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문학과 매국문학에서 민족문학과 통일문학으로 2. 친일문학은 언제 어떻게 탄생했는가
1. 글을 시작하며 2. 친일문학의 정의와 범위에 관해 3.친일문학은 언제 어떻게 탄생했는가 4. 친일문학은 왜 청산되지 못했는가 5. 친일문학은 왜 미화되고 확산되었는가 6. 친일문학을 어떻게 대체해야 할까
[편집자 주] 이재봉 주주통신원은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평화학 명예교수이며, 『문학과 예술 속의 반미』를 저술하였다.
3. 친일문학은 언제 어떻게 탄생했는가
임종국은 조선 문인 120여명의 친일작품을 찾아냈다. 해방 전후 조선 문인이 100여명이었다니 일제 강점기 거의 모든 조선 문인들이 친일문학 작품을 썼다는 말 아니겠는가. 출세와 명예를 위해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글을 쓴 사람들도 있고, 시대의 대세에 휩쓸려 줏대 없이 쓴 사람들도 있으며, 강권과 탄압에 어쩔 수 없이 쓴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단 한 편의 친일문장도 남기지 않은 영광된 작가들도 적지 않았다.” 물론 이들이 “단 한 편의 친일문장도 남기지 않은” 것보다 임종국이 이들의 친일문장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참고로, 임종국의 ‘영광된 작가들’ 가운데 내 귀에 익은 문인들만 꼽는다면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던 윤동주, ‘독립운동에 매진한 항일투사’요 ‘펜으로 일제와 싸웠던 저항시인’으로 <광야>와 <청포도> 등의 시를 남긴 이육사, 내가 살고있는 익산 출신의 시조시인 가람 이병기, 해방 후 최초의 창작시집이라는 『청록집』을 펴내 ‘청록파’로 불린 세 시인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우리말을 가장 아름답게 구사하는 시인”으로 평가받는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김영랑,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술에 몹시 취해’ 살아온 40년을 풍자와 해학으로 묘사한 <명정 (酩酊) 40년>의 변영로, 문인으로보다는 국어학자로 널리 알려진 이희승 등이다. 한편, 이러한 ‘영광된 작가들’ 가운데 김영랑에 대해서는 부정적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그는 강진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순수시를 발표하던 1920-40년대 집에 정구장을 마련하고 뜰에 300여 그루 모란을 가꾸며 순수시를 발표했는데, “고향 강진 땅에 깊숙이 묻혀 지내서” 소극적 친일조차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1905년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이인직이 1906년 ‘일청전쟁’을 배경으로 한 새로운 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1894-95년의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을 미화하는 <혈의 누 (血의 淚)>다. 학창시절 교과서를 통해 ‘조선 최초의 신소설’이라 공부했지만 조선 최초의 친일소설이라는 사실은 몰랐다. 이인직이 이완용의 비서로 1913년부터 일제 식민통치를 홍보.지지하는 『경학원잡지』 창간부터 편찬과 발행 맡아온 친일파라는 사실 역시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1937년 일본이 중국과 전쟁을 벌인 데 이어 1941년 미국과 전쟁을 벌이면서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라는 ‘내선일체 (内鮮一体)’를 내세우고 조선 문인들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이러이러한 글을 쓰라고 강요하며 응하지 않으면 ‘제멋대로 행동하는 불량한 조선사람 (불령선인, 不逞鮮人)’이라며 체포하거나 탄압했다. 당시 조선 문인들이 망명하거나 시골에 묻혀 절필하지 않는 한 친일작품을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못해 소극적으로 응하기보다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앞장선 문인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조선인들에 대한 징병제도가 선포되자 조선인들이 일본인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며 오히려 반기고 감격했다. 조선인 징병을 예찬하며 특권이라 강변하기도 했다.
