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샘의 『미당 신화』를 읽고 다시 미당을 생각하다

미당 신화의 미망에서 벗어나야 하성환 객원편집위원l승인2019.07.26l수정2019.09.02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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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재에서 집필 중인 미당 서정주

(사진 출처 : 한겨레 자료 사진)

"미당 없는 문학사를 상상하기 매우 어렵다"

미당 서정주 전집 20권이 완간된 뒤 나온 어느 시인의 평가다. 과연 그런가? 역사에 남긴 오점과 별개로 그의 문학적 성취를 인정해야 하는가?

미당 서정주(1915-2000)는 2000년 85세로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떴다. 살아생전 미당은 1000편이 넘는 시와 시집 15권을 남겼다.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동천', '푸르른 날'은 서정성이 가슴을 파고들게 만든다.

가수 송창식이 불러 더욱 널리 애송된 곡 '푸르른 날'은 그리움을 이토록 절절하게 노래할 수 있는지 탄복하게 만든다. 그런가 하면 『귀촉도』(1948)에 수록된 대표시'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는 윤동주의 '서시'다음으로 학생들이 한 때 가장 많이 사랑했던 시라고 한다.

그러나 『미당 신화』를 쓴 늘샘은 시 작품과 인격을 분리해서 보는 것을 비판한다. 시작詩作 행위가 시인의 사회적 행위인 만큼 시인의 삶, 즉 인간적 자질(인격)과 분리해서 작품을 논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시를 비롯한 예술 작품의 이데올로기성을 갈파한 비판이다.

시인만큼 철저하게 이데올로기적 유형의 인간은 없다고 늘샘은 일갈한다. 고대 그리스 시인을 대표하는 호메로스나 서양 최초의 문예이론서 『시학』을 쓴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시경』을 찬미한 공자, 나아가 조선의 다산 정약용 역시 시를 통해 당대 지배 권력을 공고히 하는 이데올로그였음을 분석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니체의 유명한 명제! "어느 시대든 예술가들은 도덕이나 철학, 종교의 시종侍從이었다"며 시의 이데올로기성을 명징하게 드러내었다. 권력에 밀착된 시인들이 당대 지배질서와 권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미화했다며 이를 비판한다. 한 마디로 늘샘은 『독일 이데올로기』를 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표현을 빌려 시인을 '인류 최초의 이데올로기 담당자'라고 소개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표현대로 "서사시로서의 비극은 서술형식을 취하지 않고 극적인 드라마 형식을 취하는지"늘샘은 그 정치적 의도를 분석한다.

공자, 아리스토텔레스, 호메로스, 다산 정약용 등 당대 지식인들이 문학의 형식으로 왜 시를 옹호하고 소설을 '사갈시하며 부정했는지' 그 긴밀한 연관성을 분석적으로 논구한다. 늘샘의 이러한 분석적 논구는 미당 서정주의 시 작품들이 당대 세계관 내지 사회적 성격과 관련이 매우 깊다는 점을 밝히기 위함이다.

실제로 미당의 작품들은 토속적이고 서정성을 특징으로 한다. 작품 속에 인간 생명의 고귀함을 노래하는 것이나 동양사상의 정신을 노래하는 게 그렇다. 또한 불교의 인연설을 노래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모두 미당 자신의 젊은 날 방황과 욕망, 그리고 기회주의적인 삶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음을 발견한다.

▲ 연세대 교정에 세워진 윤동주 시비(사진 출처 : 하성환)

뒤에 보이는 건물이 핀슨홀인데 일제강점기 시절 기숙사로 윤동주, 송몽규, 강처중 3총사가

시작 비평을 통해 우정을 나누었던 공간이다

아름다운 미학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미당의 삶은 비판의 여지가 크다는 게 사실이다. 일제 식민지 시절이나 해방 후 수십 년 독재 시절 동안 미당은 항상 불의한 지배 권력과 밀착돼 있었다.

1917년생 윤동주와 2살 차이임에도 미당은 그 20대 젊은 나이에 적극적으로 친일시를 쓰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글쓴이 늘샘은 바로 이 점에 주목한다. 그리하여 그의 시 작품들이 지닌 분열적・기회주의적 성격을 파헤친다.

나아가 미당이 어떻게 수십 년 동안 한국문단의 지배 권력자가 되어 '미당 신화'가 사실로 조작되었는지 밝힌다. 뿐만 아니라 '미당 신화'가 어떻게 확대재생산 되어 유포되었는지 '미당 신화'의 주범 '괴물 엘리트'의 등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미당의 문학적 성취는 정말로 건강한가로부터 시작해서 그의 미학적 성취에 대한 평가가 과연 정당한가에 이르기까지 늘샘은 『미당 신화』를 파헤치는 내내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미당 자신이 지닌 글재주로 시종侍從 즉, 노예가 되어 지배 권력을 미화할 때 그의 시적 기교는 절망을 낳는다. 그리하여 늘샘은 "시대의 절망이 시적 재주를 낳고 결국엔 노예도덕으로 종결되고 마는 전형적인 사례"로 미당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결국 "민족이라는 이름을 팔아 사복을 채운 '야비한 기회주의자'로 미당을 규정한다.

