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 독립운동 탐방여행 3

노래는 연설보다 강하다 유원진 객원편집위원l승인2019.06.09l수정2019.06.09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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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을 정벌하라]

▲ 저기가 블라디보스톡이구나 - 배가 항구에 다가가는 동안 구경을 하고 있는 회원들

블라디보스톡은 그저 인구 60여만명의 소도시였다. ‘동방을 정벌하라’ 는 뜻이 무색하게 한 때 그 위용을 자랑하던 극동함대는 상업항에 한 쪽을 내주고 겨우 체면만 유지하고 있었고 이빨 빠진 사자의, 자존심 상한 얼굴로 러시아인들이 거리를 걷고 있었다. 한때 위대한 러시아가 있었고, 혁명으로 세상을 바꾼 레닌의 나라, 미국보다 한 발 먼저 우주로 나간 유리 가가린의 나라, 위대한 볼셰비키의 조국 소련은 어디로 가고 침울한 러시아가 그곳에 남아있었다.

▲ 러시아 혁명의 국제적 영향 - 출처 다음 백과

“지금 러시아를 상징하는 키워드가 뭔지 알아?”

블라디보스톡을 간다니까 친구 하나가 내게 물어본 말이다.

“상처받은 자존심이야. 한때 라이벌이었던 미국에 밀려서 더 이상 상대가 되지 못하는 데 대한 자격지심 때문에 우울한 사람들이 되었지. 문학이나 음악 등 예술의 역사 뿐 아니라 우주탐사같은 과학기술에서도 미국을 앞섰었는데 . . . 이제 모든 면에서 비교가 안되게 뒤진 2등 국가로 전락하여 다친 자존심, 그게 지금 러시아를 지배하고 있는 키워드이지. 그래서 엉터리 사회민주주의를 운영하고 있는 푸틴이지만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는거야. 러시아인들이 잃어버린 강함에 대한 동경, 한때 세계의 절반을 지배했던 위대한 러시아에 대한 향수 . . . 젊고 강해 보이는 푸틴이 그것을 다시 찾아줄 거라는 인민들의 막연한 희망이 그를 떠 받치고 있는 기둥이지.”

▲ 러시아 최강 극동함대가 블라디보스톡 다리를 배경으로 정박해 있다.

그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모르지만 하루 밤을 지낸 배 안에서나 블라디보스톡에서 본 러시아인들은 어딘지 침울해 보였다. 입항할 때 보았던 극동함대의 위용은 볼만 했지만 어쩐지 묶어 둔 배들 속에 엔진은 없고 껍데기만 바다에 띄워놓은 것 같은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극동함대가 정박해 있는 그 부두에 반체제 인사였던 솔제니친의 동상을 세워 놓은 러시아 정부의 뜻은 무엇일까 하는 생뚱맞은 생각도 들었다. 항구를 뒤덮은 잿빛 하늘 아래서 블라디보스톡은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 삼개국을 순회하는 크루즈선의 항구를 뜻하는 국기들이 나란히 걸려있다. 터미널 뒷쪽으로는 시베리아횡단 열차의 시발점인 블라디보스톡 기차역이 있다.

[노래는 연설보다 강하다]

▲ 블라디보스톡에 입항하기 직전 아침미팅 - 표정들이 진지

이번 여행에서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일들은 애초 목적이었던 독립운동 유적지나 블라디보스톡의 풍광 혹은 연해주 벌판의 광활함이 아니라 세 번의 노래들이 나온 장면들이었다. 앞에서 소개했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첫 번째 노래는 연해주 여행 내내 귓가에 맴돌더니 여행이 끝나고 보름이 지난 지금까지, 일하는 중간중간 흥얼거리는 콧노래가 되었다. 억지로 외우려면 불가능에 가까운 가사도 계속된 흥얼거림으로 마치 벽돌이 쌓아지듯 자연스레 앞뒤가 맞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연해주 독립운동사를 규정하기에, 아니 우리의 독립운동 역사를 관통하는 화두로 그 노래 만한 것이 있을까.

▲ 노비 출신으로 개화기에 이룬 막대한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치고 독립투사들을 도와서 '뻬치카(난로)' 라는 별명을 얻었다는 최재형 선생이 머물던 고택

만주벌에서 풍찬노숙하던 조선청년 이우석 ~ (중략) ~ 보상심사에서 빠지더니 ~ (중략) ~ 난곡철거민촌 ~ 막노동판 ~ 공장에서 첫월급 12만원 외아들 ~ 마지막 희망이지 ~

비단 연해주 독립투사들에게만 해당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를 단 3분만에 그렇듯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 있는 수단으로 이만한 노래 아니고는 불가능하리라. 그런 인식의 토대 위에서 보니 모든 것들이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 안중근 의사 추념 비석

최재형 선생의 고택에서 본 자료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거사도 연해주에서 준비되고 시작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일본의 항복으로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연해주에서 독립군 부대들이 집결하여 본토 회복 계획을 세운 진격도 앞에서는 가슴이 뛰기도 했다. 독립군 부대들이 두만강을 건너 파죽지세로 한반도를 몰고 내려와 일본군들을 바다로 쓸어버리는 상상을 하니, 일본의 항복이 조금 더 늦어졌으면 좋았을 것이다 하는 헛된 망상도 해 보았다.

