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음에서 벗어나

“감독이 말하려는 게 뭐야”

영화 <로마>를 졸다 말다 보고난 남편이 좌석을 뜨지 못하고 어리벙벙해서 묻는다. 나도 뭔지 몰라서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거야. 그냥 그 때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거야.” 라고 답해주었다. 맞는지 모르겠다.

흑백영화 <로마>는 2019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0개 부문 후보에 올랐고, 그 중 외국어 외국어영화상, 감독상, 촬영상을 받았다. <콜드 워>, <가버나움>도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올랐는데 <로마>에 밀렸다. <로마>는 이외 다른 곳에서도 20개 이상 상을 받았는데 그 중 감독상이 10개고 촬영상이 8개다. '감독.촬영상 싹쓸이'라고 말해도 될까?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영화 <그래비티>에서도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았다. 그가 감독한 <칠드런 오브 맨>도 인상 깊었던 영화라 대단히 기대하고 보았는데... 기대가 너무 컸나? 나에겐 <가버나움> 감동이 더 짙다.

‘로마’는 이탈리아 로마가 아니라 알폰소 감독이 자란 멕시코 동네 이름이다. 알폰소 감독은 1970년 경 어린 시절 ‘로마’에서 살던 이야기를 가정부 클레오(얄리차 아파리시오)의 눈으로 엮어간다. 단란했던 가정은 아버지의 가출로 무너지고 클레오의 사랑도 남자의 무책임으로 무너지지만 그들은 서로를 사랑으로 부둥켜안으며 실망과 절망에도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렇다고 영화가 가정 파탄과정에 중점을 두는 것도, 클레오의 슬픔에 중점을 두는 것도 아니다. 영화에서 잠깐 등장하는 민주화운동에 초점을 맞추지도 않는다. 순진무구하고 다정한 클레오의 눈에 비친 그 시대 모습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대로 보여준다.

1970년을 전후로 멕시코 정권은 극우청년들을 훈련시켜 민주화시위를 진압했다. 클레오 뱃속 아이 아버지도 이 훈련 중에 있었다. 클레오는 훈련 중인 그를 찾아가 아이 아버지임을 알려주지만, 그는 클레오를 모욕하고 아이를 외면한다. 클레오는 다가오는 출산에 맞춰 아기침대를 사러 갔다가 시위를 진압하는 아이 아버지와 마주친다. 이에 충격을 받은 클레오는 아이를 사산한다. 이날 시위진압대도 시민 수백 명을 학살한다.

영화에서 아주 잠깐이지만 한국이 등장한다. 클레오가 훈련 중인 아이 아버지를 찾아갔을 때 '차렷' 이란 말이 나와서 깜짝 놀랐다. 한국인 훈련교관이 청년들을 우리말로 훈련시키고 있었다. 박정희 독재정권의 악행이 대한민국을 넘어 멕시코까지 수출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씁쓸하고 부끄러웠다.

그래도 우리는 그 때 이후 5.18 광주항쟁, 6.10 민주항쟁과 촛불혁명으로 민주화를 이루었는데, 멕시코는 아직 민주화되지 못했다 한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촛불혁명을 영화로 만들면 멕시코 시민들도 일치단결하여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2019년 2월 개봉한 영화 <로마>는 누적관객 42,570명으로 마감했다. 두 달 정도 영화관에서 상영하고 지금은 어디도 상영하는 곳이 없다. 영화를 즐기는 사람들은 ‘넷플릭스’로 먼저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아쉽다. 뭔가 드라마틱한 전개가 있었다면 대중의 입소문을 타고 관객이 몰릴 수도 있는 영화인데... 대중의 인기가 꼭 그 영화의 품격을 좌우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버나움>은 영화가 끝났음에도 한 아이의 외침이 마음에 남아 쉽게 자리를 뜰 수 없는 영화다.

“나도 사랑받고 싶어요. 나도 존중받으며 살고 싶어요.”

아이는 그렇게 외친다. 다행히 아이는 사랑이 무엇인지 존중받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기에 그렇게 외칠 수 있었다.

레바논 베이루트 빈민가에 살고 있는 소년 ‘자인’은 12세다. 어떤 교육기회나 의료적 접촉 없이 하루하루를 들개처럼 살아간다. 배달을 하면서 음식을 훔치기도, 길거리에서 주스를 만들어 팔기도 하고, 부모가 마약(?)을 만들 때면 약을 구입하기 위해 약국을 전전하며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버는 돈은 모두 부모 호주머니로 들어간다. 자인의 부모는 아이를 낳을 줄만 알았지 돌볼 줄은 모른다. 심지어 막 초경을 한 자인의 11살 여동생 '샤하르'를 팔다시피 성인 남자에게 시집보낸다.