일제강점기는 물론이고 극우반공 파시즘으로 형성된 지배질서 속에서 '시대를 읽는 서사적 비전'을 상실한 채 '서정시라는 기교적 언어'로 자신을 변신한 기회주의자로 평가한 것이다.

그 '야비함'은 분단 질서 속에서 시인부락의 족장으로 문단권력을 행사하면서 수많은 '괴물엘리트'를 양산했다고 지적한다.  그 '괴물엘리트'들과 함께 미당은 한국문학의 지배담론을 주도해 왔다. 등단이라는 "물적 권력을 움켜쥐고 '미당 신화'를 지속적으로 조작, 유포시켜 왔다"고 역설한다.

미당 없는 문학사는 정말 불가능한가? 내가 보기에 그것은 미당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한국문학사에 대한 진실한 표현도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분단문학은 반쪽 문학이 아니라 기형적인 문학이기 때문이다.

미당을 미화할수록 미당과 다른 길을 걸어갔던 시인들은 의도적으로 망각되거나 왜곡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런 모습이 한국문학사의 이면에 깔려 있다. 노산 이은상은 알아도 시인 권환이 망각의 인물이듯이 미당이 미화되고 신화가 화려하게 덧칠될수록 동시대를 살다간 이육사나 윤동주는 퇴색될 것이다.

'미당 신화'의 재생산은 글쓴이 늘샘의 표현대로 미당에 대한 '과잉분식(粉飾)'으로 나타나곤 했다.'과잉분식(粉飾)'의 주범은 미당이 새끼를 친 '괴물엘리트'들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에 의해 '미당 신화'가 확대 재생산되면서 "이 땅의 무수한 풀꽃 대중들의 마음은 흐려졌고" 정신이 혼돈 상태에 놓인 것이다.

사실과 가치가 분리되면서 이를 당연시하게 만들었고 작품과 인격은 별개라는 희한한 논리가 고개를 들었다. 이런 현상을 늘샘은 경계하고 가차없이 비판했다. 프랑스 철학자 부르디외의 표현을 빌려 "비가시적이고 완곡한 상징폭력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고 일갈한 것이다. "너는 왜 미당처럼 살지 않느냐고..."

『미당 신화』를 읽으면서 불현 듯 노산 이은상의 삶과 문학이 떠올랐다. 해방 이후 문단 내 두 거인의 삶은 너무도 닮은꼴이기 때문이다. 수십 년 동안 독재 권력과 밀착돼 지식인으로서 자기역할을 상실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래도 노산은 젊은 날 미당처럼 살진 않았다. 적어도 일제강점기 시절 노산은 해방 직전까지 미당과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갔다. 일제강점기 민족주의자 노산의 삶은 당당했다. 이광수가 일제의 주구가 되어 전국을 돌며 순회강연을 할 때 노산은 일제의 회유와 협박을 거절했다. 그리고 전남 광양에 은거 도중 감옥행을 택했다. 해방을 감옥에서 맞이한 노산은 일제강점기 춘원이나 미당의 삶과 180도 달랐다.

적어도 일제강점기 시절 미당은 노산의 삶에서 부끄러움을 배웠어야 옳았다. 그러나 그러한 자숙의 과정이 없었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다시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친일파)의 세상이 부활한 때문이다. 해방 후 미소 냉전 질서가 형성되고 남쪽에 극우반공 파시즘이 활개 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집단 학살되었다. 친일파들이 반공을 전면에 내세우며 '애국자'로 둔갑하던 시절이 도래한 것이다.

▲ 1948년 10월 여순 사건 때 자식을 잃고 오열하는 주민들. 뒤편에 서 있는 사람은 미국 임시군사고문단원인

랠프 블리스 소령. 미국 군사고문단은 여순사건 진압작전을 지휘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자료 사진)

시대의 광기에 내몰린 시절! 미당과 노산은 시대의 지성이 되기보다 시대의 절망이 되어 언어기교에 몰입한다. 그 길이 반공파시즘의 공포로 숨막히던 시절, 지식인의 흉내를 내면서 생존을 꾀할 수 있는 그들의 출구였다. 시대의 공포에 짓눌린 채 자신이 지닌 글재주를 기교의 언어로 재생하였다. 그리고 출세를 욕망하며 불의한 권력을 찬미하며 현실에 그대로 안주했던 것이다.

태평양 전쟁을 '진리의 전쟁'으로 미화하며 '귀축(鬼畜) 영미(英米)'를 부르짖던 미당은 해방 직후 친미(親美)로 변신한다. 그리하여 다른 친일파들의 처세 방식대로 화려하게 반공투사로 앞장선다. 1946년 좌파의 <조선문학가 동맹>에 맞서 <조선청년문학가협회>(회장 김동리) 결성에 나서 시 분과위원장을 맡는다.

1948년 4월엔 <전국문화단체 총연합회>(약칭 문총) 주최 강연에서 문인대표로 '문화인의 당면 임무'를 연설하며 반공투사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각인시킨다. 그리고 <조선청년문학가협회>가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회장 박종화)로 조직을 개편하자 또다시 시 분과위원장을 맡는다.