▲ 연해주 독립군부대들이 총집결하여 국내로 진격하기 위한 작전도

우리의 천박한 식민사학자들은 우리의 독립은 싸워 쟁취한 것이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의 선물이라고 가르쳤었다. 그들은 민족을 배반한 댓가를 치르지 않고 재빨리 새로운 강자인 미국에 붙음으로서 또다시 민족을 배반했다. 그들에게 연해주의 독립운동사는 자신들의 치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 배반의 세월을 연해주는 힘들게 견뎌냈고 이제 그 참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블라디보스톡에서의 첫 식사는 먹어도 먹어도 끝이 없어서 결국 옆 테이블에 나누어 줬던 대게 만찬이었다. 테이블마다 산같이 쌓인 대게 접시가 나오자마자 사람들의 탄성이 이어지고 모두들 그야말로 폭풍흡입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디선가 ‘니들이 게맛을 알아?’ 하는, 그야말로 엄청난 양의 게를 혼자 해치우신 어르신의 농담과 함께 박장대소가 터졌지만 뭐니뭐니 해도 그 만찬의 압권은 ‘천만번 더 들어도 기분 좋은 말, 사랑해~’ 였다.

▲ 접시마다 대게를 산더미같이 쌓아 내놓은 식당 - 그러나 대게보다 오히려 '사랑해 건배'로 더 기억에 남을 듯
▲ 모두들 대게의 맛에 취해 열심히 먹고 있는데 김정훈 회원이 일어나 건배사를 제의하고 있다.

정신없이 대게 먹기가 좀 주춤해졌을 때 김정훈 회원이 건배를 제의했다. 당신이 ‘천만번 더 들어도 기분 좋은말’ 까지 노래를 부르면 그 다음을 함께 제창하라는 것이었는데 단박에 분위기를 띄우면서도 마음을 훈훈하게 만드는 대박 건배송이었다. 그가 선창을 했다. 천만 번 더 들어도 기분 좋은 말~ 우리가 따라 한 사랑해는 마치 한 사람이 부르는 것 같이 멋지게 화합을 이루었다. 멋진 노래에 멋진 분위기였다. 그 사랑해 건배는 나중에 한 번 더 있었는데 그때는 우리 일행이 아닌 사람들도 같이 따라해서 식당안이 모두들 사랑해 분위기에 휩쌓여서 아주 보기가 좋았다. 이번 여행에서 말이 필요없는 노래의 힘을 경험한 두 번째 순간이었다. 세 번째는 . . . (계속)

[또 하나의 슬픈 노래 - 다뉴브의 아리랑]

알프스의 눈물이라는 다뉴브 강의 차디찬 물속으로 33명을 태운 배가 가라앉은 지 열흘이 지났다. 사망자는 18명으로 늘어났고 실종자는 8명으로 줄어서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실종자들 모두 사망한 쪽으로 예상을 하고 있는 가운데, 이제 대책본부의 총력은 실종자들의 시신을 찾는데 쏟아지고 있다. 사고 후 며칠째 되던 날이었나 . . . 19명이나 되는 실종자들을 찾지 못해 애태우는 가운데 다뉴브 강둑에서 아리랑이 울려 퍼졌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부를 줄 아는 노래이지만 노래를 부르고 있는 사람들은 한국인들이 아니었다. 헝가리 사람들이 흰 국화를 강에 던지면서 처연한 목소리로 아리랑을 부르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눈물도 훔치고 있었다.

이제 그만 나와서 고향으로 가야지요. 그 차가운 물에서 나와 그리운 가족의 품으로 가야지요. 이렇게 돼서 정말 미안해요 . . . 그들의 아리랑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리고 기적처럼 시신이 계속해서 발견되기 시작했다. 과학적으로는 물속에 잠겨 있던 시신이 떠오를 시간이 되어 그런 것이라지만, 나는 물결치는 다뉴브 강에 퍼져 나가던 노래, 아리랑의 힘이라고 믿고싶다. 그 강 속에서 어이없이 생을 마감해야 했던 영혼들이 그 노래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8명의 실종자가 남아 있지만 그들도 곧 나오리라고 믿는다. 이제 그만 나와서 가족의 품으로 갈 것이라고 믿는다.

* 다뉴브 강의 사고에서 아직 실종상태인 분들의 조속한 귀환을 기원합니다.

유원진 객원편집위원  4thme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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