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산 이은상의 분열적 자화상

- 나약한 지식인의 초상 하성환 주주통신원l승인2019.05.14l수정2019.05.14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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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처녀 오시누나 새 풀 옷을 입으셨네

하얀 구름 너울 쓰고 구슬 신을 신으셨네

꽃다발 가슴에 안고 누굴 찾아오시는고."

노산 이은상이 22살에 쓴 「봄처녀」(1925) 가사이다. 한 때 음악교과서에 실려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작품이다. 문체 또한 유려하여 국민 대중이 애창했던 곡이다.

노산이 29살 때 쓴 작품 '진달래'는 또 어떤가? 연분홍 수줍음을 드러내며 부끄러워하는 그 모습은 산골 소녀의 순박함을 연상시킨다. 순박함과 평화로움 그리고 수줍음은 우리 민족의 정서를 상징한다. 연분홍 수줍음의 꽃! 진달래는 그래서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꽃이다. 진달래를 통해 우리 민족의 서정성을 시심으로 묘사한 아름다운 작품이다.

 

"수줍어 수줍어서

다 못타는 연분홍이

부끄러워 부끄러워

바위틈에 숨어 피다

그나마

남이 볼세라

고대 지고 말더라"

김소월의 '진달래'가 한(恨)의 정서를 담고 있다면 이영도의 '진달래'는 4월 혁명의 핏빛을 떠올린다. 그런가 하면 젊은 시절 노산의 '진달래'는 그의 문학적 재능이 돋보이는 매우 아름다운 동시이다. 역시 한 때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작품이다.

흔히 노산 이은상을 평가하기를 우리나라 전통 시조문학을 현대화 시킨 현대시조문학의 대가로 꼽는다. '성불사의 밤', '장안사', '그 집 앞', '옛 동산에 올라', '가고파'등 노산의 작품은 하나같이 국민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애창곡이 되었다. 실제로 노산 이은상은 한국사회 어느 시인의 작품보다 가장 많이 음악곡으로 만들어졌다. 더구나 충무공 이순신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와 저작으로 주목을 받았다.

▲ 노산 이은상은 현대시조문학의 우뚝 선 봉우리이다. 기행문학과 수필집, 그리고 이충무공과 안중근 등 역사서를 펴내기도 했다. 유진오 박사는 노산을 <현대금석문학의 대가>라고 평했을 정도로 전국에 걸쳐 200개가 넘는 비문을 쓰는 등 금석학에도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그럼에도 노산은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권력을 미화하고 적극 옹호했던 반지성적인 삶을 살았다. 다음 세대를 위해서도 노산 이은상을 객관적이고 균형 있게 평가하는 작업이 필요하다.(사진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러나 노산 이은상은 해방 후 30년이 넘게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 시절, 그들을 미화하고 찬양한 오점을 남겼다. 이승만과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김말봉, 박종화와 함께 문인유세단을 조직해 전국을 순회 유세하며 돌아다녔다. 노산은 당시 시국을 '임진왜란'에 비유하며 이승만을 '성웅 이순신'과 같은 인물이라며 높이 추어올렸다.

3・15부정선거(1960)에 항의하다 최루탄이 박힌 채 죽은 김주열 군 시신이 27일 만에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 떠올랐다. 그러자 제2차 4・11 마산의거가 분노의 파도처럼 거세게 일었다.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속에서도 마산상고, 마산고 학생들은 항의시위를 벌였다. 16살 김주열 군이 4・19혁명의 도화선이자 4월 혁명의 대명사가 된 이유이다.

김주열 군의 시신이 떠오르고 마산 제2차 의거가 있은 지 며칠 지나지 않은 날 노산은 망언을 했다. 1960년 4월 15일 조선일보 인터뷰 기사에서 '지성을 잃어버린 데모', '무모한 흥분', '불합리, 불합법이 빚어낸 불상사'라며 학생들의 정의로운 외침과 희생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심지어 이승만 정권의 불순한 발표대로 배후에 공산당이 있는 듯이 '적을 이롭게 하는 것'으로 '자중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게다가 "고향 마산에서 발생한 일이기에 더욱 걱정이 크고 분개한다"고도 일갈했다.

'성북동 비둘기' 시인 김광섭은 독재자 이승만을 '세기의 태양'으로 찬미했다. '나그네'의 시인 박목월은 '평생을 한결같이 몸 바쳐 오신 고마우신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찬양했고 이은상은 '성웅 이순신과 같은 위인'으로 이승만을 극찬했다. 당대 한국문단 내 지식인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지극히 반지성적이고 반민주적인 행태를 거침없이 자행한 점에서 서정주가 걸어갔던 길을 이은상도 똑같이 걸어갔다.

