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아 아~ 사람아
영화 <5일의 마중>을 보고
살다가 가슴 먹먹해지는 순간이 있다. 누군가는 유도신문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그러할 수 있다. 흔들림을 보이면 현상 유지조차 어려워 내색해서는 안 된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갈등으로 천둥치는 속내를 어서 수습해야 한다.
삶의 켜를 훑는 한순간의 물기라도 들키면 큰코다친다. 그 다차원의 심정을 긴박하게 갈무리하는 존재의 낯을 표정 연기로 전달하기는 쉽지 않다. 장예모 감독이 7년 만에 공리와 손잡은 이유이리라.
영화 <5일의 마중>은 도입부에서 그 지경에 처한 펑안위(공리)의 정황을 줌인으로 클로즈업한다. 다소곳이 앉아 대응하는 무심한 얼굴을 내리 좇다가 미세한 떨림을 낚아챈다. 입술 한 쪽 끝이 보일 듯 말 듯 ‘씰룩’ 벌어진 찰나, 안간힘에 스민 물기가 툭 짚어진다. 그렇게 표정을 부각시키는 영화는 사람 중심이다.
탈옥한 남편 루옌스(진도명)를 향해 줄달음치는 마음과 딸 단단(장혜문)의 장래 걱정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하는 그녀는 사람이다. 노크 소리에 흠칫 놀라며 신음을 누른 눈물과 소리 죽인 걸음으로 문 뒤의 기척에 온 신경을 쏟는 그녀의 모습은 온기 어린 관계에의 그리움을 표상한다.
딸 단단(장혜문)의 신고로 남편이 체포되는 현장을 목격한 후 심인성 기억장애라는 빗장 지르기로 각박한 현실에서 퇴장함은 그녀가 사람이기에 가능하다. 매달 ‘5일’이면 앞에 있는 자기를 마중하러 역으로 가는 그녀를 곁에서 지키는 루옌스 역시 사람이다. 말로 표현할 길 없는 심경을 망연자실한 눈빛과 고독한 흐느낌으로 감내하면서 그녀의 위안거리를 마련하는 삶은 그래서 지속된다.
사람은 위기상황에서도 ‘너’를 향해 열려 있다. 문화대혁명기(1900~1976)의 탁류에 휩쓸려 ‘너’ 때문에 앓는 두 인생을 장예모 감독은 그렇게 묵묵히 조명한다.
사람은 살아 있는 보물, 활보(活寶)이다. 살맛나는 세상은 활보들이 짓는다. 당장은 남 일이지만 장차 내 일이라 여겨 광화문 광장이나 농성현장을 찾아 약자 편에 합류하는 사람, 사이버 망명자가 늘어나지만 쓴 소리로써 불특정다수의 무딘 감각을 일깨우는 사람, 짧게라도 낯선 이가 내민 손을 잡아주는 사람, 갈 길이 바쁜데도 낑낑대는 리어카를 밀어주고 뛰어가는 사람 등등 묵묵히 움직이는 활보들이 아직은 많이 있다.
<5일의 마중>에 <0416의 마중>을 오버랩하면서 나도 사람이 되자고 다잡는다.
* 중국 작가 다이 호우잉의 소설 ‘사람아 아 사람아’(신영복역, 다섯수레, 2005)의 제목을 패러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