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기자연( 順其自然)의 이치

[대만이야기 72] 김동호 편집위원l승인2019.02.27l수정2019.03.05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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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에 가면 꼭 찾는 고궁 박물원. 그곳에서 우측 전방을 보면, 계곡 건너에 동우(東吳)대학이 보입니다. 최근 대만 정계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의 가오슝(高雄) 시장인 한꿔위(韓國瑜, 차기 총통 선호도 1위)가 나온 대학이기도 합니다.

대학원 동기 미졘꿔(米建國)가 이 대학 철학과 주임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08년에는 세계철학회의가 서울에서 열렸을 때 대만 철학회 대표인솔자로 와서 개회 연설도 했고, 몇 년 전에 만났을 때는 대만 철학회 회장 직함을 가지고 있었으니 학계에서는 꽤 유명인이 되었더군요.

이 친구는 소아마비 질환을 앓아 몸이 불편하지만 항상 밝았고 저를 많이 챙겨주었습니다. 과제물 자료도 뽑아주어 좋은 학점을 받을 수 있게 해주었고요. 지금은 몸이 많이 무거워져서 지팡이를 짚고 다니지만, 당시에는 가방만 들어주면 혼자 걸었습니다. 땅이 고르지 못하면 자주 주저앉았지요. 처음에는 놀라서 손을 내밀었는데 혼자 일어나겠다고 하더군요. 그 이후에는 넘어져도 그냥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어린 둘째딸. 1월 19일 친구 가족이 제가 사는 타이난(臺南)에 들렸습니다.

한 학기를 마치고 겨울방학이 되었습니다. 이 친구가 설 연휴를 자기네 집에서 보내자고 하더군요. 전년도 어학원에 다닐 때 열흘 가까이 모든 상점이 문을 닫아 24시간 편의점에서 샌드위치만 먹어야 했던 아픈 기억이 있어서 고맙게 친구네 집에 갔습니다. 臺中에서 2시간 정도 거리인 가오슝(高雄)의 문화센터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아파트에 살고 있었습니다.

친구 아버지가 당시 거의 백발이었는데 부모님 모두 담배를 피웠지요. 당시 대만사람들은 담배를 피울 때 꼭 옆 사람들에게 뽑아서 권했습니다. 좀 떨어져 있으면 뽑아서 휙 던지지요. 물론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부부도 함께 핍니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상놈(?) 문화였지요.

집에 들어가서 인사를 하고 났더니 친구 아버지가 담배를 건네기에 기겁하고 거절했습니다. 나중에 피겠다고. 조금 있자 이번에는 친구 어머니가 담배를 또 빼서 제게 주기에 슬그머니 받아서 베란다에 나가 피웠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자 친구 어머니가 주는 담배는 그냥 집안에서 함께 피는 경지로 발전을 했습니다. 막상 같이 피우니 상상외로 편하더군요.

어린놈이 어른 앞에서 담배를 피운다고 훈계하다 칼을 휘둘러 살상이 일어나는 한국과의 문화 차이는 실로 컸습니다.

설날 아침 결혼을 안 한 둘째 딸과 친구 그리고 저는 똑같이 두툼한 홍빠오(紅包, 세뱃돈, 뇌물)도 받고, 근처 공원 청칭후(澄淸湖,징청호)로 나들이하였습니다.

두 딸 중 하나가 운전을 한 것 같은데 기억은 안 나고, 주차장에서 내리던 며느리가 지갑을 분실했다고 하더군요. 아마 뒷자리에 올라타면서 떨어뜨린 듯합니다. 차안을 몇 번이나 뒤져도 잃어버린 지갑은 찾을 수 없고 크게 내색도 못하는데, 시어머니가 순기자연(順其自然)이란 성어를 여러 번 말하면서 며느리를 토닥여주더군요. 속상해하지 말고 그냥 잊어버리라는 의미로 들렸습니다.

順其自然은 도교의 무위(無爲)와 같은 말로 인위적으로 또는 억지로 뭔가를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자연의 이치를 따르라는 의미로 학교에서 배운 무위자연(無爲自然)과 같은데, 1980년대 아주 자주 들었던 사자성어입니다.

▲ 친구와 부인 그리고 두 딸. 타이난에 저를 만나러 온 사람은 이유 불문 가야하는 홍콩 음식점

1949년 수도 난징(南京)을 포기하고 장개석은 약 50만의 군인을 데리고 정부를 대만으로 옮기지요. 한국전쟁 이후인 1953년까지 10여만 명이 추가로 이주를 하면서 간부들 아니고는 대만 처녀와 결혼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여담이지만 결혼을 못하고 늙어가는 퇴역군인들에 대한 대책도 골머리를 앓게 하는 문제였지요.

