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탐방기 10] 허창무 주주통신원

동대문시장은 1905년 7월 5일 우리나라 최초로 대한제국 한성부에 등록된 민영 도시 상설시장이었다. 이를테면 요즘의 전통시장 제1호다. 본래 흥인문 주변에는 예전부터 이현 또는 배오개시장이라는 난전이 형성돼 있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실질적으로 일제가 주권행사를 장악하게 됐고, 일본의 경제 침탈이 본격화됐다. 그 한 예가 바로 20세기 초부터 시작된 남대문 시장의 경영권 장악이었다.

일본의 경제침략을 막고자 종로 상인들이 시장 설립에 나섰다. 경제입국만이 국권 회복의 길이라는 생각으로 뭉친 것이었다. 1905년 11월에는 고위 관리였던 김종한과 종로의 거상이며 두산의 창업주인 박승직, 장두현 등 3인의 발기인이 토지와 현금 10만 원을 출연해 ‘광장주식회사(廣藏株式會社)’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동대문시장을 관리하기 위해 설립된 회사였다. 이때부터 동대문시장의 이름이 ‘광장시장’으로 바뀌었다. 시장의 원위치가 광교(廣橋)와 장교(長橋) 사이에 있었던 점도 ‘광장시장’이란 이름의 기원이라고 한다.

광장시장은 전차정거장 옆에 있는 데다 뚝섬과 광나루벌의 채소를 실어 나르던 기동차의 시발점과도 가까워서 큰 시장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구호물자나 미군 부대에서 불법적으로 흘러나오는 외제품을 거래하면서 구호물자시장이라고도 불렸다. 광장시장은 차츰 한복 원단, 양복지, 양장지, 커튼, 침구류 등을 취급하는 직물도매상들의 시장으로서 명성을 쌓았다. 근래 들어서는 직물과 의류시장은 동대문종합시장으로 옮겨갔다. 대신 요즘 광장시장은 마약김밥, 닭요리, 생선회, 매운탕, 아귀찜, 원조 순대, 빈대떡 등 다양한 먹을거리로 유명하다.

한국전쟁 이후 동대문 일대의 상권은 광장시장을 기점으로 계속 동쪽으로 확장됐다. 현재는 청계천을 따라 광장시장, 방산시장, 동대문종합시장, 평화시장 등이 늘어서 있다. 이 거대한 시장 지역은 세계적인 의류, 패션산업의 중심지다.

1950년대 말에는 정치깡패 이정재의 득세로 시장상인들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1970년 11월 13일에는 평화시장 재봉사요 재단사로 일했던 전태일이 노동자들의 노동환경 개선과 인권을 부르짖으며 이곳에서 분신자살을 하기도 했다.

인근의 국립의료원 자리에는 조선시대 훈련원이 있었다. 맞은편에는 키릴문자 간판이 즐비한 중앙아시아타운이 형성돼 있다.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몽골, 카자흐스탄 등지에서 온 사람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조성된 거리다.

오간수문

동대문 남쪽으로는 성곽이 보이지 않는다. 북적거리는 상가를 지나 청계천에 이른다. 옛 동대문운동장에 이르기 전 성곽이 지나갔을 지점의 복개천 횡단보도 옆에서 청계천 복원공사 때 만든 오간수문의 자취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복개천 폭이 좁아 네 칸만 겨우 표시해뒀다. 정작 오간수문의 모조품은 복개된 다리 아래 위쪽 제방 밑에 만들었다. 참으로 보기에 민망한 모조품이다. 앞으로 모조품을 없애고 제 자리에 본래의 모습대로 복원했으면 좋겠다.

청계천의 이름은 조선 시대에는 개천(開川)이었다. 청계천은 일제강점기 이후의 이름이다. 원래 폭이 좁고 수심이 낮은 개천을 대대적으로 개착한 공사는 태종 12년 정월 15일부터 2월 15일까지 한 달간 52,800명의 인부를 동원해 시행됐다. 당시 사망자가 64명이었던 것을 보면 가히 엄청난 공사였단 걸 짐작할 수 있다. 개천(開川)이란 의미는 ‘작은 내나 개울을 넓히고 파낸다’는 토목공사의 의미였는데, 태종 때의 공사 후로 도성 안의 내명당수(內明堂水)를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됐다.

그로부터 9년 후 세종 3년 6월 두 차례의 홍수로 개천이 범람해 인가가 물에 잠기고, 많은 수재민과 익사자가 발생했다. 세종은 신하들의 주청에 따라 준천공사를 실시했다. 그러나 태종 때처럼 대규모로 일시적으로 하지 않고, 세종 4년부터 16년까지 장장 12년에 걸쳐 농한기에만 소규모로 실시했다. 대규모의 공사에 따르는 재해를 줄이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이때 오간수문도 만들었다. 태조 때 지대가 낮은 동대문 부근에 두 개의 수문을 만들었는데, 북쪽에 삼간수문을 만들고, 남쪽에는 이간수문을 만들었다. 신하들은 미래의 홍수에 대비하여 북쪽의 삼산수문을 한 칸 더 늘리고, 남쪽의 이간수문도 한 칸 더 늘리자고 주청했다. 그러나 실제 공사과정에서는 북쪽의 삼간수문만 두 칸을 더 늘리고, 남쪽의 이간수문은 그대로 뒀다(세종 4년 1월 16일의 실록 기록).