그리고 1949년 미군정장관 러취가 사망한 지 1주기 추도식에서 추도시를 낭독한다. 친일파에서 친미파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세운 것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당은 문총 구국대 결성에 앞장서며 후방 선무활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한다. 30대 초반 미당은 시대의 변화에 발빠르게 변신하며 오직 생존과 출세를 향해 내달렸다. 

그러나 불의한 시대! 절망의 시대! 생존의 위협 속에서도 저항의 언어로 시대의 절망을 노래한 작가들이 존재했음은 적어도 미당의 삶이 옳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아무리 '미당 신화'로 새끼를 치고 '괴물엘리트'들이 지배담론을 주도하더라도 저항의 언어로 정직하게 시대를 노래한 작가들을 침묵시킬 순 없기 때문이다.

늘샘이 예로 들었던 기형도 시인의 시처럼 오늘의 시대는 '존경하는 교수가 마냥 침묵하는 시대'는 아니다. 역사의 진실이 무엇인지 알기에 불의한 시대! 수많은 예술 작가들은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다.

아직도 유튜브에 나오는 동영상 '너는 듣고 있는가? 분노한 민중의 노래'를 합창한 시함뮤(시민과 함께하는 뮤지컬 배우들)는 얼마나 감동적인가! 광화문 5차 촛불 시위 당시 광장의 시민은 열광했고 예술가로서 시함뮤는 아름다웠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던 시인 김수영이 '푸른 하늘을'노래한 것처럼 "지식인은 천형(天刑) 같은 가난 속에서도 삶의 방향"을 놓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미당은 젊은 날 전혀 반대의 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평생 자신을 미화하는 수많은 '괴물엘리트'를 양산하며 새끼를 쳤다. 누가 존경 받는 시인인지 보란 듯이...

'미당 신화'는 깨져야 한다. 산산이 부셔져 쓰레기통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게 오늘을 살아가는 문학인들의 시대정신이다. 문학하는 자들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시대인식이다.  기회주의적이고 굴절된 역할 모델인 미당을 자신의 우상처럼 떠받들고 살아갈 순 없잖은가!

후대 문학인들을 위해서도 귀감이 되는 문인을 제대로 소개하고 발굴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도 '미당 신화'는 말끔히 걷혀야 옳다. 그런 점에서 미당에 대한 최초의 문예비평서인 늘샘의 『미당 신화』는 늦어도 너무 늦은 감이 있다. 자, 그렇다면 미당은 어떤 인물이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살펴보자!

미당은 처음부터 민족을 배반한 삶을 살진 않았다. 미당의 젊은 시절 방황과 식민지 청년으로서 그리고 지식인으로서 고뇌는 민족의 고통 받고 있는 현실과 유리되지 않았다. 미당의 학창시절 항일의식과 민족주의 운동에 참여한 전력을 살펴보자! 당대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미당은 자신이 처한 민족 모순과 나약한 삶의 이중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마름이었던 아버지 서광한은 큰아들인 서정주가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하여 관료로서 출세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버지 서광한의 바람과 다르게 미당은 학창 시절 줄곧 부모의 기대와 어긋난 삶을 살았다.

어렸을 적 매우 총명했던 미당은 전북 부안 줄포공립보통학교 6년 과정을 5년 만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아버지의 기대를 한껏 받은 미당은 1929년 상경하여 중앙고보에 입학한다.

경성제대를 졸업하고 고등관 시험에 합격하여 떵떵거리며 사는 지배계층을 욕망하면서 아버지 서광한은 큰아들 서정주를 중앙고보에 뒷문으로 입학시킨다. 입학시험에 떨어졌지만 김성수의 마름으로서 갖는 친분을 이용하여 김성수가 주인인 중앙고보에 보결로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입학한 그 해 11월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하였고 미당은 선배의 권유로 항일시위에 참여한다. '식민지 노예교육 반대'를 외치다 미당은 종로경찰서로 연행돼 심한 매질을 당하고 석방된다.

경찰서에서 나온 직후 미당은 식민지 현실의 참상을 체험하고자 중앙고보 인근 계동 하숙집을 나와 아현동 빈민굴을 자청해서 들어갔다. 그러다가 다시 1년 후 광주학생들의 항일운동 1주년 기념 시위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구속돼 중앙고보에서 전격 퇴학을 당했다.

부득이 아버지의 노력으로 고창군 소재 고창고보에 편입하지만 사회주의 사상 관련 독서회 사건과 시험거부 백지동맹을 주도한 혐의로 일경에 발각돼 권고자퇴를 당한다.

17살 고창고보에서 쫓겨나던 1931년 겨울에 미당은 아버지가 요긴하게 쓰려고 모아둔 거금 300원을 훔쳐 서울로 달아나기도 했다. 톨스토이의 휴머니즘에 심취해 있던 19살 때도 아버지 돈 30원을 몰래 갖고 서울로 줄행랑쳤을 만큼 아버지의 기대와는 다른 삶을 살았다.

아버지 서광한은 아들이 식민지 고등 관료가 되기를 기대했지만 미당은 아버지의 기대와 달리 훔친 돈으로 독립운동을 위해 권총을 사서 만주나 연해주로 떠나려 하였다.

