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환 칼럼] 세월호 참사 5주기, 교육의 길을 묻다

- 교육의 본질은 자율, 자주성에 있다 하성환 주주통신원l승인2019.04.15l수정2019.04.16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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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물었다. '학생의 날이 언제이지요?' 매년 반복되는 질문이지만 제대로 답변을 하는 아이들은 거의 없다. 올해 입학한 아이들도 묵묵부답이다. 스승의 날은 전 국민이 안다. 초등학생들도 알고 있다. 그런데 정작 알아야 할 '학생의 날'이 언제인지 모른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어, 수학 등 기능적 지식은 가르쳐도 아이들이 '학생의 날'에 대해 배우지 못한 탓이다. '학생의 날' 기념행사를 하는 학교도 거의 없는 실정이다. 민주주의가 가장 앞서 간다는 서울 교육의 현주소이다. 이 모든 게 학교교육의 잘못이자 어른들의 잘못이다.

침묵이 흐르는 교실에 교사인 나는 11월 3일이라고 칠판에 적는다. 그리고 또다시 질문을 던진다. '왜 11월 3일이 학생의 날인지 혹시 아는 친구?' 역시 조용하다. 질문을 던진 교사인 나의 잘못이다. 학생의 날 자체를 들은 적도 배운 적도 없는 아이들에게 우문을 던졌으니 스스로 자신을 탓할 뿐이다. 17개 시도 자치단체 가운데 14 곳에서 진보교육감이 들어섰다. 그럼에도 교육은 제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

교육모순, 학교모순은 그대로 심화된 채 고통과 상처는 교사 학생 모두에게 지속되는 느낌이다. 학교잡무는 넘쳐나고 아이들은 입시 고통에서 헤어나질 못한다. 교육 권력을 손에 쥐었음에도 한국의 교육은 왜 변화하지 않을까? 근본적인 교육의 변화! 밑으로부터의 교육 개혁을 간절히 원했음에도 민주시민교육은 구호만 요란할 뿐 학교현장은 요지부동이다. 한국사회 교육의 변화와 개혁의 조짐은 너무 미미하다 못해 답답할 지경이다. 모든 걸 입시교육의 탓으로 돌리면 끝이다. 한국사회 교육에서 대학입시는 블랙홀이기에.

▲ JTBC 드라마 <스카이 캐슬> 등장 인물<스카이 캐슬>은 한국교육이 입시교육으로 규격화된 채 얼마나 일그러졌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작품이다.(사진 출처 : 이정윤 기자)

그렇다! 그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서 학교 교육 역시 예외일 수 없다. 대학입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지식이나 교육활동은 현실에서 무의미하게 여긴다. 더구나 시험에 나오지도 않는 것은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오늘날 학교의 자율활동, 그 중에서도 학생자치활동이 형식화되고 수동적인 형태로 운영돼 온 것은 오랜 관행일 것이다. 자율성을 기르고 자주성과 민주주의를 체험하는 중요한 교육과정임에도 형해화된 학교현실에서 교육은 없다. 아이들 스스로 학교교육의 주인으로 우뚝 서 본 경험을 갖지 못한 현실에서 자율성과 자주성의 교육! 민주시민교육은 설 자리를 잃는다. 일부 혁신학교나 대안학교, 그리고 기독교 계통 선구적인 사립학교를 제외하고 초중고 학교교육의 민낯이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자기성장을 맛보며 행복한 경험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가며 스스로 서는 과정은 교육활동의 요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학교는 아이들이 자기성장을 맛보는 행복한 공간으로서 제 기능을 다하고 있을까? 교사로서 자신 있게 대답하기 어렵다.

블랙홀인 입시교육만을 탓할 게 아니다. 입시교육으로 고통 받는 아이들에게 시험에 나올 만한 지식을 족집게처럼 짚어주는 것으로 현실에 안주할 일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 모습들이 교육의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생의 날'이 갖는 기본 정신은 자주성에 있다. 스스로 모순을 인식하고 불의에 분노할 줄 아는 것이다. 나아가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자율적으로 행동하며 주체적 인격으로 우뚝 서는 것이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은 그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었다. 다가오는 4・19! 4월 학생혁명도 그런 자주성의 발로였다. 80년 광주 항쟁에서 고교생의 참여 역시 자발성에 따른 희생이었다. 2008년 광우병 파동 당시 여중생이 최초로 치켜든 촛불시위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지난 박근혜 탄핵 촛불시위에서도 전국의 중고생이 상경 투쟁하는 등 자주성의 전통으로 면면히 이어졌다.

그러함에도 세월호 참사 5주기를 앞둔 오늘, 우리가 교육의 길을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아이들의 희생이 너무 커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3층 일반 객실 생존율은 70%가 넘었다. 그런데 3층 객실보다 더 안전한 4층 단원고 학생들의 생존율은 왜 23%에 머물렀을까? 3층 객실이 바닷물에 완전히 잠기고 4층 난간에 바닷물이 찰랑거리며 너울댈 때 아이들은 왜 가만히 있었던 것일까? 절체절명의 순간! 왜 선실 밖으로 나가라고 아무도 얘기하지 않았을까?

"객실이 안전하니 이동하지 마시고 안전한 객실에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 방송을 철석같이 믿은 때문일까? 그렇게만 생각하기엔 우리의 이성이 용납되지 않는다. 로이터 통신 기자의 표현대로 위계질서로 공고화된 문화 때문일까?

세월호 부모들의 슬픔과 안타까움, 그리고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책, 『금요일엔 돌아오렴』 어느 대목엔 부모님의 애절한 탄식이 나온다. "그 때 그 상황에서 선생님들 가운데 단 한 분이라도 밖으로 나가라고 아이들에게 외치기만 했어도..." 세월호 동영상을 반복해서 듣다보면 아이들에게 '조용히 하라'는 어느 선생님의 외침이 들린다. 아마도 위급 상황에서 방송 소리를 듣지 못할까봐 아이들에게 주의를 주는 것 같았다. 절체절명의 그 순간에 교사든 학생이든 왜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배가 기울어 선실 바닥에 물이 찰랑거리는데도 교사와 아이들은 왜 질서정연하게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었을까?

▲ 세월호 참사 당시 침몰하는 장면(2014. 04.16)배가 좌현부터 바닷물에 잠기면서 위기감이 눈 앞의 현실로 다가오지 못했던 우현 쪽 2-7반, 8반, 9반 10반은 1명 또는 2명만 생존했을 정도로 학생들의 희생이 너무 컸다. (출처 : 한겨레 자료 사진)

세월호 참사는 단지 단원고 학생들만의 참사는 아니다. 교사든 학생이든 교육에서 자주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교육은 교사에게 그리고 아이들에게 자율성을 경험하게 하고 자주성을 키워가는 상호과정이어야 한다. 그것이 예나 오늘이나 교육의 본질이자 알파요 오메가이기 때문이다.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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