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늙은이의 귀먹은 푸념 Ⅷ
북악산에서 만난 사람들(Ⅱ)
석아!
너라도 그랬을 거야. 이승만 대통령은 물론 고종까지 즐겨 마셨다는 약수잖아. 게다가 54년 만에 선뵈는 건데, ‘손 세척•세면 등의 용도’로만 사용해 달라는 경구나 금줄 나부랭이가 눈에 들어오겠니? 흘러내린 물이 빙판을 이뤄, 암반은 빙벽 폭포로 둔갑했어. 50도쯤 됐을까? 경사를 이룬 바위 빙벽 3~4미터를 숫제 기어서 올라갔어. 말 그대로 옹달샘에서는 끊임없이 정화수가 솟구치는데, 어쩌면 그리도 맑은지 닁큼 엎드린 채 코를 박았지 뭐.
아무튼 동방삭의 기운을 받은 덕일까? 약수터부터는 그런대로 평탄했어. 길만 그런 게 아니야. 금단의 숲길이었다니 그런 줄 알지, 기이하게 생긴 돌덩이는커녕, 무슨 보호수나 희귀목이 있는 것도 아냐. 하기사, 별천지라도 기대한 내가 속물인 게지. 이렇다 할 아름드리나무조차 찾아보기 힘들어. 그저 오종종한 소나무와 참나무류가 주종을 이룰 뿐, 그 흔한 박새랑 직박구리 몇 마리 본 게 전부였다니까.
꽃사슴도 염증을 낸 지록위마
참, 맞다! 촛대바위 쉼터에서 “꽃사슴이 살고 있어요. 먹이를 주거나 다가가지 말아 주세요.”라는 안내문을 보고 갸웃거렸는데, 아닌 게 아니라 골짝 아래에서 말끄러미 우릴 쳐다보는 사슴 두 마리를 본 거야. 으레 한 쌍이려니 했는데 자세히 보니 수컷들이었어. 1970년대부터 청와대 경내에서 사육했다고 하더니 쟤들도 쫓겨난 걸까? 아니면, 거짓과 위선이 난무하는 ‘청와대’와 ‘대통령실’의 ‘지록위마(指鹿爲馬)’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경내에서 뛰쳐나온 걸까? 아무려면 대명천지에 사슴이 말(馬)이 될 순 없는 법! 그렇지 않은가?
거듭 말하지만, 심어 가꾼 풀 한 포기 없는, 그렇고 그런 우리 동네 고봉산과 다름없는 산이었어. 다만, 산마루로 유배당한 숙정문 하며 비탈에 선 나무들과 구부정한 소나무가, 왠지 핍진한 민초들의 잔상처럼 다가오는 거야.
광자한 오리떼와 모대기던 민초들
그 옛날, 백악산(白岳山)의 모래와 돌이 홍수 때마다 떠내려오기 때문에 하천을 쳐내는 폐단이 심하다고 했으니(일성록, 1777년 3월 15일), 이를 구제한답시고 얼마나 많은 민초들을 닦달했을까? 그냥 상상해서 하는 말이 아니야. 우리 역사 곳곳에 광자(狂恣)하기 이를 데 없는 오리떼(汚吏)와, 그 발밑에서 모대기던 사람들이 넘치고말고.
이를테면, 승정원일기(1726년 8월 5일)에
“어제 목멱산(木覓山)과 북악산(北岳山)의 소나무를 베어 간 곳을 내적간(內摘奸 : 궐내의 적간으로, ‘적간’은 난잡한 죄상이 있나 없나를 살피어 조사함을 이름)한 데 대한 단자에, 탈이 있는 곳은 찰추(察推 : 죄상을 미리 조사하여 두고 그 내용을 본인에게 확인함)하도록 명을 내리셨습니다. 숭례문 호군(崇禮門護軍) 장문벽(張文璧) 등이 이유 없이 점고(點考 : 명부에 일일이 점을 찍어 가며 사람의 수를 조사함)에 빠졌으니, 병조로 하여금 참작하여 과죄(科罪 : 죄를 처단함)하게 하고, 훈련원 고지기(訓鍊院庫直) 최태산(崔泰山) 등이 이유 없이 점고에 빠졌으니 모두 담당 관사로 하여금 추문(推問 : 죄상을 추궁하여 심문함)하여 죄를 다스리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영조가 윤허한다고 전교하고 있거든.
민초들의 고혈을 머금은 송림
그러니까 석아!
조선에서는 마을마다 금송계(禁松契)를 조직했대. 함부로 나무를 베어가는 도적들과 약탈을 일삼는 권세가로부터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하여 마을 사람들이 스스로 만든 자치적인 송림 보호 조직이지. 계의 창설 분담금은 물론, 금송패(禁松牌)를 지니고 순찰하는 법까지 만들고, 소나무를 벤 자를 처벌하는 권한까지 위임받거든. 하다못해 사유림의 임자도 봉산(封山 : 나라에서 나무 베는 것을 금지하던 산)과 마찬가지로 나무 베는 것을 금지했으니, 봉산의 솔은 차라리 썩혀 버리더라도 누구든지 사용하기를 청할 수조차 없었대. 그야말로 소나무가 좀 괜찮다 싶으면 신줏단지처럼 모셔진 거지.
