 길러내고 존중하며 자신의 삶에 대해 인격적 주체로서 우뚝 설 수 있도록 교육의 기본 틀을 바꿔야 합니다. 이 점은 역사를 청산한 경험이 없는 한국교육이 세월호 참사에서 깨달아야 할 소중한 교훈입니다. 일제 강점기 만주 벌판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독립지사들 절반이 10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오늘의 한국교육은 지시와 통제로 순치된 문화가 학교를 지배하고 있을까요? 학교현장을 여전히 지배하는 지시와 통제, 감시와 단속 위주의 생활지도! 성찰이 없이 관행을 반복하는 한국교육! 이젠 과감히 바꿔야 할 시점입니다. 그것은 그리움과 슬픔이 가득한 책! 『금요일엔 돌아오렴』에서 어느 부모님의 절규에 대한 최소한의 응답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 때 선생님들이 안내방송에 따라 아이들을 통제하지 않고 배 밖으로 나가라고만 했어도..."

부모님의 안타깝지만 원망어린 절규 앞에 오늘도 우리 교사들은 죄인이 된 느낌이고 마음이 아픕니다. 이젠 아이들이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의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안목을 키워주는 교육을 해야겠습니다. 그 길만이 원통하게 죽어간 250명 아이들의 죽음을 사회적으로 의미 있게 승화시키는 첫 출발이라고 믿습니다. 나아가 세월호 참사 때 제자들을 구하다 순직한 12분 선생님들의 숭고한 죽음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교사들과 어른들이 올바로 계승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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