4월 혁명을 군홧발로 짓밟고 들어선 박정희 쿠데타 세력에 노산 이은상은 처음부터 호의적이었다. 노산이 문교부로부터 받은 지원금을 쿠데타 세력이 사용하도록 지원해 주고 박정희의 공화당 창당선언문까지 작성해주었다. 박정희의 충무공 성역화 사업은 불순한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었다. 정권의 정당성이 없었던 박정희는 이순신을 자신과 동일시하려고 애썼다. 이순신을 숭모했던 노산은 박정희의 충무공 성역화 사업에서 든든한 정신적 배경이 돼주기도 했다. '한국적 민주주의'로 표현된 유신체제를 적극 지지하고 박정희를 '민족의 영도자'로 비문에 남겼다. 박정희를 '이순신과 세종대왕을 합친 위인'으로 잘못된 신념을 드러내기도 했다. 심지어 '서울의 봄'(1980)을 기만하고 5월 광주를 피로 물들이면서 등장한 살인마 전두환을 '한국의 특수상황에서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취지로 잡지에 기고까지 했다. '정치적 무뇌아' 서정주, 김춘수와 하등 다를 게 없었다.

무엇보다 한글학회 회원으로서 자신의 저서인 수필집 『노변필담』(1953)에서 밝혔듯이 "우리 문학이 나아갈 진정한 길은 한자를 완전히 버림으로써 발전할 수 있다"고 강변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노산은 이희승처럼 한글전용론에서 국한문 혼용으로 생각을 바꾼다. 1930년대 후반 일제 강점기 말기는 조선어교육을 폐지하고 창씨개명을 강요했으며 일본어를 국어로 상용하게 했던 시절이었다. 당시 조선어학회는 우리말 연구와 우리말 사전 편찬에 온 힘을 기울였다. 영화 『말모이』는 이를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빼어난 작품이다. 바로 그 주시경 학파의 정신을 그대로 간직하여 외솔 최현배 선생은 한글만 쓰기를 피를 토하듯 역설했다. 그러나 노산은 이희승처럼 국한문 혼용으로 생각을 바꾼다.

노산은 1903년에 태어나 1982년 전두환 정권 초기에 작고했다. 거의 80평생을 살면서 뛰어난 기행문학과 시조작품을 선보였다. 반면에 해방 후 굴절된 채 반지성적이고 반민주적인 삶으로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며 역사의 전진을 저해했다. 해방 이후 노산의 삶은 문단권력을 행사한 여느 문인들처럼 '어용지식인의 표상'처럼 일그러져갔다. 지성은 온데간데없고 권력을 좇는 부나비처럼 맹목적이었다. 당대 빼어난 문인이었음에도 자기성찰의 부재와 역사의식의 빈곤은 노산으로 하여금 민족사의 흐름에 역행하는 삶을 살게 했다.

마산과 창원 지역 출신이거나 그곳에서 삶을 일궜던 문인들 가운데 노산 이외에 노산의 스승인 이윤재도 있고 '귀천'의 천상병과 카프(KAPF) 계열의 권환도 있다. 특히 환산 이윤재는 창신학교 시절 어린 노산에게 조선어와 조선역사를 가르치며 민족의식을 심어줬던 인물이다. 노산의 삶에 정신적으로 가장 깊숙이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노산이 일본 유학에서 귀국 후 계명구락부 시절 조선어사전 편찬사업과 이후 조선어학회, 그리고 진단학회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모두 스승 이윤재의 권유에 따른 것이다. 그만큼 노산이 국학에 관심을 두고 우리말글과 역사에 대한 애정을 평생 수많은 작품으로 선보이며 열정을 쏟은 것도 모두 스승 이윤재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공정해야 하고 균형을 잃지 않아야 한다. 과거 정치권력의 양지에서 노산 이은상이 과대평가된 측면이 있다면 오늘날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자라나는 다음 세대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역사정의가 무너진 한국사회에서 사회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은 너무도 힘겨운 싸움이다. 21세기 오늘날 노산에 대한 평가는 좀 더 객관적이고 균형감을 갖고 공정하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13년 전 마산 시민들이 치열한 역사전쟁 끝에 '조두남 기념관'을 '마산기념관'으로 바꾸고 '노산문학관'을 '마산문학관'으로 바꾼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노산은 전두환을 찬양하고 죽기 1년 전엔 5공 국정자문위원으로 독재 권력을 옹호했다. 오월 항쟁 주간을 맞아 역사의 칼날 위에 서기보다 반평생을 권력이 내려준 시절에 안주하며 지식인으로서 자기성찰이 부재했던 노산의 삶을 이제는 재평가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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