한편, 경국대전의 봉산금송(封山禁松) 조에는, 대송(大松) 10주 이상을 벤 자는 사형(死刑), 1주의 재목을 훔친 자는 장 60(杖六十), 도벌을 발각하지 못한 감관(監官)과 산직(山直) 또한 장 80, 도 2년(杖八十徒二年)에 처한다고 나와 있어. 이렇듯이 민관이 합동으로 소나무를 모신 셈인데, 백성의 고혈(膏血)을 짜내 사복을 채우려는 무리가 날뛰는 건 지금이나 예나 다름없어.
소나무를 뽑아젖히는 스님
언젠가 무슨 말끝에 니가 말한 승발송행(僧拔松行)이란 시가 있어. 왜, ‘소나무 뽑는 중 노래’ 말이야. 이 노래는 소나무를 뽑아젖히는 스님의 한을 노래한 글이잖아. 근데, 다산 선생은 목민심서 공전(工典) 6조에서 “덕산초부(德山樵夫)가 다음과 같은 승발송행(僧拔松行)이라는 노래를 지었다.”는 말로 이 시를 인용하고 있어. 덕산에 사는 나무꾼이 지은 노래라는 말인데, 이로써 “다산(茶山)의 저작인 듯하나 상고할 수 없다.”(한국고전번역원, 장순범 (역), 1986)는 표현이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라고 봐.
어쨌든, “백련사(白蓮寺) 서쪽 석름봉(石廩峰)에 절름거리면서 솔을 뽑는 중이 있네.”로 시작하는 이 시는, “이 솔이 비록 어리지만 두어 두면 자랄 것이라, 그 화근(禍根)을 뽑아 버리는 일을 어찌 게을리하리까. 지금부터는 뽑는 일을 심는 일처럼 하고, 잡목이나 남겨두어 겨우살이에 쓸까 하오. 만일 관의 공문(公文)이 또 와서 비자나무까지 찾는다면, 이 나무조차 뽑아 버리고 절 문을 닫으리다.”고 맺고 있어. 어린 소나무를 아예 뽑아내며 하늘 향해 삿대질하는 백련사 승려를 보고, 뇌물이나 챙기면서 갖은 폭력과 수탈을 일삼는 수령과 아전의 만행이 도처에 뒤널려 있음을, 그리고 이는 곧 금송책(禁松策)에서 비롯됐음을 까발린 게지.
근데, 석아!
북악산은 바로 한양의 주산(主山)이요 조선의 주산이 아니니? 조선 초기부터 서운관 관원들이 천문을 관측하던 곳이요,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었어. 그리고 나라에 변괴가 있을 때 기도하고 제문(祭文)을 올리던 단(壇)이 있던 곳이야. 일례로 태조실록(1396년 9월 1일)에는 “천변지괴(天變地怪)가 여러 번 나타났으므로,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안익(安翊)과 정당문학(政堂文學) 한상질(韓尙質)에게 명하여 백악산(白岳山)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또 사람을 여러 절에 보내서 소재 법석(消災法席)을 베풀게 하였다.”고 했어.
왕사는 곧 국사의 근본
보충하면, 예로부터 천재지변 가운데 천변(天變), 성변(星變), 지괴(地怪)는 곧 왕(국가)의 안위와 직결되는 것으로 인식했으니, 그런 ‘변괴’를 없애는 일이야말로 ‘국가’의 급선무라고 판단했겠지. 결국 왕은 물론 그의 피붙이와 방계혈족의 안위를 위하여 불교 경전과 다라니의 위력을 빌려 혼신을 다해 재난을 없애려고 했을 거야.
석아, 불국(佛國)의 편린에 지나지 않은 소재 법석 얘기는 이쯤에서 끝내고 한 마디 덧붙일게. 여승은 궁중의 노비(奴婢)로 끌려가고, 천민으로 굴러떨어진 승려들은 한양 도성 밖으로 내쫓겼잖아. 사찰 재산을 몰수하고 범종과 금동불상까지 녹여서 화기(火器)를 만들다 보니, 승려들은 동냥아치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겠지.
불상 모가지를 쳐낸 손으로 원찰은 왜?
풀 한 포기에 이르도록 철저히 부처를 능멸하던 자들이다 보니, 불가에서 최고의 위계에 오른 아라한(阿羅漢)마저 ‘개꼬리’로 깔아뭉개 버릴 수가 있었을 거구.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찰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기관(妓館)까지 지어 놓고 고짓을 즐기고 싶었을까? 천년 불상들의 모가지를 뎅강뎅강 쳐버린 자들이 궁중에까지 원찰(願刹 :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던 법당)을 지어놓고, 나라의 운명과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던 이율배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 꼴에 수캐라고 다리 들고 오줌 누려나? 그토록 깔보고 짓바수던 부처 앞에 엎드려, 지네 피붙이들의 극락왕생을 비손하던 작태를 말이야.
석아!
하늘을 쓰고 도리질을 해도 유분수지, 그런 자들이 되뇌던 윤리•도덕을 어떻게 새겨야 할지 모르겠어. 고백하지만, 거침없는 니 통찰력이 부러워. 막걸리는 내가 살게. 하다못해 저들이 말한 사단(四端)과 동물적 본능인 '식색(食色)의 성(性)'이 뭔지도 낱낱이 밝혀 주게.
편집 박춘근 객원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