그러나 서울 하숙집 주인 청년 배상기를 만나면서 18살 미당은 항일독립운동 대신 문학청년으로 삶의 방향을 급선회한다. 배상기는 세계문학에 박식한 중앙고보 선배로서 서정주에게 '미당(未堂)'이란 호를 지어준 인물이다. 미당은 하숙집에 머물면서 8개월 동안 경성도서관을 드나들며 독서에 탐닉했다.

배상기는 미당에게 소설가 김동리의 형을 소개해주었고 나아가 당대 중앙불교전문학교(동국대 전신) 교장을 역임한 박한영 대종사를 만나게 해준 인물이다. 미당의 문학과 인생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 바로 배상기였다.

미당은 살아생전 자신의 친일 작품을 시 3편과 산문 1편 등 총 4편으로 기억했다. 그러나 일제 말기 미당의 친일작품은 모두 11편으로 시, 소설, 수필, 르포, 평론 등 문학의 전 장르를 망라한다. 더구나 자신의 생존을 도왔던 일본말로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기에 낯 뜨거울 정도였다.

『조광』(1943. 10월호)에 발표한 수필 「스무 살 된 벗에게」와 『춘추』(1943. 10월호)에 발표한 수필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는 징병적령기 조선의 청년들에게 전선으로 나갈 것을 한껏 부추기며 선동한 글이다.

미당의 나이 28살! 그 젊디젊고 팔팔한 나이에 벌어진 일이다. 태평양 전쟁을 일제의 침략전쟁이 아니라 미국의 침략 마수로부터 10억 아시아인을 구하기 위한 성전(聖戰)이라고 강변했다. 그러면서 학병지원과 징병을 노골적으로 독려, 찬양한 것이다. 28살, 29살 그 젊은 날 미당은 부끄럼도 없이 친일에 앞장섰다.

28살에 친일잡지 「국민문학」에 발표한 '항공일에'(1943)라는 일본어 작품을 살펴보자.

"여린 숨을 푹푹 내쉬며 내 귓가에서 자그마한 서운녀(西雲女)가 일곱 살 서투른 고향말씨로 아이 하늘은 서울이레야, 속삭이던 그 하늘이구나(중략) 아아, 애달파라 아직은 감을 수 없는 눈과 눈이여, 잊을 수 없는 파아란 정, 해 저물어 밤이 되면 별똥은 반짝거려, 아아 애달파 지금 사랑하는 사람들, 스러져 나날이 하늘은 깊어만 가고(중략) 아아, 날고프구나 날고 싶어, 부릉부릉 온몸을 울려 사라진 모든 것, 파랗게 걸린 저 하늘을 힘차게 비상함은 내 진작 품어온 바램!"

▲ 윤동주(사진 뒷줄 오른쪽 인물)와 고종사촌 송몽규(사진 아랫줄 가운데 안경 쓴 인물)

윤동주와 송몽규는 <재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 관련하여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을 당하다

해방 6개월 전 옥사했다(사진 출처 : 한겨레 자료 사진)

1년 뒤 미당은 '「송정 오장 송가 松井 伍長 頌歌」(1944. 12)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발표한다. 가미가제 특공대원으로 미군 군함에 쳐박혀 죽은 한국인 청년을 찬양하는 시로 해방 9개월 전에 쓴 시다. 미당의 나이 29살 때였다.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伍長)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가미카제 특별공격대원...(중략)... 우리의 동포들이 밤낮으로 정성껏 만들어 보낸 비행기 한 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중략)...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 수백 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리쳐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 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한결 더 짙푸르른 우리의 하늘이여, 아아 레이테만은 어데런가, 몇 천 길의 바다런가, 귀 기울이면 여기서도 역력히 들려오는 아득한 파도소리, 레이테만의 파도소리”  

두 살 적은 윤동주는 일제강점기 조선의 청년으로서 그리고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부끄러움을 우리말 시어로 고백하던 때이다. '참회록'과 '쉽게 씌여진 시'가 그러하다. 시인 윤동주는 「재 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1943) 사건으로 생체실험을 당해 피골이 상접한 상태로 죽어가던 시기에 미당은 일본어로 친일시를 쓴 것이다.

그 비슷한 시기, 비슷비슷한 나이의 서정주는 일본말로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는 「항공일에」, 「마쓰이 히데오 오장 송가 松井 伍長 頌歌」라는 친일시를 썼다. 그리고 스스로 종군기자가 되어 김제평야에서 벌어진 일본군 경성 사단 돌격훈련 모습을 생생하게 취재했다.

일본 제국주의를 미화하고 숭배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젊은 나이에 그럴 수가 있는가! 미당의 초기 작품집 『화사집』(1941)에 실린 「자화상」은 젊은 시절 미당의 초상이 상징적으로 잘 압축돼 표현된 시다. 여기에서 23살의 미당은 미래 자신의 삶을 마치 운명적으로 꿰뚫어 본 듯이 노래하고 있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 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중략)...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八割(팔할)이 바람이었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罪人(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天痴(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으련다. 찬란히 티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미당의 아버지 서광한은 호남의 대지주 김성수의 농장관리인(마름)이었다. ’애비는 종이었다‘는 표현은 서정주 스스로 자신의 출생을 굴욕적인 의식으로 드러낸 것이다. 늘샘은 『미당 신화』에서 이 점을 비판하고 있다.

