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와 대화

인간, 너희들이? 김태평 편집위원l승인2019.07.17l수정2019.07.17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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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마른 콘크리트 바닥위에 지렁이가 기어간다. 움직임이 미약하다. 몸엔 수분이 거의 말라 건조함이 선연하다. 저대로 두면 얼마 못가 죽을 것이다. 어찌해야 하나. 땅을 파고 묻어 주어야 하나. 안타까울 뿐 결정하기 어렵다.

지렁이와 가상대화를 해본다.

▲ 지렁이, 아침 산책길에 만난 지렁이, 콘크리트 바닥이 안스럽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

인간자: 야! 네가 사는 곳이 어디냐?

지렁이: 야라니? 싹아지 없이. 내가 사는 곳? 나는 가려 살지 않아. 내가 있는 곳이 사는 곳이다. 그곳이 어딘지 모른다. 다만 너희 말을 빌리자면 땅속.

인간자: 맞아~ 땅속이지. 왜 몰라 아는구먼! 어찌 이곳에 왔느냐?

지렁이: 맞고 안 맞고가 어디 있어? 나는 그런 것 모른다니까. 어찌하다 보니 여기 왔다. 왜? 이 또한 내 삶의 일부다.

인간자: 음~ 암만해도 이곳은 네가 있을 곳이 아닌 듯싶어서...

지렁이: 너희 인간들은 있을 곳과 없을 곳이 정해졌나? 나는 형편에 따라 살아. 그런 것 따지지 않아.

 

인간자: 그렇지만 땅속이 너의 보금자리가 아니냐?

지렁이: 보금자리? 난 그런 것 모른다. 땅 속이 편하니까 그냥 사는 것이다.

인간자: 그렇기는 하겠네. 그런 편한 곳을 두고 왜 이곳으로 나왔어. 이곳이 불편하지 않아?

지렁이: 좀 그렇기는 하네. 피부가 점차 건조해져서 움직임이 어려워.

인간자: 거봐. 땅속이 너의 보금자리 맞지? 답답해도 땅밖으로 나오지 말아야지, 이렇게 건조한 날씨엔 더욱 그래. 어쩌다가~

지렁이: 나는 하지 말아야 될 것이란 없어. 가지 말아야 될 곳도 없고. 누가 그것을 정해? 나는 내 몸이 가는대로 갈 뿐이야. 또 살고 싶은 대로 살고.

 

인간자: 설사 그렇더라도 잘못된 줄 알았으면 바로 돌아가야지.

지렁이: 무슨 소리야? 나에겐 그런 것 없다니까? 자꾸 너의 잣대로 말하지 마. 지금 상황이 좋지 않은데. 더 짜증난단 말이야.

인간자: 인간들은 누구나 갈 곳이 있고 가지 말아야 할 곳이 있어. 이를 지켜야 공동생활이 가능해. 그렇지 않으면 공동체 일원으로 살 수 없어. 그래서 하는 소리야.

지렁이: 자꾸 헛소리를 하는구나. 아니라는데도 말이야. 너희 인간들이야 그렇겠지만 난 지렁이란 말이야!

 

인간자: 우리들 속담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말이 있는데, 혹시 누가 너를 밟았느냐? 건들었어?

지렁이: 무슨 개떡 같은 소리야? 밟혀서 꿈틀하지 않는 것도 있어? 나를 뭐로 보고 하는 개소리야? 참 기가 막히는군.

인간자: 난 네가 걱정이 되어 하는 말인데 너무 심하지 않나? 누가 너를 밟아 상처 나고 싸우지 않았을까 라는 우려에서 그랬는데...

지렁이: 우려? 난 그딴 일로 싸우지 않아. 내 몸 일부가 떨어져 나가도 나는 끄떡하지 않는단 말이야. 이전투구 하는 너희들처럼 미련하고 어리석지 않아!

인간자: 오~ 그래? 우리 인간 수준은 그래. 만약 누가 나를 밟으면 난 참지 못하지. 어떻게 하든 복수를 해야지. 말로라도...

지렁이: 그러니까 인간사회에는 평화가 없지. 너희 인간들은 항상 이익만 보려 하잖아. 물론 희생봉사 한다고들 하지만, 결국은 자기 심신의 이익과 위안을 삼기 위함이지. 안 그래?

인간자: 음~ 할 말이 없네. 땅속에 살아서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았더니, 뛰어난 현자이구만! 배와 등도 없이 몸 전체가 땅에 닿으므로 땅의 모든 지혜를 터득했나?

지렁이: ...

인간자: 그렇게 보면 생명체 중에 가장 어리석은 자는 우리 인간인 것 같아. 쥐뿔도 모르면서 아는 척은 다하고. 못된 짓도 다하고. 세상을 지배한다고 까불기도 하고... 지렁이 네 말을 듣고 보니 참 부끄럽네.

지렁이: 내가 너무 심했나? 근래 너희들이 하는 꼴이 하도 기가 막혀 몇 마디 했을 뿐인데... 너무 자조하지 마. 그래도 너희들이 있어야 세상도 살만해. 너희들을 보고 있으면 얼마나 재미있는지 몰라. 우리 모두 힘내자, 아자~ 힘내!

▲ 출처 : pixabay, 활기찬 지렁이, 지렁이가 번식해야 생태계가 안전하다고 한다. 땅이 건강해야 지렁이가 잘 살텐데 걱정이다.

지렁이와 얘기를 끝내고 먼 산을 쳐다 본 후, 아래를 보니 지렁이는 이미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다. 나는 멍 띤 채 한참을 걷다가 아침 산책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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