‘조선 3대천재’의 하나로 꼽히며 ‘근대문학 최초의 장편소설’ <무정>으로 널리 알려진 소설가 이광수는 1943년 시 <조선의 학도여>에서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공부는 다음에 해도 되니 당장 전쟁에 나가라고. 부모나 처자식들 신경쓰지 말고 즉시 전쟁터로 나가라고. “그대는 벌써 지원하였는가 / 특별지원병을 / ..... / 공부야 언제나 못하리 / 다른 일이야 이따가도 하지마는 / 전쟁은 당장이로세 / ..... / 이 성전의 용사로 / 부름받은 그대 – 조선의 학도여 / 지원하였는가, 하였는가 / 특별지원병을 / 그래 무엇으로 주저하는가 / 부모 때문인가 / ..... / 그래 처자를 돌아보는가 / 이 싸움 안 이기고 어디 있으랴 / 부모길래, 처자길래, 가라, 그대여.....”
1945년엔 시 <모든 것을 바치리>를 통해, “아아, 조선의 동포들아 / 우리 모든 물건을 바치자 / 우리 모든 땀을 바치자 / 우리 모든 피를 바치자 / 우리 충성에 불타는 머릿속을, 심장을 바치자 / ..... / 내 생명 그것조차 바쳐올리자 / 우리 임금님께, 우리 임금님께.” 일본 천황에게 목숨까지 바치자고 선동한 게 나중에 그가 변명하듯 탄압을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그랬겠는가.
소설가 김동인은 1944년 다음과 같이 문학의 역할을 강조했다. “몇 대의 항공기, 몇 척의 함정을 전선으로 내보내는 데에 못지않게 큰 역할을 할 자는 문학이다. 지원병에서 징병으로 또는 특별지원병으로 우리 반도인도 황민화의 보조가 더욱 힘차고 더욱 열있게 행진할 때에 이 모든 행사가 일시 뇌동적 흥분이 아니고 진정한 황민화의 산물인 점을 천하에 알리는 동시에 후계자의 육속을 효과있게 부르기에는 문학의 선동력과 흥분력의 힘을 빌 필요가 많다고 본다. 이러한 의미로 우리 반도의 문학인의 책무는 크고 또 중하다..... 우리에게 대항하려는 저 미(국).영(국)을 상대로 하여 그를 거꾸러뜨리고 재기불능케 하기 위해서는 1억 국민의 4반분을 차지하고 있는 우리 반도인의 지위는 가볍게 볼 수 없는 바이다..... 국가성쇠의 열쇠가 우리 반도 문학인의 손에 달렸다 해도 과한 망언은 아닐 것이다.....” 1925년 경성 (서울)에 조선공산당이 들어서 일제에 맞서 싸우고 그 산하 문인들이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 (카프, KAPF)>을 만들어 계급문학 운동을 전개하자, 이에 반대해 순수문학 운동을 벌였던 사람이 전쟁참여 문학을 주창한 것이다.
일제의 강요에 마지못해 응하기보다 적극적으로 앞장선 문인들은 작품의 내용뿐만 아니라 분량에서도 드러난다. 한국 현대시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로 손꼽히는 시인 서정주, 조선 희곡의 기틀을 잡았다는 극작가 유치진 등은 적어도 10편 이상의 친일작품을 쏟아냈다.
이러한 친일문학에 대해 문학평론가 임헌영은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사실 친일문학은 전쟁 찬양시, 곧 침략 미화와 약탈의 합리화에 다름 아니다..... 인도주의에 역행한 범죄로 가장 끔찍한 반문학적인 행위에 다름 아니다. 살육과 약탈과 인권 침해를 정당화한 작품이 친일문학”이다.
* 이 글은 <2020 창작21 세계작가 초청 문화예술 일제잔재 청산 국제문학 심포지엄> (2020년 11월 21일, 파주시 통일문학관 강당)에서 발표한 것이다. 이 글 마지막 장 “친일문학을 어떻게 대체해야 할까”는 ≪아시아문화≫ 2015년 10월호에 실은 글쓴이의 “통일문학의 흐름과 역할: 시대를 선도하는 문학을 기대하며”를 요약.수정한 것임을 밝힌다.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