대지주의 마름은 결코 가난하지 않다고 역설한다. 그렇다. 수많은 조선의 소작농들을 고통스럽게 등쳐먹던 자들이 마름이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그런 장면이 소상히 나온다. 마름 오동평과 허출세가 바로 그들이다. 마름이 불러내자 소작인들은 마름을 위해 마음에도 없는 잃는 화투를 춰준다.

그들 마름은 소작결정권을 쥐고 소작인에게 땅을 빼앗을 수 있는 권한을 지녔다. 따라서 지주와 소작인 중간에서 농간을 치고 각종 이권을 취하면서 악행을 일삼는 계급으로 등장한다. 마름은 "지주보다 역정나고 아니꼬운 존재"로 소작인에겐 원망의 대상이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한 마디로 지주보다 더한 놈이 마름이었다는 게 당대의 진실이다. 미당은 결코 가난 속에서 성장한 게 아니다.

그럼에도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고 고백한 것은 자칭 ’떠돌이’ 시인 서정주의 방랑의식이 담긴 표현이다. 일견 낭만적인 묘사인데 미당 자신의 젊은 날 방황을 부끄러움도 없이 드러낸 것이다. 15살에 광주학생운동과 관련하여 종로경찰서로 끌려가 된통 얻어맞은 미당은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세계관이 바뀐다.

반면에 15살에 700리길을 걸어서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간 무명의 조선독립운동가 김산이 있다. 그는 천신만고 끝에 신흥무관학교에 당도했다. 그러나 나이가 어려서 입학할 수 없다는 답변을 듣자 가슴이 찢어질 듯이 너무 아파서 엉엉 울었다고 김산은 고백했다.

▲ 검인정 8종 한국사 교과서조차 한 줄도 기술하고 있지 않지만 조선독립운동가 김산(본명 장지락)은 일제강점기 가장 고결한 영혼을 지닌 걸출한 독립운동가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연안에서 님웨일즈와의 우연한 만남이 없었다면 『아리랑』 (1941)은 출간될 수 없었다. 김산의 존재 자체도 묻혔을지도 모른다(사진출처 : 위키백과)

한 마디로 미당에게 광주학생운동은 항일민족운동 차원이라기보다 당시 학생 지식계층에게 유행했던 겉멋이 들어 참여했던 한철 '바람'이었다. 자신을 키운 것이 팔할이 '바람'인 것처럼 광주학생운동도 시대의 유행처럼 '바람'으로 인식한 것이다. 뚜렷한 민족의식도 없었고 항일 독립을 향한 불타는 의지와 열정도 없었다.

미당이 한 때 아현동 빈민굴에서 지내기도 하지만 계급의식도 지니지 못했던 뜨내기 생활 그 자체였다. 그게 젊은 시절 미당의 본래 모습인 것이다. 그러한 삶의 부박함과 나약한 의지를 보였던 것이 10대 중후반 미당의 자화상으로 미당 스스로 "혓바닥 늘어트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떠돌이처럼 살아왔음을 고백한 것이다.

그러면서 미당은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으련다"고 되뇐다. 치열하게 살아오지 못했던 자신의 젊은 날에 대해 일말의 죄의식을 갖기보다 뻔뻔함을 선택한 것이다.

미당을 통해 문단에 데뷔한 시인 고은은 그런 서정주의 뻔뻔한 언어유희를 삶의 진정성 측면에서 비난한 적이 있다. 자신을 문단에 데뷔시킨 스승이기도 했지만 70년대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고은은 스승 서정주와 다른 문학행로를 걸어갔다.

80년 광주 학살 당시 고은 시인은 미당을 80% 이상 부정했다고 고백했다. 80년 광주를 피로 물들인 전두환을 찬양하는 모습에서 스승 이전에 인간으로서 모멸스럽고 고통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마치 일제 식민지 시기 민족이 수난에 처해 영혼마저 고통스러운 시절! 20대 젊디젊은 그 나이에 친일작품으로 뒤덮은 미당의 철면피한 모습을 연상시킨다. 민족이 억압 받고 민중이 땅을 빼앗겨 쫓겨난 그 자리에 서서 미당은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며 한껏 언어유희에 골몰했기 때문이다.

민족과 민중을 배반한 삶이 시적 언어유희로 가려질 수 있을까? 절망의 시대! 불의로 가득한 시대! 미당은 언어유희를 마음껏 구사하며 갖은 글재주로 제국주의 전쟁을 '진리의 전쟁'으로 미화하고 식민지 권력에 줄을 대기에 분주했다.

실제로 미당은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던 날 오전 10시에 김동인과 함께 조선총독부 정보과장을 찾아갔다. 대일본제국에 더욱더 충성할 작가단체를 만들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했지만 거절당한다. 그리고 허탈한 마음으로 귀가하던 도중 일왕 히로히토의 무조건 항복 방송을 접하고 집으로 줄행랑을 쳤다.

