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영자 1938년 장야리 출신
아파트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는 고택의 가을이 깊고도 깊어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고 하신다.
나이 드니 예쁜 걸 보면 눈물이 난다고. 최 선생님은 스무 살 어여쁜 나이에 대전사범학교를 나오셔고 죽향초등학교에 부임하셨다. 대전에서 온 예쁜 선생님은 아이들한테 인기가 좋아서 교사가 가장 아름다운 직업이라고 생각하셨던 선생님. 학교에서 3년 정도 근무하시고 평범한 주부로 내내 살아오셔서 스스로 나는 경력단절 여성이라고 웃으면서 이야기를 풀어놓으신다.
하지만 웃음속에 가슴 찢기는 처절한 하루하루들이 숨어 있었다. 누구나 예외일 수 없듯이...
정말 그 시절이 내 것이었을까?
아버님은 옥천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는데 우리 오남매가 고모, 삼촌 그리고 할머니까지 다같이 대식구를 이루어서 장야리에서 살았다. 매일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곤 했는데 아버지의 등이 무척이나 넓었다. 나한테는 아버지가 영웅이었다. 아버지의 얼굴은 생기 없었지만 눈빛이 따뜻한 분이었다. 시골학교의 선생님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모범 가장이었던 아버지. 열 식구 밥상 차리고 도시락 챙기고 잠잘 시간도 없던 어머니. 우리집도 다른 친구들 집처럼 두 끼를 겨우 먹고 살았다. 오빠들이 청주로 나가 공부하고 나는 대전사범으로 가게 되었다.
내가 1938년생이니 사실 우리또래 여성들도 우리 어머니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교육의 혜택을 입어서 그나마 논과 밭에서 해방된 혜택받은 사람이다. 동네에서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면서 학교에 다녔는데 우리 세대들도 참으로 힘겨운 날들이었다. 부모세대들이 처참할 정도로 가난했고 우리 세대들도 마찬가지, 동네 친구들 중에서 상급학교에 다니던 친구들이 손에 꼽는다. 시골에서 대전사범에 갔더니 예쁜 여학생도 많고 공부 잘하는 여학생들도 많았다. 시골에서 우쭐대던 나는 요즘 아이들말로 명함도 못 내밀 처지였다.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이 있듯이, 옥천에서는 잘난 체하고 다녔지만 대전 나가서 기도 제대로 못 펴고 다녔다. 졸업 후에 죽향초등학교에 부임해서 3년간 교편생활을 했다. 스무살에 학교에 부임하고 아이들을 보면 눈물이 날 정도로 예뻤다. 아이들이 고사리 손으로 내 치마를 만지고 얼굴이라도 마추치면 부끄러워 하던 우리 아이들. 교사가 천직인줄 알았는데 친적어른이 중매를 하셔서 청주 전매청에 다니는 남자를 만났다. 남편은 머리가 좋고 똑똑한 사람이라 첫 만남에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결혼하자고 졸라댔다. 나는 결혼이 뭔지 알기를 하나 도망다니다가 그 다음 해에 결혼을 했다. 여기까지는 장밋빛 탄탄대로였다. 우리네 인생이 늘 좋을 수만도 없고 늘 괴로운 것도 아니다. 평탄한 나의 삶에도 폭풍우가 밀려왔다. 그것도 걷잡을수 없이...
아이들과 같이 공부하고 그 시절이 내 인생에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다. 3년간의 교편생활을 뒤로하고 나는 평범한 가정주부가 되었다. 청주에서 살면서 친정 옥천에 들리러 올 때는 꼭 학교운동장에 들었다. 일부러 아이들 하교 시간에 맞춰서 운동장에 갔다. 여름에는 아이스크림을 한보따리 사가서 눈에 띄는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같이 먹었다. 담임 하지 않았던 반 아이들도 나를 기억하고 “선생님 선생님” 불러줄 때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건 그저 동화 속의 한 장면같은 꿈 같은 이야기였다.
폭풍우가 휘몰아치다, 걷잡을 수 없이
남편 내조에 인생을 걸었던 때가 있다. 남편은 승승장구하고 우리 4남매는 다들 공부를 잘해서 서울로 유학을 보냈다. 큰 딸아이는 청주에서 여고 다닐 때도 전체에서 5등 안에 꼭 들더니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내가 서울대에 입학한 것처럼 행복하고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워낙 성실하고 똑부러지는 아이라 걱정 안하고 나는 신앙생활에 전념하면서 봉사활동을 많이 하러 다녔다. 남편도 전매청에서 승진가도를 달리고 아이들도 서울에서 다들 명문대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난 부러울 게 없던 사람이었다. 세례명 카타리나, 하느님 잘 믿고 봉사활동 하면서 삶의 만족을 누리는 보통 이상의 삶을 살면 되었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라고 간간이 반문하던 때, 정말 그 날이 찾아왔다. 더 이상 행복하지 말라는 그 날이 내 앞에 우두커니 섰다.
어느날 집에 경찰들이 찾아와서 우리 큰 딸을 찾았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서 있을 수도 없고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니 우리딸을 왜 경찰들이 와서 찾는 건지.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집에 오면 당장 전화하라고 엄포를 놓고 사라졌다. 넋 놓고 마루에 앉아서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남편이 퇴근해서 돌아왔다. 내 꼴이 어이없던지 너무 놀라서 재차 묻는다.
“무슨 일 났어?”
