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이 주체 될 때 변화 가능"

4월 3일 광화문광장으로 향했다. 세월호 정부시행령 폐기를 내건 농성장에 다가섰다. 몇 차례 맴돌다 주뼛거리며 엉덩이를 붙였다. 유성효(65)씨 옆이었다. 그는 유가족이 아니었다. 나처럼 잠시 들른 심정도 아니었다.

그는 작년 8월 30일 세월호 특별법 촉구를 위해 삭발했다. 단식 10일째였다. 이번에는 첫날(3월 30일)부터 동참해 매일 밤 11시경에 귀가한다. 상징적으로 416시간을 채우는 끝 날(4월 16일)까지 같은 일정이다.

그는 매스컴에는 오르내리지 않는 재야인사다. 그에 관해선 1985년부터 1996년까지의 행적만 인터넷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 인권국장으로 활동하다 정치권의 집시법(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제1호로 수감(1985) 및 사면 복권(1987) 되었다. 민주당 탈당 후 1997년부터 혼자 하는 거리극(劇)은 스스로 챙긴 현장사진들에 박혀 있다.

인터뷰는 4월 6일에 했다. 그는 물음에 응하는 인터뷰이가 아니었다. 나는 단 한 명의 초청 관객이 되어 정체성을 밝히는 그의 모노드라마를 경청했다. 그의 발화가 독백으로 끝나지 않음을 알리기 위해 가끔 추임새나 넣었다.

 

<제1막> 박근혜, 오늘 계 탔다!

80년대 민주화 활동을 했다. 여기(세월호 관련 농성)는 작년 7월 17일부터 나왔다. 예전에 민주화 활동을 한 사람으로서 도움이 된다는 이런 거보다는, 그냥 측은지심으로. ‘이 상태가, 이런 세상이 쳇바퀴처럼 계속 돌아가는가!’, 이런 처절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나왔다.

국가에서 크고 작은 사고는 있을 수 있다. 박정희 시절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를 시작으로, 삼풍백화점 등등 너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이건 참 대형사고 아닌가? 이 세월호 사건은 망망대해에서 큰 배가 넘어졌는데, 그 지척에서 우리가 눈을 뜨고 보고 있었다는 거. 대통령까지도!

나라의 최고 지도자로 갔다기보다 문제가 복잡하다. 18대 대선 이후로 계속 부정선거라는 말이 회자되었지만 재판을 하면 아니라고 그랬다. 지금 법원이 도처에 친여권 세력이고, 그 친구들이 임명한 친구들이니 법원이 제대로 판결하기 어렵다고 본건데. 4월 16일 국정원 재판이 있었다. 그 날 그게 젤 큰 사건이다, 그런데 세월호 침몰사고가 그날 발생했다. 그 날 대통령이 거기에 내려간 걸 보면서, ‘박근혜, 오늘 계 탔다!’, 그런 생각을 했다.

 

<제2막> 1981년 자택연금 중인 김영삼 독대하다

김영삼은 70년대에 40대 기수론을 제창했다. 그때 김대중은 반대했다. 당시 고3이었는데 김영삼에게 축전을 보냈다. 민주당이 군부독재반대 야당이지만, 사고 자체가 늙었는데, 김영삼은 젊으니까. 싸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랬다.

그런데 박정희가 죽은 뒤에 김영삼, 김대중이 너무 약한 거다.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그래서 81년 1월 1일 아침 8시에 상도동에 갔다. 김영삼은 가택연금 중이었다. 군부계엄령시절이어서 아무도 못 들어갔다. 3겹으로 어마어마하게 에워싼 공권력을 어렵게 설득해 결국 김영삼을 독대해 나의 생각을 전했다.

 

<제3막> 1984년부터 민추협에서 활동하다 집시법 제1호가 되다

84년부터 민추협활동을 했다. 당시는 학생들이 야당도 기득권세력이니 보수세력이나 마찬가지다 하면서 (정치권과) 합치지를 않았다. 내가 여러 대학을 다 다니면서 "서로 힘을 합쳐야 군부세력을 쓰러뜨릴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서로 감옥만 갈 뿐이다" 라고 설득했다.

정치권과 전대협이 연대한 서울대 범국민토론회(1985.11.21. 1박 2일) 연사들을 섭외했는데, 그들이 잡혀갈 줄은 몰랐다. 나는 9월 고대 사건(1985.09.07.)으로 이미 수배 중이었는데, 뒷산으로 숨어 나왔다가 얼마 후 검거되어 안기부로 잡혀갔다. 48시간 잠을 안 재웠다. 그렇게 집시법 제1호가 되었다.

