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한때 신데렐라 유리구두를 탐했다

- 영화 <신데렐라>를 보고 -

2015-03-25     김유경 주주통신원

나도 한때 신데렐라 콤플렉스(Cinderella Complex)를 앓았다. 왕자가 내민 유리구두가 내 발에 꼭 맞아 왕비가 되는 꿈을 오래 꾸었다. 유리구두 임자를 찾아 헤맨 마음으로 나만을 미친 듯 좋아해 자칫 왕관마저 박차고 나올 기세에 환호했다. 물론 왕관은 유지해야 한다. 유리구두로 딛을 레드카펫은 왕궁을 향해 펼쳐져야 하니까. 그런데 왜 하필 유리구두란 말인가?

유리구두는 깨지기 쉽다. 환상이니까. 눈에 보이는 일체의 현상도 환상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람들은 환상은 몽상이나 망상이고, 세상살이의 현상은 실재라고 여긴다. 사실 현상도 맘먹기에 따라 변하는 환상인데. 어쨌거나 유리구두 같은 환상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통곡하다가도 거지 노파에게 따뜻한 우유를 건넬 따뜻한 마음이 상존해야 한다. 그 빛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마음에 대한 보상이 유리구두다. 그 마법의 힘은 내 몫이 아니었다.

영화 <신데렐라>는 동명의 샤를 페로 동화를 ‘클래식 로맨스’로 극화했다. 밑바닥 생활을 견디고 세기의 사랑을 쟁취한 캐릭터를 내세워 인고(忍苦)의 당위성을 툭툭 관객에게 투하했다. ‘용기와 따뜻한 마음을 잃지 마라’,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다 그런다고 해서 옳은 건 아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자’, ‘마법의 힘을 믿자’ 등등. 5포(연애, 결혼, 출산, 집, 인간관계 포기)세대는 물론 어린이집에 덴 3살짜리를 쏟아내는 세상에 그 디즈니 사탕은 어떤 맛으로 수용될까.

신데렐라의 어의는 ‘재를 뒤집어 쓰다’다. 허드렛일을 하다 아궁이 옆에 잠들어 볼품없어진 형상에 붙은 별명이다. 자본주의 계급사회에서 처지를 환기시키는 명칭에 초연할 수 있으면 그냥 사람이 아니다. 다수 정당이 유리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소수의견을 대변함은 큰 모험이다. 정체성을 지니기 위해 성형하는 세태의 마법은 로또 당첨이다. 그 마법의 힘은 횡재(橫災)로 이어지기 쉽다. 그러니까 현실에서 디즈니의 신데렐라는 혁명하는 투사여야 될 수 있다.

거대 상업체인 디즈니가 혁명투사를 호명할까. 삶이 고달픈 관객들에게 아름다운 로맨스를 주입해 우중화를 꾀하며 배를 불리려는 속셈일까. 이런 생각들이 지나치게 편향된 것일까. 아름다운 푸른 드레스를 입고 왕자와 춤을 추는 신데렐라를 부러워하다 이런 잡치는 상념들에 얽혀들었으니 나도 참 딱하다. 그러나 분명한 건 내가 마법의 힘을 믿는다는 것이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은 나를 살게 하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