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너 좀바르트는 미국에 사회주의가 자리 잡지 못한 이유를 “파인애플과 스테이크가 넘쳐서”라는 농담으로 설명했다. 풍요 속에서 혁명적 계급의식이 자라기 어렵다는 말이다. 실제로 미국 시민 상당수는 자본주의 체제에 상대적으로 만족했고, 이는 사회주의가 뿌리내리기 힘든 토양이었다.
그렇다고 미국에 심각한 계급 갈등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파리 코뮌이 벌어지던 1871년, 미국 주요 도시에 흑인 하층 노동자들의 소요를 우려해 군대를 배치할 정도였다. 문제는 계급 갈등보다 더 깊게 자리 잡은 인종 분할 구조와 이민 집단 간 경쟁이었다. 흑인·백인·이민 노동자가 서로 다른 차별과 이해관계에 묶여 연대하기 어려웠고, 이러한 분열은 계급적 연대의 형성을 근본적으로 제약했다.
여기에 유럽과 달리 왕정과 귀족제가 없었던 미국은 광대한 영토를 배경으로 백인들 사이의 평등주의가 강하게 자리 잡았다. 기층 민중들의 생존투쟁을 대하는 국가와 기업의 조직적·폭력적 탄압, 양당제가 고착된 정치 구조 역시 사회주의의 존립을 막는 장벽이었다.
한편 사회주의의 본래 정신은 개인의 존엄과 자유를 경제적·사회적 기반 속에서 보장하고, 공동체적 책임을 강조하는 데 있다. 이 점에서 사회주의에는 공화주의적 가치가 스며 있고, 이는 미국 헌법의 정신과도 맞닿아 있다. 사회의 사회적 약자 보호 운동, 휴머니즘 운동은 이런 흐름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정치 영역으로 이어졌고, 노동자·서민·기층 민중의 권익을 대변하는 정당운동으로 발전했다. 20세기 초 유진 뎁스가 이끈 미국사회당이 그 출발점이며, 한때 제3의 대중정당으로 자리 잡아 1,000명 넘는 선출직을 배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 참전, 루스벨트 정부의 노동조합 인정과 사회보장법 도입, 2차 세계대전 이후 매카시즘의 광풍이 이어지며 사회주의 세력은 빠르게 힘을 잃었다.
그런 상황을 떠올리면, 최근 뉴욕시 시장으로 당선된 조란 맘다니의 등장은 미국 정치 지형이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우간다에서 태어난 인도계 무슬림 이민자로, 스스로를 ‘민주적 사회주의자’라 밝히며 유진 뎁스의 정신을 계승하겠다고 했다. 선거 기간 트럼프 대통령은 그를 “미치광이”, “공산주의자”라고 공격했지만, 당선 후에는 백악관으로 초청해 덕담을 나눴다.
미국이 ‘이민자의 나라’를 자처하지만, 무슬림에 대한 반감은 여전히 뿌리 깊다. 이 정서는 미국 정치권의 이스라엘 전폭적 지지, 9·11 테러, 미국 내 유대계 로비의 영향 등과 맞닿아 있다.
그럼에도 무슬림 출신 연방 하원의원만도 이미 네 명에 이른다. 팔레스타인 난민 2세인 라시다 탈리브(미시간), 소말리아 난민캠프 출신의 일한 오마르(미네소타)가 대표적이다. 이들의 존재는 미국 정치의 변화를 보여주는 신호다.
지난 10월 미국 곳곳에서 벌어진 노킹스 시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에 항의한 대학생과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 2010년 이후 이어져 온 아큐파이 스트리트 운동과 선라이즈 무브먼트 등은 미국 시민들의 민주적 참여(권리 의식)이 크게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1968년 인권·반전 운동의 연장선이자, 미국 진보정치의 생명력이다.
버니 샌더스는 미국 진보의 상징으로 여전히 DSA(미국민주사회주의자) 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고, AOC 등 젊은 정치인들도 꾸준히 지지를 넓히고 있다.
최근 지방선거에서도 뉴욕은 물론 시애틀, 버팔로, 뉴저지, 버지니아 등 많은 도시에서 진보 성향의 시장·주지사가 당선됐다. 임대료 폭등, 생계비 상승, 보육·교통·물가 부담, 심화되는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정치적 선택으로 이어진 결과다. 경제적 고통은 삶의 고통 그 자체다. 이를 외면한 채 자유와 행복,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다.
유진 뎁스는 통제되지 않는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하다”고 했다. 오늘의 시민들이 느끼는 감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애나 평등을 얘기하지 않더라도, 최소한의 연민이 있다면 시민의 기본 생계와 경제적 고통을 덜어주는 것, 그것이 정부의 책임이다. 이는 미국 헌법과 독립정신이 규정한 정부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편집: 김영수 객원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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