오간수문은 인왕산과 백악산의 물줄기가 청계천으로 흘러드는 대표적인 수문이었다. 영조 때 청계천 준천공사를 하는 그림(水門上親臨觀役圖)을 보면  5개의 홍예수문을 정치한 쇠창살로 막아놓았다. 1900년대 사진을 보아도 그것은 여장을 갖추고 물가름석도 훼손되지 않은 견고한 것이었다. 수문의 홍예는 예술품이라고 할 만큼 아름다운 구조물이었다. 둔중한 시설물임에도 냇물 위에 떠서 어딘가로 흘러가는 듯한 낭만적인 느낌마저 줬다. 그 수문은 그러나 도둑이나 죄인들이 도망가는 통로로 악용되기도 했다. 청계천 복원 시 선조 때의 총통과 19세기 초의 상평통보가 발견된 것을 보면 그런 사실을 알 수 있다.

오간수문 밑을 흐르는 청계천을 바라본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천변에는 가마니때기로 칸을 막은 판잣집들이 즐비했다. 그것들은 곧 무너질 듯이 위태로워보였다. 그런 곳에서 게으른 아주머니가 푸석한 얼굴로 요강을 들고 나와 배설물을 냇물에 버리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아낙네들이 천변에 앉아 빨래방망이를 두드리며 빨래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보였다. 여자들은 빨래를 하면서 수다를 떨었을 것이고 옆 아낙에게 걱정근심을 토로했을 것이다. 그런 소박한 풍경이 엊그제 있었던 같은데 벌써 반세기가 흘렀다. 격세지감이다. 

임꺽정과 오간수문
심야에 전옥서가 소란스러워졌다. 습격이었다. 횃불이 여기저기서 난무하고 함성이 들렸다. “임꺽정이다!” 누군가 소리쳤다. 임꺽정은 명종 때를 떠들썩하게 했던 백정 출신 도둑이었다. 그러나 빈한한 백성을 괴롭히는 도둑이 아니라 한양 북촌 등의 부잣집을 털어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거물 도둑이었다.

그날 밤 임꺽정은 옥에 갇힌 가족을 구출해 청계천 쪽으로 도망갔다. 관군이 급히 뒤쫓았지만, 그는 흥인지문 부근에서 종적을 감췄다. 주변을 샅샅이 뒤졌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오간수문으로 도망갔다. 수문은 창살로 막혀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못했다. 힘이 장사인 임꺽정은 오간수문의 창살을 꺾고 빠져나가 수문 뒤편 갖바치 마을에 숨었다. 그곳에서 며칠 머물다 청계천 4가 쪽 배오개로 도망갔다. 민심을 얻은 의적이어서 배오개 사람들이 그를 신고하지 않았다. 

이간수문

청계천을 지나 도로를 건너면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 이른다. 지금은 공사 중이라 주변이 어수선하다. 이벤트홀을 끼고 오른쪽 밑으로 내려가면 복원된 성곽 밑에 이간수문이 원형 그대로 서 있다. 위로는 성곽이고 아래로는 수문이어서 성곽과 일체를 이루고 있다. 그 웅장한 모습이 흐뭇하다. 마치 살아있는 선조를 대하는 기분이다.

일제가 1924년부터 성곽을 허물고 1926년까지 완성한 경성운동장은 그 당시 동궁이었던 일본 황태자 히로히토(裕仁, 1901~1989)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건설한 것이었다. 국치를 느끼게 하는 시설이었다. 그러므로 이간수문은 그 자리에서 무려 87년 동안이나 땅속에 묻혀 있다가 세상으로 나와 빛을 본 것이다.

남산의 내려오는 물줄기를 받아 청계천으로 들어가게 하는 이간수문. 이간수문의 홍예는 밑 부분이 건재해 윗부분만 보수했다. 수문 바닥에는 바닥을 파이지 않게 하는 ‘장군석’이 있고, 물이 들어오는 쪽의 두 홍예 사이에는 물줄기를 받아 두 수문으로 갈라져 들게 하는 물가름돌이 있다. 물가름돌은 바위를 연상케 할 만큼 크다. 홍수에 홍예가 무너지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기능을 했다. 물가름돌도 장군석도 그 거무튀튀한 색깔은 세월의 풍상을 견디고 남았다는 징표로 친근감을 더해준다. 위쪽 홍예 안에 있는 목책은 요즘 만들어 세운 것이다. 홍예의 양쪽 석벽에는 목책을 받쳐주는 ‘장군목’을 끼웠던 자리가 분명하게 남아있다.

글 허창무 주주통신원/ 사진 이동구 에디터

허창무 주주통신원  sdm3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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