'깃대에 일장기를 꽂아 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던' 미당 서정주! '일장기 히노마루를 방 아랫목에 세워두고 한참동안 합장을 하며' 경건한 마음을 다했던 미당 서정주! 일본 제국주의가 일으킨 침략전쟁인 태평양전쟁을 '국가사회 발전을 약속하는 진리의 전쟁'이자 '역사적 사명'으로 치켜세웠던 미당 서정주!

일제 말기 미당의 친일 행적은 단순한 감정이나 생존이 아니다. 이성과 논리로 확신에 찬 신념이었다. 그런 점에서 미당은 명백한 친일문인이자 역사적으로 청산되었어야 할 제1의 문학인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 제국주의는 전쟁 수행을 위한 총후(銃後) 문학체제를 구축하기에 분주했다. 이를 위해 1939년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지시로 '조선문인협회'를 만든다. '조선문인협회'는 1943년에 '조선문인보국회'로 변신하면서 일본정신을 퍼뜨리는 황도(皇道)문학에 광분했다. 세칭 '국민문학'이 등장한 것이다.

민족적 양심을 지닌 작가들이 하나둘 붓을 꺾거나 작품을 쓰더라도 발표를 하지 않던 시절이다. 그러나 미당을 비롯하여 이광수, 유진오, 김동인, 최남선, 최재서 등은 제국주의 침략을 선동하는 내용을 일본어로 쓰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미당의 과거 친일 행적은 여느 친일 인사들의 변명과 궤를 같이 한다. '일제 말기를 살아보지 않았으면 말을 말아야 해', '그 때는 다들 그랬어', '부득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잖아'라며 상황론을 들먹인다.

미당 역시 그러했다. 고보 중퇴의 학력으로 일본어에 능숙했던 미당은 일본어가 밥벌이의 중요 수단이었다. 고창군청과 만주 양곡주식회사 경리직 생활에서도 그리고 국내로 돌아와 최재서를 통해 일본어 번역일로 생계를 유지할 때에도 일본어는 명실공히 미당 자신에겐 '국어'로서 생존 기반이자 문명세계, 즉 일본 정신세계에 정서적으로 반응하는 언어였다.

해방 후 미당은 한결같이 '해방이 그렇게 빨리 올 줄 몰랐다'고 변명했다. 20대 젊은 날 친일행위에 대해서도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했다. 미당 역시 일본 제국주의가 몇 백 년은 지속될 거라 믿었다.

반민족행위자(친일파)들을 처벌하기 위한 「반민특위」가 이승만 정권의 노골적인 탄압과 방해공작으로 흐지부지 되면서 미당을 비롯한 친일문학인들은 한국문단의 주류로 다시 등장했다. 그런 점에서 한국전쟁은 한국문단을 반공 일색으로 색칠하면서 친일문인들을 화려하게 부활시켜준 일대 사건이었다.

'정치적 무뇌아'라는 세간의 혹평이 쏟아져 나왔음에도 미당의 독재자 예찬은 마를 줄 몰랐다. 일찍이 권력욕의 화신! 독재자 이승만을 찬양하는 이승만 전기를 자발적으로 써서 바쳤다. 그 대가가 33세 그 젊은 나이에 이승만 정권 초대 문교부 예술과장의 자리를 꿰찬다.

박정희 정권 시절 박정희 전기 작가인 박목월에게 밀리지만 미당은 60년대 박정희 정권의 베트남 파병을 찬양하는 시 '다시 비정의 산하에'(1966)를 발표하며 독재 권력에 꼬리를 쳤다. 한국의 청년들로 하여금 '새로 나갈 길은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베트남뿐'이라며 베트남 파병을 고무하고 독려한 시다.

그런가하면 80년 광주민중항쟁을 북한 공산당의 행위로 규탄한 적도 있다.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정권을 찬탈한 정치군인 전두환을 찬양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라디오를 통해 그리고 텔레비전에도 출연해 부끄러움도 없이 떠벌린 적도 있다. 그 대가로 미당은 5공 국보위 위원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 자기분열적이고 퇴행적인 행보를 미당 자신은 '하늘이 우리 겨레에게 준 팔자'라고 합리화하며'종천순일(從天順日)'로 설명 아닌 해명을 한 적이 있다.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됐으니 굳이 붙이자면 종천순일파'라는 것이다. '정치적 무뇌아'다운 구차하기 이를 데 없는 자기변명이자 합리화이고 지식인의 교활함이요 역겨움 그 자체이다.

친일행적에 대한 미당의 기회주의적인 태도 변화는 한국 문단에서 차지하는 미당 자신의 걸출한 위상과 관련이 깊다. 미당은 1955년 『서정주 시선』 발간 이후 소위 '국민시인'으로 확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한국문단사에서 미당을 통하지 않고 시인으로 등단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은 문단권력의 문제이다. 역사 청산도, 친일문인들을 청산하는 것도 결국 권력의 문제와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친일 행적에 대해 시기마다 미당의 태도가 말을 바꾸며 표변적인 것은 바로 그런 연유에서 비롯되었다.

무릇 시는 당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의 삶이 담겨 있어야 한다. 삶이 들어 있지 않은 시를 문학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다. 순수문학, 참여문학 논쟁은 그 다음에 할 일이다.

