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5. 침묵의 암살자 혈전(血栓)과 혈전(血戰)을 벌이다

2025-04-10     심창식 편집장

병실에서 환자로 지낸다는 것은 전쟁터에서 치열한 전투를 하는 병사의 삶과도 같다. 전투 시에 모든 국민은 군사들이 먹을 식량과 물자를 아낌없이 지원해야 하듯이 환자를 둔 가족과 친지들은 환자의 병이 낫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환자 본인은 자신의 모든 의지와 힘을 끌어모아 병마와 싸워야 한다. 그 외에 다른 일들은 모두 뒷전으로 밀려난다.

그렇게 정맥 혈관에 철거머리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는 혈전(血栓)이라 불리는 피딱지와 피 튀기는 혈전(血戰)을 벌이며 지낸 지 일주일이  지났다. 하루하루의 상태는 별 차이를 못 느끼지만 일주일 전과 비교하면 많은 차도가 있다. 일단 종아리는 단단한 붓기가 그대로지만, 허벅지 위로 차오르던 딱딱한 근육의 강도가 조금 부드러워지고 전체적인 붓기도 약간 빠진 듯하다. 

유튜브에는 혈전과 관련한 각종 원인과 치유에 대한 영상이 올라와 있었다.  혈관 속에서 피가 굳어서 된 조그마한 핏덩이를  혈전(血栓)이라고 한다. 간호사들은 혈전을 '피떡'이라고 불렀다. 혈전은 한 마디로 말해 침묵의 암살자와도 같다. 체내에 혈전이 형성되면 소리 없이 동맥을 타고 다니다가 뇌로 가면 뇌졸증이 되고, 심장으로 가면 심근경색이 된다.  혈전이 정맥 안에 자리 잡으면 고요히 정맥을 타고 다니다가 폐로 가서 폐색전증을 유발하고, 정맥을 틀어막으면 심부 정맥 혈전증을 일으켜 한쪽 다리를 단단하게 붓게 만들고 마비시킨다. 그러니 혈전을 침묵의 암살자라고 부를 만하지 않은가. 

필자 사진

일주일 정도 지나자 나는 혈전에 관한 전문가 수준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나의 병세를 알게 된 지인들의 공통된 질문 때문이다. 내가 입원한 사실을 알게 된 친지는 맨 먼저 무슨 병으로 입원했는지 묻는다. 그다음은 거의 질문 순서가 정해져 있다. 심부 정맥 혈전증이라고? 그게 무슨 병이야?  증세는 어떠한데? 그다음에 질문이 이어진다. 그런데 네가  왜 그 병에 걸렸는데?  어떻게 치료받으면 낫는데? 나는 그 질문 하나하나에 나름 정리된 답변을 해야 한다.  그 몫은 의사나 간호사가 아니라 환자 본인의 몫이다. 검사의 취조에 피의자가 반강제적으로 응해야 하듯이 나는 친지들에게 열심히 그들이 납득할 수 있을 만큼의 전문성(?) 있는 답변을 해야 했다.

혈전증을 일으키는 다양한 원인이 있지만 나는 그에 해당하는 어떠한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으며 혈전증을 유발하는 어떠한 짓도 하지 않았다. 의학적으로 볼 때 나에게는 혈전증의 귀책사유가 없는 것이다.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혈전증이 훨씬 많다고 한다.  이런 현상을 소위 특발성 혈소판 증가증이라고 한다. 여기서 특발성이란 어떤 질병이 다른 근원이나 원인 없이 스스로 발생하거나 병의 원인을 알수 가 없는 것을 말한다.   현상적으로는 체내에서 혈액응고를 막는 인자가 그 역할을 이행하지 못해 발생하는 증세이다. 나중에 추가 조사로 밝혀진 바로는 그와는 전혀 다른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지만 일주일이 지난 당시로서는 그랬다. 

정조대왕이 직접 편찬한 <수민묘전 서문[壽民妙詮序]>에는 병자와 병든 나라에 대한 글이 있다. 《수민묘전》은 정조대왕께서 직접 편찬하신 의서(醫書)이다. 

'병든 사람 고치는 것이나 병든 나라 고치는 것이나 그 원리는 진실로 똑같을 것이다. [予故不解醫, 然醫人醫國, 其理固一也.]' (*한겨레온, 조경구 필진의 글 '동문선  읽기'참조)

정조대왕의 통찰력은 남다른 데가 있다. 나는 급성 혈전증을 이겨내야 하고, 한국 사회는 비상계엄으로 인한 혼란과 국가적 환란을 극복해야 한다. 그리고 그 원리는 똑같다.

혈전증이 사람을 일시에 중태에 빠트리듯이 윤석열은 비상계엄으로 일거에 국민과 국가를 혼돈과 어둠으로 몰아 넣었다. 혈전증 환자가 치료를 위해 현대적인 처방약과 주사를 맞으며 혈전(血戰)을 벌이듯이, 한국 사회는 정치 경제적 흐름이 얼어붙어 있는 국가적인 혈전증을 치유하기 위해 온 국민이 몸살을 앓고 있다.  (2025.2.19일 병상일지)

편집 : 심창식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