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화순군 도암면지 서문]_번역

2025-11-05     형광석 편집위원

全羅南道和順郡道巖面誌(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지)

序(서)

서문

 

嗚呼此日即世界更張之日也自府郡以下至(오호차일즉세계경장지일야자부군이하지)

於坊里或合倂焉分屬焉其間道路坪林之政(어방리혹합병언분속언기간도로평림지정)

置田土結數之變置人情風俗之變移凡多少(치전토결수지변치인정풍속지변이범다소)

曲折細瑣原委不可以言說盡而必有登籍可(곡절세쇄원위불가이언설진이필유등적가)

考者此今日面誌之所以作也(고자차금일면지지소이작야)

아아, 오늘날은 바야흐로 세상이 새롭게 확 바뀌는 날이로다. 부(府)와 군(郡)에서부터 아래로는 방리(坊里·주로 시골에서, 여러 집이 모여 사는 곳.)에 이르기까지, 혹은 합병되기도 하고 혹은 분리되기도 하였다. 그 사이에 도로, 평야, 산림에 관한 정책은 논밭 결복(結卜)의 수효(數爻) 변동에 대해, 세월(歲月)의 흐름과 함께하는 사람들의 인심과 풍속의 변화에 대해 각각 중점을 뒀다. 무릇 얼마나 많은지 모를 곡절과 소소한 사정·경위를 언설로써 다 드러내지 못하겠다. 그렇더라도 반드시 문서로써 기록하여야 깊은 고찰이 이뤄지는지라, 이게 바로 오늘날 면지를 편찬하는 까닭이다.

*1910년 10월 1일 도(道)·부(府)·군(郡)·면(面)[면(面)·사(社)·방(坊) 통합]을 정비하면서 면사무소를 두기 시작했는데, 도장면사무소는 벽동리(현 벽지리)에 두고, 호암면사무소는 덕산리에 각각 설치하였다. 디지털화순문화대전.

*조선토지조사사업(朝鮮土地調査事業):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일제가 조선에서 시행한 대규모 토지 조사 사업

*결복(結卜): 조선(朝鮮) 시대(時代)에, 토지세(土地稅) 징수(徵收)의 기준(基準)이 되는 논밭의 면적(面積)에 매기던 단위(單位)인 결(結), 짐, 뭇 등을 통틀어 이르는 말.

嗚乎該面自天(오호해면자천)

台安義以後變易不一而道莊虎巖今變為道(태안의이후변역불일이도장호암금변위도)

嚴則道巖終不為道巖誰其知耶(암즉도암종불위도암수기지야)

슬프도다. 이 면은 천태(天台) 안의(安義) 때 이후로 변동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도장(道莊)과 호암(虎巖)이 오늘에 이르러 도암(道嚴)으로 변하였으니, 그렇다면 도암(道巖)이 끝내 도암으로 남지 못할지를 누가 알겠는가.

*디지털화순문화대전

1696년 (조선 숙종 22년) : 능주목 안의면(安義面)으로 있었다.

1765년 (조선 영조 41년) : 능주목 천태면(天台面)으로 있었다.

以古想今以(이고상금이)

今想後滄桑浩劫如瞥眼間事而人於其間無(금상후창상호겁여별안간사이인어기간무)

營無為只作草露客而已耶(영무위지작초로객이이야)

옛일로 지금을 생각하고, 지금으로 미래를 헤아려 보면, 세상사의 큰 변동이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다. 그래선지 그런 상황 속에 사는 사람은 어떠한 일이든지 도모하지도, 행하지도 못한 채 한갓 풀잎 위의 이슬 같은 나그네로 살아갈 뿐이로다.

余則本不更事底(여즉본불경사저)

人也昧於時宜暗於土俗民間疾皆誰得而知(인야매어시의암어토속민간질개수득이지)

之俗情淺深誰得而斟之(지속정천심수득이짐지)

나는 본래 세상일에 능통하지 못한 사람인지라, 마땅한 시대상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도암의) 특유한 풍속에도 어둡다. 어느 누가 민간의 고통을 다 체득하며, 그러한 것을 알아서 누가 풍속과 인정의 얕음과 깊음을 체득하고 잘 헤아리겠는가.