“그 X년이 데모를 해서 쫓겨다니는구나”
남편의 입에서 욕설이 나오는 걸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남편의 태도에도 너무 놀랐다. 동생들한테 연락하니 큰 딸이 친구집에서 같이 공부한다고 한 달째 집에 오지 않았다고 한다. 사단이 나긴 난 모양이었다. 1주일 후 큰 딸이 집에 기어들어왔다. 얼굴이 반쪽이 됐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어서 닥달을 했더니 짐작대로였다.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이 큰 딸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쳐서 살면서 남편의 그런 모습을 처음 목격한 나는 충격이 너무 컸다.
딸은 그 새벽에 서울로 올라가서 다시 도망다니다가 1주일 만에 경찰에 잡혔다. 미문화원 농성 사건에 연루되서 구치소에서 연락이 왔다. 부리나케 올라갔더니 솜털이 뽀송뽀송한 애들이 쪼로록 앉아 가관이었다. 그 밤에 다시 청주로 내려와서 남편한테 의논했더니 호적에서 파 버린다고. 분노하면 주체를 못하는 남편의 모습을 여실히 보면서 또 인간애 대한 의구심을 갖게 됐다.
피가 바짝 마른 한 달 여의 시간이 내 인생 전반에 가장 힘든 시절이었다. 청천벽력같은 상황, 남편의 분노, 아이는 그저 고요하다. 아이는 제적당했고 3년간 소리없이 지내다가 어느날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나 수녀가 되겠다고 통보를 한다. 모태신앙인 내 입장에서 수녀가 된다는데 말릴 이유를 찾기는 어려웠지만 난데없는 통보에 우리 부부는 또 충격을 받았다.
공부 제일 잘하고 나의 자랑이던 큰 딸이 한번도 모자라 또 부모를 놀라게 했다. 남편은 전매청 승진명단에서 계속 누락이 되고 불이익이 많았는데 남편은 딸 때문이라고 단정짓고 아이와 절연을 했다. 아! 어떻게... 우리집에 이런 불상사들이 연이어 지는지. 큰 딸은 지금은 00성당의 수녀로 고요한 생활을 하고 있다. 남편도 딸 때문에 속을 어찌나 끓었던지 칠순 지나고 바로 심장마비로 먼 길을 먼저 떠났다.
우리 가족에게 몰아친 5년간의 불화는 삽시간에 집을 집어삼키는 화마같았다. 불씨를 잡으려하면 다시 다른 불씨가 집을 다시 집어 삼킨다. 내 자랑이던 딸이 스무살 어여쁜 나이에 우리집을 집어삼켰다. 우리는 내일 일을 모른다고 한다, 아무도 짐작할 수 없다. 둘째 딸이 마흔두살에 손주들 셋을 남겨놓고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내가 우리 자식들 때문에 가슴 아파서 통곡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교만했다. 딸이 먼저 떠나고 손주들도 내 몫이 돼서 손주들 결혼까지 다 시켰다.
노후준비가 아닌 먼 여행 떠날 준비
인생이 공평하다는 말은 행복수량이 공평하다는 것일까? 아니면 불행의 수량이 공평하다는 것일까? 안나카레리나의 첫문장 ‘행복한 가정은 저마다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자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 돌아보니 인생이 공평하다는 말은 행복의 공평이 아니라 불행의 수량이 공평하다는 말이다. 저마다 남모르는 고통이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시골에 아직 살고 있는 우리 친구들, 학교 구경도 못한 우리 친구들이 자식들 옆에 끼고 노인정 다니면서 즐겁게 살고 있다. 교복 입고 학교 다닌다고 동네 친구들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던 최 교장집 딸이 아파트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베란다에서 바라보이는 세상이 전부인 듯 하루하루 연명하듯이 살고 있다. 이조차도 순리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하고 돌아왔다.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의향서다. 죽기 전에 콧줄 끼고 살고 싶지 않다. 미리 자식들에게도 선언을 했다. 장기기증도 했고 헌체등록도 마쳤다.
이제 나의 육신은 내 것이 아니다. 내가 세상을 떠나는 날 나는 사라지고 내 육신은 다시 새로운 생명을 위해서 태어나겠지. 나이든 몸이라 쓰임새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꺼져가는 생명을 부여잡고 있는 이에게는 녹슨 장기들도 도움이 되려나. 홀가분하다. 혼자 있는 내가 안쓰러워 막내 딸이 수시로 드나들지만 괜스레 짐이 되는 것 같은 마음을 버릴 수가 없다.
사는 게 고통이면 안 되는데 간간이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날들이 나에게도 엄습해왔다.
마음이 불편할 때는 글을 써보기도 한다. 형식없는 글, 시도 아닌 수필도 아닌.
지금의 나처럼 몸의 질서를 잃은 글. 햇살을 등지고 큰 글씨 책을 매일 읽는다.
고요하지만 가슴은 아리다. 사브작사브작 먼 여행 떠날 채비를 해보자.
병원가는 길
딸 손을 잡고 병원을 간다
유모차를 끌고 겨우겨우 십분을 걸었다
병원에 올라가니 번호표가 십분을 기다려야 한다
아 병원도 만원이구나
아픈 사람들만 늘어나는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지
보이느니 나같은 할머니뿐이다
젊은 사람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사는 게 지옥이 되는 날이 오면 안 되는데
내일이 오는 것이 반갑지 않은 오늘이다
※ 이 기사는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하성환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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