왜냐하면 순수문학, 참여문학 논쟁은 작품의 지향성에 관한 논쟁으로 문학작품으로서 성립조건을 갖추었는가에 대한 논쟁은 아니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으로서 성립조건! 그것은 작품 속에 삶이 담겨 있는가에 있다.

그런 점에서 미당의 작품은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아름다운 시적 언어로 녹여내었더라도 당대의 삶과 유리된 채 권력과 시류를 좇아 언어유희에 머문 작품도 있는 게 사실이다. 시적 기교로 자신의 배반된 삶을 감추고 현란한 언어유희로 자신의 혼탁한 삶을 탈색한 작품들을 우리가 주목하는 이유이다.

기교와 언어유희에 능한 마술사를 우리가 훌륭한 시인이라고 부를 수 없듯이 미당 역시 시인으로서 그리고 당대를 살아간 문학인으로서 평가는 엄격하고 냉정할 수밖에 없다.

시적 언어의 기교면에서 미당의 시는 아름답기는 하지만 감동은 순간적일 뿐 금세 사라져 언어의 유희로 남고 만다. 일찍이 '미당을 체질적으로 싫어한 김수영'은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 "하나는 그 토속성이 견딜 수 없고 둘은 그 늘어지는 서정성이 그렇고 마지막은 미당의 반동성이 역겹다"고 혹평하였다.

1980년 광주학살의 원흉! 전두환을 '구국의 위인'으로 찬양했던 미당은 81년 12대 대통령 선거에서 전두환을 '훌륭한 지도력을 지닌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방송 연설을 한다. 전두환 56회 생일에 축시 '처음으로'(1987) 를 낭독하면서 전두환을 '단군 이래 최고의 미소'를 가진 인물로 극찬했다.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 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 /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새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잘사는 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물가부터 바로 잡으시어/ 1986년을 흑자원년으로 만드셨나니

안으로는 한결 더 국방을 튼튼히 하시고/ 밖으로는 외교와 교역의 순치를 온 세계에 넓히어/ 이 나라의 국위를 모든 나라에 드날리셨나니/이 나라 젊은이들의 체력을 길러서는

86아세안 게임을 열어 일본도 이기게 하고/ 또 88서울올림픽을 향해 늘 꾸준히 달리게 하시고/우리 좋은 문화능력은 옛것이건 새것이건/ 이 나라와 세계에 떨치게 하시어

이 겨레와 인류의 박수를 받고 있나니/ 이렇게 두루두루 나타나는 힘이여/ 이 힘으로 남북대결에서 우리는 주도권을 가지고/ 자유 민주 통일의 앞날을 믿게 되었고

1986년 가을 남북을 두루 살리기 위한/ 평화의 댐 건설을 발의하시어서는/ 통일을 염원하는 남북 육천만 동포의 지지를 얻으셨나니/이 나라가 통일하여 흥기할 발판을 이루시고

쉬임없이 진취하여 세계에 웅비하는/이 민족기상의 모범이 되신 분이여!/ 이 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 - 「처음으로」(1987) 전문

게다가 1987년 미당은 자신이 한국문인협회 회장 시절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에 대해 '구국의 결단'이라는 지지성명서를 냈다. 전두환 5공 정권을 찬양한 대가로 돈을 받아 집에 에어컨을 장만하고 남은 돈으로 월간 문학잡지 『문학정신』을 발간했다. 『문학정신』은 80년대 참여문학인 민중문학 진영과 사상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후 재정난으로 다른 문인에게 넘어갔다가 사라졌다.

미당은 86년 원로문인의 자격으로 5공 정권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과 학생들을 신문 칼럼을 통해 맹비난했다. 게다가 88년 2월 광주 학살 발포 명령자에 대해서도 '대대장이든 중대장이든 책임질 만한 사람이 없다'며 황당한 수준의 궤변을 늘어놓았다.

어떤 이는 미당의 삶이 잘못된 부분도 있지만 미당의 시가 아름다운 만큼 미당의 시 세계를 삶과 분리해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변한다. 물론 미당 서정주는 친일 범죄를 솔직히 인정한 시인이라는 점에서 그간 친일문인들과는 달랐다.

그러나 그것도 거기까지이다. 미당은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의 친일을 번복했다.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거나 당시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친일행위를 희석시키려 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 그에게 '아름다운 우리말을 구사한 천재시인' 이니 '우리말 시인 가운데 가장 큰 시인'이란 평가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더구나 '민족어 완성에 전 생애를 바쳤던 시인', '한국 문학의 광맥', '시 앞에서는 신인', '종교와 같은 시의 영산','민족시인','국민시인'이라는 저간의 문단 평가가 과연 올바른 자리매김인지 회의가 들지 않을 수 없다.

2000년 미당이 죽고 1년도 되지 않아 김대중 국민의 정부는 국민의 이름으로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1년 미당의 후학과 후배 문인들에 의해 미당문학상이 제정되었다.

자신의 삶 전체를 일관하여 권력을 찬미하고 양지를 좇아간 반민족적이고 반민중적인 삶을 살았던 시인을 후대는 아름답게 포장하고 기리는 데 여념이 없다. 한 마디로 한국문단의 자정 능력이 실종된 탓이다.

