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모르는 베트남전을 돌아보다

2015-11-29     오성근 편집위원
▲ 한겨레 고경태 기자와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박태균 교수

'베트남전쟁' 하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팔다리가 잘린 파병 군인들이 술에 취해서 욕을 하고, 싸움을 벌이다가 급기야 목발을 내던지고 나동그라져서 통곡하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개중에는 마을 청년이 꼬맹이들에게 초콜릿이나 과자, 통조림 등을 나눠주며 환하게 웃는 얼굴도 있습니다. 그리고 국민학교 때 만화책을 통해서 본 베트남전쟁에서의 맹호와 청룡부대의 영웅담 등도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베트남전쟁의 전부입니다.

지난 27일 오후 7시, 서울시민청 바스락홀에서 베트남전에 관한 대담이 있었습니다. 한홍구 교수의 사회로 최근 베트남전쟁에 관한 책을 펴낸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인 박태균,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윤충로, 그리고 한겨레의 고경태 기자 세 분이 참여했습니다.

아래 내용은 베트남전 관련 대담과 책을 인용하여 정리하였습니다.

한홍구 : 베트남에 30만 명을 파병했는데 정작 그 나라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었습니다. 어디에 있는지? 그 나라의 기후와 풍토는 어떤지? 어떻게 생겼는지? 그리고 40년이 지나서 이라크에 파병할 때도 역시 별다른 정보가 없었습니다.

사실 내가 쓰고 싶은 얘기지만-여러 가지 이유로- 집필하기가 너무 힘들었는데 세 분이 큰일을 해줘서 감사를 드립니다. 먼저 세 분이 베트남전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 그리고 책을 출간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고경태 : 99년에 구수정(평화활동가)씨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베트남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았으니까 함께 정리해 보자는 것이었지요. 그때 자료를 찾아서 한겨레지면에 기사화했습니다.

그리고 난리가 났지요. 파병 군인 4,000명이 수십 대의 버스에 나눠 타고 쳐들어와서 한겨레를 뒤집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많은 전문 학자가 찾아가서 연구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안 가길래 ‘나라도’ 하는 마음으로 다시 10년 만에 베트남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윤충로 : 베트남하고 수교가 이루어진 92년부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한국과 베트남의 역사가 너무나 닮은꼴이라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분단국가로 남았고, 베트남은 통일이 됐지요. 그 차이가 무엇인지,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궁금했습니다.

또한 실제로 베트남전에 참여했던 동시대인들의 경험과 이야기를 알고 싶었습니다.

고경태 : 퐁니·퐁넛에 대한 세세한 기록을 글로벌한 시각에서 세밀하게 다뤄보고 싶었습니다.

 윤충로 : 베트남전쟁 참전자의 삶의 맥락과 생애사적 시간을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박태균 : 세계사적인 입장에서, 대중적인 입장에서 베트남전쟁에 관한 다양한 시각으로 기술하고 싶었습니다.

한미관계를 정리하다 보니까 1960년대 이후의 자료들이 공개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들을 통해서 1968년에 굵직한 사건과 행사가 집중됐지만 실제적인 안보 위기는 1967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스스로 우리의 안보도 지킬 수 없는 상황에서 베트남 파병은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한국군이 가지 않으면 주한미군을 베트남으로 이동시킬 테니까 한국군을 보내야 한다는 논리가 나온 겁니다.

하지만 파월 이후에 안보 위기가 더 심해졌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베트남에서 돈 벌어온 기억밖에 남지 않았지요. 그래서 종합적으로 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엔 고경태기자의 요청으로 시작했다가 일이 커졌지요. 윤충로 박사의 자료가 큰 힘이 됐습니다.

고경태 : 처음엔 내가 쓸까 했지만 전문가가 쓰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 뒤에 난 민간인학살에 집중했습니다.

윤충로 교수님은 참전 군인들의 상황과 심정, 박태균 교수님은 미국이 왜 뻔히 질 줄 아는 전쟁에 참여했고, 한국군을 동원했을까? 에 대해서 집중했습니다. 내 책은 1968년, 퐁니·퐁넛에서 하루 새 벌어진 민간인학살과 연관된 다양한 시각을 다뤘습니다.

남한은 베트남전을 한국의 제2전선으로 규정하고 파병했으며 북한은 이에 맞서서 북베트남을 돕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자 남한의 교란을 꾀해 잦은 마찰을 일으켰고, 이것이 안보위기의 원인이 됐습니다. 1.21사건(김신조) 등이 그 예입니다.

윤충로 : 이 엄청난 전쟁이 왜, 어떻게 잊혀졌을까? 그것에 대한 사람들의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애국 전쟁, 반공 전쟁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간 사람은 없었습니다.

가야 하니까, 보내니까, 혹은 돈을 벌고자 간 것이지요. 1944~1945년생이 주축이었는데, 그들에게 월남전의 의미는 무얼까? 군인 이외에 월남에 간 사람들에게는? 왜, 누가 얼마나 갔을까?

고엽제, 외상후스트레스 장애 등에 대해서 베트남은 전쟁 종료 초기부터 조사하고 치료했지만 한국정부는 아무런 조처가 없었습니다.

