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보투어 2. 화교교회와 서양문화 정착지 정동
정동에 가장 오래된 화교교회가 들어선 까닭이 이런 거래요
브라보투어 2. 화교교회와 서양문화 정착지 정동
강의가 끝나고 잠시 휴식 시간을 갖고서는 바로 투어에 들어가게 되었다. 신문사를 나와서 잠기 프란체스코회관 앞에서 잠시 이곧 정동을 바라보면서 이 정동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바로 건너편에는 화교 교회가 있었다. 이곳에 화교교회가 생기게 된 까닭을 이야기 하였다.
“이 정동은 우리나라가 개국을 하면서 외국공관들이 차례로 들어선 공관동네가 되었습니다. 그 때 외국인들이 들어와서 살려고 보니 여러가지 필요한 시설들이 있었지요. 이발관도 있어야 하고, 양복점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시설이 없으니까 자신들이 먼저 살던 곳인 중국에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 왔어요. 그렇게 들어온 사람들이 역시 이 정동 부근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되었겠지요. 그러니 이 동네에 화교들도 많이 들어와 살게 되었고, 또한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었으므로 교회가 필요하였던 거지요. 그러니까 여기 화교교회는 바로 이런 인연으로 이곳에 자리 잡게 되었지요.”
바로 서양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살게되면서 생겨난 곳이라는 것이다.

정동의 역사를 살펴보면 정말 이곳이 우리나라 외교의 중심지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구한말에 외국과 외교를 트기 시작하면서 이곳에 외국 공관들이 차례로 들어서게 되었는데. 미국영국,러시아, 프랑스를 비롯한 외국 공관들이 들어서서 외국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동네가 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1985년 단발령이 내려 졌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발소를 운영하는 곳이 거의 없었기에 이곳 정동에 우리나라 최초의 이발소,양복점, 양식집 들이 들어서고, 서양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중국 사람들을 집사로 데려와서 살게 되었으므로 중국인촌이 자연스럽게 형성이 되게 된 곳입니다."
1883년 미국공사관이 처음 들어선 이후 영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벨기에 등 각국의 공관이 차례로 들어서면서 정동은 서양의 외교가로 변모했다. 정동길 깊숙이 자리잡은 정동근린공원 뒤에는 옛 러시아공사관의 마지막 흔적인 하얀 건물이 우뚝 서있다. 르네상스식 3층 벽돌구조로 1890년 완공된 구 러시아공사관은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고종이 세자와 1년간 피신해 머물렀던 아관파천 현장으로 역사의 아픔이 묻어 있는 곳이다. 서울시의회 골목으로 들어서면 마치 외국에 온 듯 착각마저 일으킨다. 국내 유일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인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은 1996년 축성식 이후 지금 모습으로 완공된 건물로 영국 렉싱턴 박물관에서 설계도 원본이 발견됐다. 서양식 교육기관과 종료, 의료시설 등도 잇달아 들어서자 정동은 자연스럽게 근대 서양 문물이 유입되고 수용되는 공간으로 자리잡았다(참고자료 : http://view.asiae.co.kr/news/view.htm?idxno=2015052706480552208).
그러나 악독한 일본은 그런 고종을 가만두지 않고 옥죄었고, 마침내는 중명전에서 치욕적인 조약의 체결을 강요 받게 되었다.
고종은 끝내 자신의 손으로 서명 날인하지 않았고, 국제법상으로 분명 한일병탄조약은 법적 효력이 없는 강제조약이고, 조약 체결에 주체가 없는 조약이었던 것이다.

이런 슬픈 역사의 현장이 정동이고, 이곳이 한국에 기독교 세력이 터를 잡고 가장 오랜 교회<정동제일교회>와 성공회 성당 등이 서게 된 까닭이었다.
이렇게 우리나라에 서양사람들이 맨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이 정동이었고, 그리하여 역사적인 외국공관과 그에 따른 역사적인 장소들이 많은 곳으로 진정 역사기행을 하려면 이 정동부터 시작을 하면 우리나라 근대사의 현장들을 수없이 살펴보게 될 것이다.
"길건너 경교장으로 가기 위해 신호대기 중에 전교수는 저기 구세군회관이 있는데, 구세군이라는 이름 때문에그리고 구세군에서 쓰는 용어 때문에 1909년 포교 한 달만에 600명<세간에서는 일만명이라는 말도 있음>이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성금은 탄약금, 포교는 작전 등의 용어를 쓰고 있어서 구식군대가 해산되고 의병활동이 거의 끝나가던 상태에서 이런 말을 듣고 구세군을 믿으면 영국의 지원을 받아서 일본을 무찌르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라고 설명을 해주셨다.
다음번에는 집중역사기행으로 정동의 역사를 한 시간 내지 두 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살펴보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편집 : 김미경 부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