▲ 2017년 20권으로 완간된 미당 전집(사진 출처 : 한겨레 자료 사진)

실제로 미당 탄생 100주년 되던 2015년 미당기념사업회는 죽은 지 15년이 지난 미당을 성대하게 기념하는 행사를 동국대에서 거행하였다.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인협회, 한국작가회의와 함께 서정주 100세 생일 시 잔치 겸 시 전집 출판기념회가 그것이다.

이 자리에서 문학평론가이자 고려대 교수는 미당을 '겨레의 말을 가장 잘 구사한 시인'이자 '겨레의 고운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시인'이라고 극찬하였다. 2017년 미당 전집 20권이 완간되었다. 그러나 미당의 친일 작품이나 독재자를 찬양한 시 작품들은 모두 빠진 채 간행되었다. 아직도 '미당 신화'가 재생산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우리말로 시를 썼던 민족시인 윤동주는 생체실험을 당하다 피골이 상접한 상태로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순국했다. 후쿠오카 감옥에서 순국 당시 윤동주는 28살 젊은 나이였다.

매화 향기 가득한 항일혁명시인 이육사 또한 일본영사관 경찰서 감옥에서 잔혹한 고문 끝에 핏물이 낭자한 채 옥사했다. 이육사의 삶을 형상화한 대표작'노정기'를 보면 시란 무엇이고 어떻게 삶과 연관돼 있는가를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 경북 안동에 있는 이육사 문학관(사진 출처 : 한겨레 자료 사진)

항일혁명시인 이육사는 의열단 군관학교인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 제1기 졸업생으로 국내에 침투해 의열단 군관학교 입교생 발굴 및 국내 항일조직 연계활동의 임무를 맡았다.

"목숨이란 마-치 깨어진 뱃조각/여기저기 흩어져 마을이 한구 죽죽한 어촌보다 어설프고/삶의 티끌만 오래 묵은 포범(布帆)처럼 달아매였다/남들은 기뻤다는 젊은 날이었건만/밤마다 내 꿈은 서해를 밀항하는 정크와 같아/소금에 쩔고 조수(潮水)에 부풀어 올랐다/(중략)쫓기는 마음! 지친 몸이길래/그리운 지평선을 한숨에 기어오르면/시궁치는 열대식물처럼 발목을 오여쌌다/새벽 밀물에 밀려온 거미인 양/다 삭아빠진 소라 깍질에 나는 붙어 왔다/머-ㄴ 항구의 노정(路程)에 흘러간 생활을 들여다보며" - 「노정기 路程記」(1937)

의열단이자 항일혁명가로서 육사의 신산한 삶이 '노정기' 작품 속에 그대로 재연돼 있음을 알 수 있다.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한 젊은 날 자신의 삶을 '깨어진 뱃조각'과 '밀항하는 정크'선에 비유한 모습은 육사의 삶이 얼마나 신산한 삶의 연속이었는지를 충분히 가늠하게 해준다.

일제 식민지 치하 3대 시인이었던 이용악, 오장환은 해방 공간 북을 선택하였고 정감어린 우리말로 향토색 짙은 시를 썼던 정지용은 한국전쟁 기간 납북되었다. 그 끊어진 시의 산맥을 미당 서정주가 이어갔다고 흔히들 이야기한다.

그러나 아름다운 언어로 우리말의 맥을 잇고 형상화한 시인은 미당이 아니다. 시는 단순히 언어의 기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마술사라면 모를까 적어도 미당을 우리말을 아름답게 시어로 형상화한 '민족시인'이니 '국민시인'이니 찬미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도 않고 정당한 평가도 아니다.

▲ 항일혁명시인 이육사(사진 출처 : 위키백과)

이육사는 의열단원이자 사회주의자로서 권총의 명사수였다.

그것은 치열한 작가정신을 담아 우리말을 아름답게 시적 언어로 형상화한 김소월, 한용운, 이육사, 윤동주, 정지용을 모독하는 배반된 행위이다. 절망의 시대! 시대의 불의를 고발하며 민족시 내지 저항시로서 이육사와 윤동주의 시정신을 이어간 김수영, 신동엽을 외면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나아가 신경림, 이성부, 조태일, 정호승, 황지우, 정희성, 하정오, 권정생, 이오덕, 김남주, 박노해, 백무산, 김용택, 안도현, 도종환으로 이어지는 민족문학의 맥을 부정하는 행위이다.

'미당 신화'를 맹신하는 것은 한국문단에 분란과 분열을 자초하는 자기분열적 태도이자 위험한 모습이다. 미당 없이도 문학사를 이야기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미당의 친일행위, 독재 찬양과 별개로 미학적 성취를 인정해야 한다는 양시론적 비평이나 양비론적 태도는 오늘날 마땅히 배제돼야 한다. 그런 점에서 순수문학의 허구를 들춰낸 늘샘의 분석은 탁월하고 또한 명쾌하다.

생각하건대 미당은 권력을 좇아 양지만 바라보며 살다간 언어마술사이지 '국민시인'이 아니다. 늘샘의 표현대로 미당은 시류에 편승한'야비한 기회주의자'이자 언어유희를 구사하며 시대의 불의(不義)와 밀착한 글 재주꾼일 뿐이다. 나는 그렇게 본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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