자인 부모는 이 모든 것이 계속 아이가 태어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닥친 불가항력적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란 존재가 없는 그곳엔 국가도 없다. 내전 중인 레바논도 부모가 방치한 아이들을 돌볼 여력이 없다. 가장 약자인 빈민촌 아이들은 죽지 않아 마지 못해 살고 있는 것이다.

동생 샤하르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자인은 샤하르를 시집보낸 부모에게 분노하여 집을 나와 길거리를 떠돌다 '라힐'을 만난다. 미혼모 라힐은 아들 '요나스'를 몰래 키우는 불법체류자다. 라힐은 자인을 거두어준다. 자인은 라힐에게서 부모의 사랑과 의무, 책임을 보고 배운다. 일하러 간 라힐을 대신해 요나스를 돌보면서 사랑을 주고받는 것이 무엇인지, 서로 의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서로 신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라힐은 단속에 걸려 구금 된다. 자인은 이를 모른 채 요나스를 혼자 돌본다. 요나스를 돌보는 것이 버거웠던 자인은 더 좋은 곳으로 보내준다는 불법이민업자에게 속아 요나스를 넘겨준 후, 자신도 난민신청을 하기 위해 출생서류를 가지러 집에 돌아온다. 자인은 부모로부터 어떤 서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 시집간 샤하르가 죽었다는 것도 알게 된 자인은 분노로 정신을 잃어 사하르를 데려간 남자에게 찾아가 칼부림을 하다 구속된다.

자인은 구치소에 있으면서 자신이 처한 현실을 고발하기로 작정한다. 생방송 시간에 전화로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를 고소하고 싶어요.”라고 한다. 이를 들은 변호사 '나딘'이 자인을 찾아오고 부모를 진짜로 고소하게 된다. 자인은 부모 고소 이유를 “이 끔찍한 세상에 나를 태어나게 했으니까요.”라고 당당히 말한다.

<가버나움>은 칸 영화제에서 15분간 기립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무엇이 이들을 감동시켰을까?

영화의 주인공 자인과 라힐, 요나스, 샤하르 등 연기자 대부분은 전문배우가 아니다. 레바논의 비참한 현실을 실제 겪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선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기에서 어색함을 찾아볼 수 없다. 특히 자인을 연기한 ‘자인 알 라피아’의 연기력은 탁월하다. 자인은 시리아 난민으로 학교를 한 번도 다녀본 적 없다. 베이루트에서 배달로 삶을 유지한 아이임에도 완벽 이상으로 연기했다. 여동생 샤하르인 ‘하이타 아이잠’도 베이루트에서 껌을 팔다 선발됐다. 라힐 역의 ‘요르다노스 시프로우’도 불법 체류자이다. 그들의 연기가 너무 리얼해서 관객은 실제 레바논의 현장 다큐를 보는 것처럼 느낀다. 자신의 힘든 삶을 과장없이 보여준 배우들에게 감동하고, 레바논의 현실을 영화로 보여준 감독에게 감사하고, 실제 그 상황을 벗어나게 된 자인의 첫 웃음에 응원의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영화 속 주인공인 자인과 샤하르, 라힐은 영화 덕분에 비참한 현실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다른 수많은 자인은 어떻하나? 전쟁으로 피폐한 국가에서 가장 비참한 존재는 빈곤에 시달리는 어린이, 여성들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최근 전쟁 걱정없이 살게 된 우리나라에 고마움을 느낀다.   

영화 <가버나움>은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비롯하여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선 관객상, 스톡홀름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 등을 받은 영화다. 한국에서는 그런대로 선전하지 않았나 싶다. 2019년 1월 24일 개봉했는데 현재까지 14만 명 이상이 보았다. 서울 중구의 대한극장, 서대문구의 필름포럼, 성남의 성남아트센터 미디어홀에서 아직도 상영하고 있다. 혹시 못 보신 분들, 주말에 관람하시면 후회하진 않을 듯...

참고 기사 : 1968년 멕시코 민주화시위 대학살 50주년…수도 광장에 조기 https://www.yna.co.kr/view/AKR20181003009200087?input=1179m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김미경 주주통신원  mkyoung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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