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기 한겨레 정기주주총회 현장인터뷰

다소곳하고 아름다운 배연옥 씨는 창간 주주였다. 나는 그녀를 처음 순간 시인 김영랑의 생가가 떠올랐다. 햇살 고운 마당가에 천상의 선물처럼 곱게 피었던 모란. 그러나 여름에 피는 모란처럼 따스함을 풍기는 외모와 달리 그녀의 이야기는 적확하고 단호했다. 당시 유치원교사였던 그녀는 암울한 시대에 대한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비민주적이고 삭막한 시대를 깊이 고민했다. 그녀가 추구하는 사회적 가치관을 실현할만한 공간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 침잠해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그녀는 길을 가다 말고 명동 한복판의 전봇대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아날로그적인 낡은 방식이었다. 월세나 하숙방 있음, 가게 세놓음, 따위의 손 글씨가 덕지덕지 붙던 전봇대에 그녀의 시선이 꽂혔다. ‘한겨레신문창간주주모집’.  동아일보 해직 기자들이 참다운 언론을 만들어 무너지는 세상을 바로 세우려고 한다는 광고였다. 믿기지 않아서 읽고 또 읽었다. 맑은 물 한 모금이 그리워 목이 타던 그녀였다. 정론! 정론을 위한 주주모집이라니! 바로 이것이다! 그녀의 가슴에 격정적인 전율이 일었다.

이런 만남, 느닷없이 찾아온 첫사랑처럼 한겨레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그녀는 맨 처음 창간주주가 된 뿌듯한 사실을 누군가에게 막 소문내고 싶었다. 정권에 백기를 들지 않을 정론지가 생긴다는 기쁨을 마구 외치고 싶었다. 알아도 모른 척, 보아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그렇게 살아야 무사히 집으로 돌아와 저녁밥을 먹을 수 있는 시대였다. 독재에 오래 길든 사람들은 쉽게 가슴을 열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가슴 벅찬 희망을 끝내 숨길 수 없었다. 그녀는 마침내 발설하고 말았다.

먼 숲 속의 새소리처럼 반짝이는 머루알, 그 까만 눈의 어린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토끼반 어린이들 지금부터 선생님 얘기 잘 들으세요. 선생님은 지금 정말 기분이 좋아요. 우리나라에서 아니, 세계에서 하나뿐인 신문이 나오거든요.”
“선생님, 그게 뭐예요?”
그녀의 기쁜 고백은 아이들의 마음 언저리에도 못 미쳤다.
“신문은 알지?”
“네!”
“곧 한겨레신문이 세상에 태어나. 한겨레신문이란 건 말이야,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는 아주아주 착한 신문이 될 거야. 절대로 나쁜 일을 하지 않을 신문이라서 이만큼 기쁜 일이란다.”
그녀는 머리 위로 팔을 한껏 뻗어 큰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와아아! 좋아요.” “선생님! 우리도 좋아요!” “선생님! 저도요, 저도요.”

꼬맹이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선생님처럼 둥근 팔을 만들었다. 영문 모르고 선생님이 좋다고 하면 좋은 것인 줄 알던 어린 것들이었다. 사실, 기필코, 분명, 좋은 일이었다. 그녀가 행복하자 아이들도 덩달아 행복했다. 지금 그 아이들은 자라 서른 초중반이 됐다.

그 날 이후, 그녀는 토끼반 아이들을 데리고 한겨레가 초대한 가족잔치나 등반 행사도 다녀왔다. 마현정(당시, 7살)이라는 아이의 기사가 한겨레에 실리기도 했다. 잠시 자신이 품에 든 아이들이라도 한겨레를 꼭 기억하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그녀는 창간 이전 조선일보 사옥을 견학했던 아이들을 데리고 한겨레를 방문했다.
“선생님, 착한 신문사는 왜 조선일보보다 더 작아요?”
경제논리를 알 바 없는 질문이었다.
“그건 말이다, 정직한 사람들이 모인 곳은 크고 멋지지 않아도 괜찮아서야.”
어리디 어린 것들의 눈에도 착한 것이 더욱 크고 번성해야한다는 바른 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얘기를 듣는 동안 나의 가슴에 모란꽃잎 같은 그녀의 열정이 옮겨와 불붙었다. 아, 그래, 한겨레의 태동에는 이런 사람들의 향기로운 가슴이 있었구나. 짧은 시간이었지만 창간주주인 나와 그녀는 데칼코마니처럼 한 송이 모란을 피우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주주에게 한겨레에 바라는 점을 물었다. “전에는 지나치게 진보 쪽으로 기운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건 바른 언론의 태도가 아니라고 봐요. 지금은 그나마 조금씩 균형을 잡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심층 취재도 좋지만 지나치게 지루한 감도 있어요. 그리고 여성의 삶에 관한 다양한 발굴기사 같은 게 있었으면 해요. 지금 방황하는 5포세대의 여성들에게 미래를 제시할 수 있는 희망을 주길 바라요.”

이제 장년의 나이가 된 그녀는 역시 선생님다웠다. 어린아이들이 부모를 떠나 처음 만나는 세상에서 본보기가 돼야 했던 유치원 선생님은 지금도 아이들 걱정이 그득했다. 현재 경기도 고양에 사는 그녀는 유치원 및 어린이집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전국에서 오지발견테마여행을 진행하며 어린이들이 아직 때 묻지 않은 자연 살이를 체험하도록 지도한다.

그녀는 한겨레:온의 출범과 주주통신원들의 활동에 무척 호의적이었다. 지금도 토끼반 아이들이 ‘한겨레신문’을 떠올리며 행복하길 바라는 그녀의 고운 미소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이미진 주주통신원  lmijin0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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