 

<제4막> 6·10때 감옥에 못 가서 아쉽다

86년 10월 말 건대에서 반외세 독재타도 집회(3,000여명 단식농성)를 하는 중에 공권력이 헬기로 쳐들어왔다. 현장에 있던 전원을 연행·구속한 것에 대한 전대협 항의시위집회에 정치권 대표연사로 경희대를 향하던 중 남대문 정보과장에게 잡혀(1986.11.15.) 임진각으로 강제 연행되었다. 그때 반외세와 재야인사는 바로 빨갱이로 연결되었다. 경찰은 만약 땅굴로 저쪽으로 넘어가면 어떻게 하냐는 농담 아닌 진담을 했다.

87년 6월 9일, 연대세브란스에서 이한열 시신을 놓고 서로 대치하고 있다는 전화를 받고 갔다. 밤11시쯤 민추협 사무실에 간다고 하니까, KBS 정혜진 기자가 말렸다. 그때 KBS는 지금보다 더 정치권이고, 경찰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랑 자주 만나니까, 경찰이 이한열 탈취하면 어떡할 겁니까, 했다. 적인데도 동지적인 얘기를 해주니까 고맙기도 하고, 빠져나올 수도 없고. 설마 그렇게 하겠습니까, 말하면서도 2시간을 더 있었다.

김세진 아버지가 "민추협 사무실에 가서 조금 자고 내일 행사에 참여하겠다" 그래서 모셔다드리고, 얘기하다보니 새벽 2~3시가 된 거다. 다시 가보니 이미 개미새끼도 못 들어가게 바리게이트를 쳐두었다. 그래서 6·10 민추협 행사를 마치고 다시 들어가려고, 다시 들어가면 감옥에 갈 판이지만, 내가 대표인데 안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 여기 광화문에 왔는데, 경찰이 날 잡았다. 은평구의 한 경찰서에 끌려가 이틀을 잡혀 있는 바람에 결국 거기 못 들어갔다. 그래서 감옥을 안 간 거다. 거기 있다가 감옥 갔던 사람들은 26일 만에 개선장군처럼 나왔다. 그래서 좀 아쉽다.

 

<제5막> 양김 단일화 실패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97년도에 정당 쪽에서 사라졌는데, 나랑 더불어 정통민주당이 없어진 거다. 노무현은 국민회의 쪽으로 갔고, 이부영·제정구는 한나라당으로 갔다. 왜 제정구가 한나라당으로 갔겠는가. 87년 김대중이 단일화를 안했기 때문이다. 그 때까지는 김영삼보다 김대중이 실질적으로 단일화 책임이 더 있다.

왜냐? 9월 29일 10시에 외교구락부에서 만나서 담판을 하기로 했다. 통일민주당(김대중과 같이 만듦)의 김영삼, 86년 11월에 단일화 되면 김대중은 대통령 선거에 안 나가기로 국민에게 선언까지 했고, 김영삼은 40:60으로 담판에 들어갔다. 사퇴하는 쪽이 60%를 먹는 걸로. 그날 김대중이 안 나왔다.

그런데 왜 언론에 대대적으로 안 나왔느냐? 그때 다룬 것은 동아일보 하나 밖에 없었다. 다른 언론들은 만약 김대중이 단일화에 안 나오면, 노태우 쪽 기사를 싣기로 한 거다. 원래 6·29가 전두환 쪽의 공작으로 만들어진 거다. 이쪽을 이간질 시켜 둘이 나오게 만들고, 그러면 자기네가 이긴다고 계산한 거다. 만약 김대중이 사퇴한다고 신문에 나오면 자기네가 불리하거든.

‘4자 필승론’(경상-노태우·김영삼, 충청도-김종필, 전라도-김대중)은 김대중 쪽에서 개발한 논리다. 김영삼이 40% 다 양보한다 그래도 다 필요 없어! 그래도 책임이 있으니까, 그럼 당신도 나와라, 이게 ‘4자 필승론’이야. 재야도 문제가 있다. 김대중이 문제가 있지만 비판적 지지를 하겠다(약70%) 했으니까.

그때 단일화가 되었으면, 통일민주당 당원과 민주화세력(노동자, 학생, 재야)이 지지하니까 50대50으로 싸우는 건데, 그 자체를 싫어한 게 ‘4자 필승론’이다. 노무현이 열린우리당을 만든 배경이다. 지금 그 역사를 망각하고 있다.

 

<제6막> 2011년 이명박에게 편지를 20통 보내다

김영삼에게 IMF 사태에 대해 책임지고 사퇴할 것을 촉구하는 성명(1997.12.09.)을 시작으로 역사와 부정부패에 책임이 있는 현·전직 대통령들에게 꾸준히 사죄 촉구 및 제안을 했다.

