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인간이 고안한 최고의 시스템 중 하나는 ‘다수결 원칙’이다. 다수결 체제는 입법·사법·행정 등 삼권분립에 더해 언론 출판의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근대적 민주주의 시스템으로 발전했다. 재밌는 것은 대한민국의 경우 이런 체제가 제법 자리잡은 위에서 두 번(87년 6월과 2016년 촛불)이나 시민혁명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시민을 위한다는 민주주의 시스템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소수 엘리트들이 입법, 사법, 행정을 장악하고 사익을 추구할 때 언론마저 스스로 권력이 되니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소수엘리트 권력 독점시대’가 돼 버렸다. 그러니 시민은 스스로 살 길을 찾아야 했다. “가만히 있으라”는 권력의 메시지는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는 깨달음으로 돌아왔다. 요즘 비난을 한몸에 받고 있는 이시대 소위 ‘진보꼰대’님들은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어느 신문 칼럼에서 한 작가는 요즘 회자되는 '진보꼰대'를 이렇게 묘사했다. ‘일상생활 속에 등장하는 해프닝조차 구조악의 표출이라면서 폭력, 권력, 기득권 등의 무서운 단어를 오용하여 상대를 공격하고 발가벗긴다. 사회운동의 당위에 지나치게 집착해 적을 설득시키기는커녕 동일한 목표를 지향했던 아군마저 등을 돌리게 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나는 이런 주장에 공감하지 않는다. 권력이 시민을 위해 제대로 복무하지 않아 '신뢰'가 깨진 시대에 ‘일상생활 속의 해프닝조차’ 구조악의 표출로 의심하는 것이 바로 생산적 파괴와 진보의 동력이기 때문이다. 대형사고가 일어나기 전 그와 유사한 29번의 경미한 사고와 300여 차례의 관련 징후가 감지된다는 ‘하인리히의 법칙’은 세월호 시대를 사는 시민 삶의 준거가 되었다. 과한 것이 부족한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물론 진보꼰대를 대하면 누구나 불편하다. 때로는 과한 주장을 별 설득력 없이 무한 반복한다. 상대방의 감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나 상상해보자. 주변사람 생각과 이것저것 고려하면서 거리에서 보도블록을 깨고 짱돌을 집어든 사람이 어디 있으며 그만 좀 하라는 핀잔 속에도 쉼없이 제주4.3의거, 세월호, 여순의거 진상규명을 외칠 사람은 누구인가. 그 ‘꼰대들’이 없었다면 세상이 이만큼 나아졌을까. 이들에게 “적당히 좀 하세요”라고 할건가.

▲ 87 6.10 거리의 시민항쟁   사진출처: 한겨레

문제는 ‘진보꼰대’라기보다는 진보가 아니면서 진보인 척 하는, 스스로 ‘진보’라고 착각하는 ‘가짜진보’들이다. 진보꼰대는 너무나 자기중심적이기에 남에게 폐를 끼치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도 한다. 그러나 상식적인 잘못을 지적하면 곧 인정하고 태도와 행동을 바꾼다. ‘양심’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진정성은 있다는 말이다. 이런 진보꼰대는 공감과 포용의 대상이다. 하지만 가짜진보는 다르다. 물고기가 물을 의식하지 못하듯 그들은 우월적 지위를 충분히 누리면서도 기득권이나 권력 안에서 또는 그 주변에서 그것을 이용하고 누리고 말만 할뿐 스스로 그것을 깨는 데는 많이 게으르다. 어쩌면 무엇이 ‘기득권’인지조차 모르는 것 같다. 이들은 양심적 내부고발을 ‘내부총질’이라고 덧칠하기도 한다. 우리가 경계할 존재는 진보꼰대가 아니라 바로 ‘가짜진보’다.

이동구 에디터  do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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