한국이 6・25, 4・19, 5・16등을 거치며 어렵게 사는 동안에 대만은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산업화에 성공하여 외환보유고도 많았고 한국보다는 훨씬 잘 살았습니다. [대만이야기 15] 한류의 기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2004년 노무현 정권 이전에는 1인당 국민소득에서 대만을 앞지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요.

장가 못간 퇴역군인들을 위해서 거간꾼들이 한국의 남해안과 도서지역으로 달려갔습니다. 일을 안 해도 먹고 사는데 지장 없다는 말에, 평생 주린 배 안고 고생하던 아낙들이 땡볕에서 밭을 일구다 호미를 내던지고 해안가로 달려가 배를 탔습니다. 1960년대 말쯤에 남해안에서 소리 없이 사라진 부녀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당연히 통계가 있을 수는 없지만 그들은 대만으로 넘어와 살았지요.

친구 아버지는 경찰 간부였으니 당연히 대만 처녀와 결혼을 해서 2남 2녀를 낳고 잘 살았습니다. 퇴직 후에 가오슝(高雄)항구에서 수출입화물과 관련된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지요.

친구 어머니는 표준어를 하지 못합니다. 일본 통치하에 태어나서 대만어와 일본어만 쓰다가 1950년대 이후 장개석이 정부를 옮기면서 북경어를 표준어로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친구어머니는 표준어를 못해도 제가 하는 말은 대부분 알아듣고, 저는 아예 듣지도 못하니까, 무슨 말을 하면 한 단어라도 알아들으려고 엄청 집중을 했지요. 시집장가 가거나 다 큰 자식들이 어머니와 그리 대화를 하는 편이 아니고, 저는 열심히 들으니 담배를 주면서 틈만 나면 이야기를 했습니다.

신통하게도 못할 때는 한 단어만 알아들어도 다 이해를 하고, 조금 하게 되면 한 단어를 몰라서 이해를 못하게 되더군요. 친구 가족들은 고개를 갸웃거리지만 어머니와 의사소통은 조금 불편하지 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재학 중에 사정상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해야 했는데 인사차 또 가오슝에 찾아뵈러 갔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친구에게 미리 들었는지 저를 보시더니 어머님이 상상도 못했던 말씀을 꺼내더군요. ‘석사 박사과정을 마칠 때까지 집에서 학비를 대줄테니 끝까지 공부하라고. 그리고 공짜로 주는 돈을 받으면 마음이 불편할 테니 방학 때마다 가오슝에 내려와 항구에 나가서 짐도 나르며 회사일 도우라고. 힘든 일은 아니라고’

▲ 1월 20일 불광산 사찰 납골당. 큰딸이 다운 증후군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2008년) 서울에서 만났던 제 딸을 기억하며 언니랑 연락하고 싶다고,,, 부인은 제가 들어도 힘든 큰 여행 가방을 꾸려서 이동을 해야 합니다.

이번 설 바로 전에 친구 미졘꿔 가족이 제가 사는 타이난에 내려왔습니다. 다음날 부모님 유골함이 안치되어있는 유명사찰 불광산에 갔지요. 고향 가오슝에서 사업하는 둘째 딸과 만나 먼저 어머님 유골함이 있는 곳을 찾아 작은 사진을 보는데 눈앞이 흐려져서 바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예전에 찾아 뵌 적이 있는 아버님 유골함도 다시 뵈었습니다.

▲ 아빠를 챙기는 어린 딸과 두 딸을 위해 70까지 일을 할 거라는 친구.

아래는 친구 어머니 유골함이 안치된 납골당

이 친구는 자기 어머니가 학비를 제공하겠다고 했던 이야기를 모르고 있더군요. 친구는 선심(?)성 발언도 덧붙였습니다. 혹시 퇴직 후에 중국철학에 관심이 있는 한국 분들이 원하면 정식 석사과정에 입학시켜주겠다고요.

편집 :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김동호 편집위원  donghokim01@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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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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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상학 2019-03-03 14:49:43

    실질적이고

    실리적인 중국인들.


    눈치 체면,

    선입견, 고정관념

    색안경, 편견이라는


    형식에 끌려다니는

    우리들과는 많이 다르네요.


    아, 언제나.

    이 나라 사람들이 식민사대

    노예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어 ~ 허허허허!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신고 | 삭제

    • 짱아치 2019-02-27 15:30:47

      멋져유!!
      대한민국도 중국만 쳐다보지 말고 님모양 대만과의 예전 우정을 이어갔으면 좋겠네요~~신고 | 삭제

      • 박순우 2019-02-27 13:36:07

        참 좋은 사람들이 많네요.
        아들 외국 친구에게 장학금을 주시겠다는 고귀한 성품~신고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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