2008년에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은 세계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자기 자산 50%를 기부했다. 그런데 노태우와 김영삼은 기념관과 동상을 건립한다는 국내기사(2010.06.18.)를 보고, 이들의 사죄와 부정부패 관행 타도를 촉구하는 good판 제1삭발을 했다(2010.10.20. 10시, 광화문).

노무현은 양심이 있어서 죽었다. 밑에 있는 사람들이 부정부패했다고. 진보나 보수를 떠나 (그 의미를) 인정해야 한다. 그의 죽음에 기가 막혀서 이명박에게 편지를 썼다(2011.01.28.). ‘퇴임 후 제공되는 전직 대통령에 대한 모든 특혜를 사절해라. 그래서 노무현의 죽음과 더불어 윗물이 맑다는 것을 보여라.’

이후 20통을 보내며 촉구했다. 그런데 종편을 만든 거다. 조중동은 안 보면 된다. 근데 종편은 가게 등에서 삼시 세끼, 그리고 잘 때까지 트니까, 들을 수밖에 없는 거다. 쓸 데 없는 논리만 계속 해대는 걸.

 

<제7막> 국민은 자아혁명으로 정치권 진영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세월호 사건을 겪으며 이제는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월호, 윤일병 사건 등 안 변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억울함 없는 신뢰할 만한 공동체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한반도 통일도 이룰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이 지역과 보수 논리를 탈피하는 자아혁명을 해야 한다.

국민이 국가의 주인인데, 현재 국민은 진영에 소속돼서 충성하고 있다. 제도적으로 천대를 받으면서도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국민 개개인이 인격체로서 자기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 진영으로 갈려서 진영 논리에 충성하며 상대를 욕하는 정치권 종속에서 벗어나도록 자아혁명을 해야 한다.

벌써 분단 70년 아니냐. 안보 장사로 유지되는, 작전지휘권도 임대하는 정권의 '통일대박'에 박수치는 국민이어서는 안 된다. 국민들이 주체로서 꼬붕의 사고를 벗어나야 민중을 생각하는 지도자가 나올 수 있다.

 

<제8막> 민중을 생각하는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광화문 광장에서 만난 촛불세대와 젊은 부모들이 말한다. 4·16이전과 이후는 달라져야 한다고. 지금까지의 지도자들은 출세 지향적이었다. 대접을 해줘야 했다. 자수성가형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잘 먹고 잘 살려고 한 사람이다. 제도적으로 국민을 무시하고 그렇게 굳어져 왔다.

이제는 새로운 역사의식을 가진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권력과 돈을 추구하지 않는 인물이어야 민중을 생각하는 지도자가 될 수 있다. 민중을 생각하는 지도자는 특출한 사람이 아니다. 국민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여론으로 주위 사람 중에서 지도자를 만들어야 한다.

자아혁명으로 국민이 주체가 되어야 그런 지도자를 만들 수 있다. 정당이 만들어주는 지도자는 안 된다. 나는 그런 변화가 오리라고 믿는다. 안 변하면 안 되니까. 셀카나 SNS를 하는 본인 위주의 세대들에게서 그러한 의식의 변화를 본다. 요즘 세대는 위만 보지 않는다.

 

<제9막> 진정한 자서전을 써야 역사를 만들 수 있다

8월 15일까지 자서전을 완성하려고 한다. 마지막에 가서 이렇게 살았다 쓰는 것은 옳지 않다. 사는 중에 자서전을 써서 세상에 던지고 동시대를 함께한 사람들이 지적을 하면 다시 쓸 수 있어야 진정한 자서전이다. 그래야 사심 없이, 거짓 없이 쓸 수 있다. 그것이 사회가 달라지는, 역사를 만드는 일이다.

사회 변화를 위해 삭발을 8번 했다. 내 메시지는 "대한민국 역사와 경제에 책임 있는 자, 국민에게 사죄하라"는 것이다. 특권의식과 부정부패를 타도해야 국가와 바다와 국민이 안녕할 수 있다.

 

과거 행적으로 현재 언행을 감싸서는 안 된다. 도중에 180° 다른 길로 들어선 사람들도 소싯적 운운하며 과거를 써먹으니까. 그런 관점에서 애초 정한 길을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는 그의 한결같음은 주목할 만하다.

올해 그는 삭발 농성을 일본에서 해볼까 고려한다. 세월호 문제가 어서 해결되어 더 크고 긴급한 주제를 가지고 국정을 논하기를 그는 간절히 바란다. 긴 안목으로 역사를 보며 변화를 모색하는 그는 젊다. 비록 몸은 지팡이에 의지해 절룩이며 세월호 농성장을 향하지만, 품은 뜻은 처음처럼 건재하다.

김유경 주주통신원  newcritic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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