박태균 : 사람들의 기억은 어떻게 지워지고 있을까? 처음에 이라크전쟁의 참여 여부를 묻는 여론조사 때는 반대여론이 57.5(한겨레)%였습니다. 그런데 한 달 뒤에는 찬성이 56.3%(KBS)로 나왔습니다.

이것은 한국인들이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유엔에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함이다, 일본도 참전한다는데 우리만 베트남전과 같은 특수를 놓칠 것인가? 분열하면 남베트남처럼 망한다고 홍보전을 펼쳤기 때문입니다.

그전에 베트남 참전 군인들에게 미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파견했으니 미안하다고 사과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남베트남은 국민들이 지키고 싶지 않은 정부였고, 우리정부가 국민을 위해서 열심히 하겠다고 얘기했어야 합니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윤충로 교수, 한겨레 고경태 기자, 서울대 국제대학원 박태균 교수,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

한홍구 : 그런 성찰의 기회를 갖지 못한 게 안타깝습니다. 이제부터는 참가한 분들의 질문지 받고, 토론회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고경태 : 참전 군인들과 만나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중의 한 분과 통화할 때 “선생님 베트남전에 다녀오셨죠?” “예”해서 만났는데 그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전화를 받는 순간에 머리가 띵하면서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베트남에서 돌아와 장교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중정(중앙정보부)에서 올라오라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남산에서 대통령이 알고 싶어 한다. 겪은 것을 솔직하게 얘기하라고 해서 그대로 말했습니다. 그리고 '어디 가서 이 일을 얘기하면 안 된다'고 해서 각서를 쓰고 나왔습니다. 30여 년 동안 아내는 물론 술자리에서도 입 밖에 낸 적이 없습니다."

이런 게 베트남전을 잊힌 전쟁으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박태균 : 자신이 다녀온 전쟁에 대해서 누가 나쁘게 말하겠는가? 이해는 한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를 직시하지 않으면서 남에게만 바라서는 안 된다. 국가가 이 문제를 해결해 줘야 한다. 고기자가 “베트남에 갈까요?” 했을 때 “아니다 국립묘지부터 가자고 했습니다.” 그것이 순서입니다. 우리 군인부터 살펴보는 게 중요합니다.

한홍구 : 강정구 교수나 난 파월 군인들한테 찍혀서 인터뷰를 할 수가 없다. 윤충로 교수가 물밑에서 소중한 작업을 했다. 45년생 군인들은 이미 70세다. 앞으로 연구할 시간이 10여년 밖에 남지 않았다. 이미 많은 기억이 왜곡됐다는 걸 인정하고, 연구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윤충로 : 베트남전의 역사는 1999년의 한겨레 기사 <베트남에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보도 전후로 나뉜다.

이명박 정권 때 베트남전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했다가 베트남정부의 공식항의를 받았다. 이명박 대통령의 베트남방문을 앞두고, 외교 비화의 가능성까지 관측됐다. 그래서 예정에도 없이 외교부장관이 부랴부랴 베트남으로 날아갔었다. 이미 정부가 주장해온 정당성이 사라진 것이다.

참전 군인들이 이제라도 진실을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털어놓고 공유하며 치료하는, 조금 더 유연하고, 민주적으로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박태균 : 파병군인이 용병이냐? 동맹군이냐? 그건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미국에서 전투수당을 받았지만 한국이 파견하고, 또 독자적인 작전권을 행사했으니까 용병이라고 보기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참전 군인들로부터 전투수당을 다 받지 못했다는 분들의 전화를 많이 받는데 더 중요한 건 보상의 문제입니다.

고경태 : 라이따이한-한국군이나 기술자, 그리고 베트남 여인 사이에서 태어나 버려진 아이들- 중에 제일 어린 친구들이 1972년생입니다. 1993년부터 우리정부가 베트남을 지원했는데 1999년에 갔을 때는 이미 모든 게 사라져서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때(1992-3년) 한국인 남자와 베트남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저는 ‘신(新)라이따이한’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그 아이의 엄마 중에서 전화번호를 알려주면서 대신 연락해 달라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연락을 취해 보지만 끝까지 통화한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윤충로 :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학살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았는데 과연 베트남전에서의 사건들이 해결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박태균 : 한국정부가 사과를 하는 순간 참전 군인들은 피해자가 됩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해야 할 일입니다. 세계적으로 ‘한국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사과할 수 있는 용기와 양심을 가진 나라구나!’하는 소리 들었으면 합니다.

서울시민청의 문을 닫는 시간이 돼서 아쉬움을 안은 채 자리를 마무리해야 했습니다.

베트남전쟁이란 말은 알지만 실제로는 아는 게 거의 없는 나나 동시대인들의 시야를 넓혀 주고,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갖게 하는 소중한 자리였습니다. 어렵게 책을 펴낸 세 분의 노고에 감사드리면서 책을 구입했습니다.

11월 30일(월) 경향신문 15층 민주노총교육원에서 베트남전쟁에 관한 강연이 있습니다. 서울시민청의 기회를 놓친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편집: 김유경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