以此沒知覺漢忽然(이차몰지각한홀연)

當此任莫適所之莫肯所為而自貽民寃與俗(당차임막적소지막긍소위이자이민원여속)

偸者多耳(투자다이)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인데도 갑자기 이 직임을 맡았다. 마땅히 나아갈 바를 알지 못하고 또한 행할 바를 올바르게 정하지 못하여 민중에게 스스로 원망을 사고 경박한 풍속에 빠진 사람이 많을 따름이다.

*偸俗(투속): 경박한 풍속. 단국대 한국한자어사전

玆於視事之暇抄出有關於民俗者(자어시사지가초출유관어민속자)

若干條觀列成編以為識時務敦風俗之勸焉(약간조관렬성편이위식시무돈풍속지권언)

이곳에서 일을 보는 틈틈이 민속에 관한 여러 가지를 골라서 뽑아 살펴본 까닭은 약간의 항목을 관찰하여 편찬함으로써 시급한 일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풍속을 돈독히 하길 권장하고자 함이다.

*抄出(초출): 골라서 뽑아냄/  時務(시무): 시급(時急)한 일.

而閒以山川村閭古今名勝之址奇異之蹟付(이한이산천촌려고금명승지지기이지적부)

之者此不過為汨董羹和泥水而其亦博識之(지자차불과위골동갱화니수이기역박식지)

一助矣(일조의)

그리고 틈틈이 산천과 마을을 살펴보면서 고금의 명승지와 기이한 자취들을 덧붙였다. 이것은 그저 차가운 국물과 흙탕물을 섞는 하찮은 일에 불과할지라도 그런 행위는 오히려 여러 방면의 지식을 더 넓히는 데 한몫하리라.

終以嘗鄉約案而止之於忠孝貞烈者(종이상향약안이지지어충효정렬자)

可謂一微義耳蓋人心秉彝終古未泯者而特(가위일미의이개인심병이종고미민자이특)

逼於飢寒而失之耳(핍어기한이실지이)

마침내 향약의 내용을 음미함으로써 충(忠), 효(孝), 정(貞), 열(烈) 등의 덕목에 잘 머무르는지라, 이는 은미한 뜻이 크다고 할 만하다. 대체로 사람의 마음속에 늘 변치 않는 본성이란 예나 지금이나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다만 굶주림과 추위에 내몰려 그 본성을 잃게 될 뿐이다.

故使人先識時務之宜而(고사인선식시무지의이)

力農安業不為飢寒之所累然後可以顧藉而(력농안업불위기한지소루연후가이고자이)

爲善激昂而向上(위선격앙이향상)

그렇기에 인간들에게 먼저 시급한 일의 마땅함을 알게 하고, 농사를 힘껏 지어 생업을 안정시켜 굶주림과 추위에 얽매이지 않게 한 뒤에야, 비로소 서로 돌아보며 선을 행하고 분발하여 위로 나아가도록 할 수 있으리라.

使呂藍田遺約勸規交恤之(사려람전유약권규교휼지)

盛事竟爲復古之化者是所望於一坊云爾(성사경위복고지화자시소망어일방운이)

남전(藍田) 여씨가 남긴 향약의 德業相勸(덕업상권), 過實相規(과실상규), 禮俗相交(예속상교), 患難相恤(환난상휼)과 같은 훌륭한 덕목들이 마침내 이뤄지도록 함으로써 다시 옛 풍속을 회복하는 변화가 어느 고을에서나 실현될 소망을 말할 뿐이다.

*향약(鄕約)은 향촌규약(鄕村規約)의 준말로, 지방의 주민이 서로 도우며 살아가자는 약속이다. 향약을 최초로 실시한 중국 북송(北宋) 말기 섬서성 남전현(陝西省 藍田縣) 도학자 여씨(呂氏) 4형제(大忠, 大防, 大釣, 大臨)가 일가친척과 향리 사람을 교화하려고 내건 4대 강목은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이다. 이른바 ‘남전 향약’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因合而名之曰面誌(인합이명지왈면지)

이런 까닭에 앞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를 합하여 만든 글을 면지(面誌)라 이름하였다.

辛酉冬十月丁卯密陽朴文采序(신유동시월정묘밀양박문채서)

신유년(辛酉年·1921년) 겨울 10월 1일(정묘일) 밀양 박문채(朴文采) 서문(序文)을 쓰다.

대한민국 107년 11월 5일

편집: 형광석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