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습지 순천만 갈대숲에서 시인이 되다
폭염이 지나고 날씨가 선선할 즈음 9월 하순경 순천만 갈대숲에 갔다. 순천만에 가보려고 마음 먹은 지 무려 10여 년이 지나 육십 대 후반에야 실행에 옮겼으니 그 게으름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 순천만 갈대숲에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처음 들었을 때는 아마 사십 대 중년의 나이였을 것이다. 직장생활로 마음의 여유가 없을 시기라 가보지는 못했지만 티브이나 사진으로 본 순천만 갈대숲의 경치는 항상 뇌리의 한편에 남아 있었다. 언젠가 삶에 여유가 있을 때 순천만의 정서에 깊이 빠져보리라 작정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퇴직 이후에 한 번 갈 기회가 있었다. 교직에서 정년퇴직한 한겨레온 필진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당시에 한겨레에서 <축하합니다>라는 코너가 있었는데 그 필진의 퇴직을 축하하며 퇴직 이후의 비전과 계획이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염원하는 글을 한겨레에 올린 적이 있다. 순천에 거주하고 있던 그 필진과 대화를 하던 중에 순천만 갈대숲을 가보고 싶었다고 말하자 언제든 환영한다며 오라고 하였지만 막상 갈 만한 계기가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어느 지인과 함께 순천만에 가기로 날짜를 잡은 것이다.
갈대숲에서 무한한 평안을 얻으려고 했던 걸까. 갈대숲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오랜 친구를 만나기라도 한듯 마음이 푸근해졌다. 한없이 펼쳐진 노랗게 익은 갈대숲 사이를 걸으며 형언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빠져드는 듯 했다. 갈대숲은 생태계의 물질순환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갈대숲은 갈대 자신과 주변의 생물을 통해 영양염류를 흡수하고, 퇴적물 속 미생물의 탈질 작용 (질산염을 대기 중의 질소로 바꾸는 작용)을 돕는 등 다양한 생물적 여과 기능을 수행한다. 갈대의 뿌리는 구리나 카드뮴, 납 등의 중금속을 축적하고 밖으로 거의 내보내지 않아, 주변 토양을 중금속 오염으로부터 지키는 역할까지 해낸다. 이처럼 갈대는 서식지의 영양염류와 중금속 등의 물질 순환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일까. 갈대숲에서 모성의 포근함과 생명의 오묘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갈대숲은 과연 기대 이상이었다. 바람에 갈대가 흔들리며 내는 사각사각 하는 소리가 일품이었다.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아이들끼리 재잘거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저 멀리 피안의 세계에서 나를 은근히 초대하는 초자연적 존재의 속삭임 같기도 하였다.
시인은 아니지만 문득 시 한 수를 읊고 싶었다. 하지만 시어는 머릿속에서 맴돌기만 할 뿐 좀처럼 단어와 개념으로 표현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느 시인의 시가 갈대숲 가운데 푯말로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았다. 순천 출신인 배영숙 여류시인의 '순천만'이라는 시였다.
순천만
비 내린 순천만은
여린 농부의 애간장으로 수런하다
바다로 가지 못한 빗줄기는
갈꽃을 울리고 나서야
주름살처럼 깊게 패인
골을 따라 바다로 가고
철새들의 페로몬 냄새에
화냥년이 미친다는 갈대숲은
칼날로 제 몸 찍어내어
마알간 눈물 비 만들어 내도
깡소주로 시름 달랜 발길 끊이질 않아
순천만은 혼자서 혼자서 운다
멋진 장면이나 감동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시인은 시를 읊을 것이고, 여행객은 멋진 장면을 사진으로 남길 것이다. 나는 배영숙 시인의 시를 음미하며 갈대숲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시를 읊는다든가 사진을 찍는다든가 하는 것은 비슷한 동기에서 나온 행위가 아닐까 싶다. 둘 다 감동의 순간과 장면을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고 다른 이들과 그 감동을 나누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갈대숲을 걸으며 시인의 감성에 사로잡혀본다.
김훈 작가가 어느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설명이 필요없이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들이 있고, 인간의 마음 속에는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힘이 있다, 우리 안에 이미 자연이 있기 때문에 외부의 자연을 보면 공감하고 감흥할 수 있는게 아닌가." 어쩌면 내 안에 이미 순천만 갈대숲의 아름다운 정경과 평화을 담을 그릇이 들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순천만 습지는 지구 5대 연안습지 중의 하나이다. 순천만은 여수반도와 고흥반도가 에워싼 항아리 모양을 하고 있다. 순천시내를 관통하는 동천과 상사면에서 부터 흘러온 이사천이 만나는 지점에서부터 하구까지 약 3㎞ 길이의 강을 따라 5.4㎢(170만 평)의 갈대와 22.6㎢(690만 평)의 갯벌이 형성되어 있다. 순천만은 한국에서 갯벌이 만들어지는 전 과정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연안습지이자 세계5대 연안습지로서 340여 종의 다양한 식물과 239종의 조류가 공존하고 있다. 겨울철에 순천만에 오면 철새들이 이동하는 장관을 볼 수 있으려나.
순천만의 갈대는 뿌리에서 산소를 방출하여 주위의 환원 상태에 있는 토양을 산화시키고, 근처에 있는 미생물의 유기물 분해 활성을 촉진시킨다. 또 지하줄기에 전분을 저장했다가 내보내 주변 토양의 영양염류를 조절하는 것은 물론, 잎과 줄기에 질소와 인 등 오염물질을 저장하여 주변의 오염물질 농도를 감소시키는 역할도 한다. 순천만 갈대숲에서 생명의 순환을 느끼고 돌아간다면 그것만으로도 크나큰 수확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순천에 간다고 말하자 정경호 필진이 바쁜 가운데에도 역으로 마중을 나왔다. 순천역에서 반가운 인사를 나눈 후 가까운 골목길에 자리 잡은 흥덕식당이라는 곳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거기서 백반을 시켜 먹었는데 1식 12찬으로 어느 반찬 하나 버릴게 없었다. 맛깔난 식사를 하며 순천에 대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순천 인구가 얼마냐고 묻자 29만명이라고 한다. 도시의 기능을 다 갖추고 있으면서 지나치게 복잡하지 않은 적정 인구의 기준이 30만명이라고 했다. 그래서 순천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라고 자랑을 한다. 순천을 들러보니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인구 기준이기도 하지만 순천만 갈대숲과 순천 국가 정원이 있기 때문이다.
가을의 감성에 젖어 어딘가로 떠나고 싶었는데 그 여행지를 순천만으로 정한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사 잡다한 생각의 블랙홀에서 벗어나 신선한 감동과 에너지를 얻기에 충분한 여행이었다.
편집 : 심창식 편집장, 양성숙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