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목수가 거북선을 썼다 3

- 이충무공전서

2025-06-23     마광남 주주

이충무공전서

거북선을 말하면서 이충무공전서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전서 상의 내용들을 자세히 살펴본 후에 거북선에 관해서 하나하나 풀어가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이순신에 관한 선양사업은 정조 때에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정조는 경전에서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살펴보면서 임진왜란 때의 사적과 이순신의 활약에 관심을 가졌다.

정조는 임자년(4125, 1792, 정조 16)에 대보단(大報壇)을 참배하면서 충무공과 같이 공과 명성이 있는데도 이를 기록한 글들을 모은 책들이 없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중국 조정으로부터 도독(都督) 인정을 받은 충무공의 후손에게 벼슬을 내리도록 명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정조는 삼학사의 봉사손을 중용하고 유성룡, 이순신의 직계후손 중에서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정조 17(4126, 1793) 이순신이 전사한 지 195년이 지난해에 이순신을 의정부 영의정에 증직하고 이순신의 신도비를 세울 것을 명하고 자신이 직접 신도비의 비명을 지었다.

신도비는 남송의 명신 부필의 묘비 제목을 전자로 쓴 예에 따라 상충정무지비(尙忠旍武之碑)라 하고 안진경(顔眞卿)의 가묘에서 글자를 모아 새기고 명()과 서문(序文) 1189자를 친히 크고 깊게 새겨 왕후(王侯)의 명()에 대신하였다.

그리고 내각에 명하여 충민은 이미 실기(實記)를 인쇄하여 반포하였거니와 충무만은 아직 없다고 하면서 각신(閣臣, 규장각 문신) 윤행임(尹行恁,4095~4134, 1762~1801)에게 명하여 공사 간의 기록을 널리 모아 충무전서(忠武全書)로 꾸미고 첫머리에 전교(傳敎), 하유(下諭), 사제문(賜祭文), 도설(圖說), 세보(世譜), 연표(年表)를 싣고 그다음에 시문(詩文), 장계(狀啓), 그 다음에는 난중일기(亂中日記)를 싣고 다시 비장(碑狀), 사기(祠記) 및 후인들의 기술(紀述) 등을 부록으로 6권을 만들어 뒤에 붙여서 을묘년(4128(1795), 정조19)에 비로소 완성하였다.

소요 경비는 내탕전(內帑錢)을 비용으로 대어 정유자(丁酉字)로 인쇄하여 혼령을 모신 여러 곳에 소장하게 하고, 친히 제문을 지어 통제영(統制營)의 충렬사(忠烈祠)에 치제(致祭)하고 통수(統帥)에게 명하여 명나라 조정에서 내린 전서로 새긴 도독(都督), 구첩(九疊), 동인(銅印)과 관방령패(關防令牌). 귀도(鬼刀), 참도(斬刀), 독전기(督戰旗), 홍령기(紅令旗), 남령기(藍令旗). 곡나팔(曲喇叭) 등을 진열하고 큰 술잔에 술을 올리고 일을 마치도록 하유하였다.

이렇게 하여 태어난 것이 이충무공전서이다.

필자는 이 글을 쓰면서 임진왜란으로부터 20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수많은 임금이 바뀌었는데 왜 다른 임금들은 이러한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에 앞서 이충무공전서에 손을 댄 사람들을 보면 1918년에 최남선이, 1925년에 일본인이, 1931년에 서장석이, 1955년에 북한에서, 1960년 이은상이 번역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누구라도 생각할 수 있는 일인데, 현대를 사는 우리들 또한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럼 이충무공전서의 기록 중 구선(龜船)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자. 전서의 권수도설에 기록부터 살펴보면, 전라좌수영의 거북선과 통제영의 거북선 두 종류의 그림과 694자의 한자 설명문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4128(1795)년 이충무공전서를 집필할 당시의 것이다.

통제영 구선

 

                                                      그림2 통제영구선 그림3 좌수영선

 

좌수영구선

                                                      출처: 이충무공전서 출처: 이충무공전서

편집 : 하성환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