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의 분립을 사법권 독립으로 혼동하는 조선일보
여야 짬짜미가 국민통합인 줄로 착각하는 정세균(전 국무총리)
사법권력 독립과 여야 통합 기치는 국민을 들러리 세우겠다는 것
마가(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외치는 트럼프도 ‘통합’ 운운하지 않아
‘통합’의 기치는 구조적 모순을 그대로 묻고 가자는 것
권력의 ‘독립’ 혹은 획일적 ‘통합’ 대신 지역분권과 민권(국민발안)으로

‘왕초 윤석열과 권력층 도둑들’ 또 나라 삼킬 수 있다(사진출처: 한겨레, 2025.12.2. https://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1232297.html?utm_source=copy&utm_medium=copy&utm_campaign=btn_share&utm_content=20251202)
‘왕초 윤석열과 권력층 도둑들’ 또 나라 삼킬 수 있다(사진출처: 한겨레, 2025.12.2. https://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1232297.html?utm_source=copy&utm_medium=copy&utm_campaign=btn_share&utm_content=20251202)

정부가 사법개혁 관련하여 대법원 소속 법원행정처를 폐기하고 사법행정위원회를 신설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에 대해 조선일보가 위헌이라고 규정하고, “위헌이 명백한 사안을 정치적 목적을 갖고 밀어붙이는 것은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국회가 한 정당에 지배되고 야당이 변질돼 무력해지면 민주국가에서도 독재적 행태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목도하고 있다”는 논평을 냈다.(조선일보 사설, 2025.11.27.) 

 

조선일보는 판사, 검사 등의 사법독립성을 강조한다. 정부의 법원행정처 폐기 방침에 관련하여 조선일보는, “헌법 101조는 ‘사법권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 속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사법권엔 사법행정권이 포함되는 것이 당연하고, 사법행정권의 핵심이 법관 인사권이다. 판사 임명권이 대법원장에게 있다고 규정한 헌법 104조도 같은 맥락이다. 그 점에서 민주당의 사법행정위 신설안은 그 자체로 명백한 헌법 위반이다. 특히 민주당 안대로라면 외부 인사들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을 특정 성향 법관에게 맡기는 방식으로 재판에 개입할 여지가 생긴다. 이는 사법부 독립을 규정한 헌법 정신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라고 한다.(조선일보 사설, 2025.11.27.)  

 

또 조선일보는, “헌법과 법률이 판사·검사의 파면이나 징계를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규정한 것은 권력에 휘둘리지 않도록 하려는 취지다. 사법 독립성을 지키기 위한 법치의 근간이 행정 권력과 입법권을 동시에 쥔 정파에 의해 허물어질 위기에 처했다. 과거에도 사법기관을 정권 지키는 도구로 만들려던 시도가 있었지만 국민적 저항을 불러왔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란다”는 논지를 폈다.(조선일보 사설 2025.11.17.)

 

조선일보 사설의 주장은 몇 가지 비약과 오류를 범한 것이다. 첫째, 사법권력에 당연히 사법행정권이 포함되고, 또 그 사법행정권의 핵심이 법관인사권이라고 본 점이다. 그 뜻은 법관이 재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법원 관련 행정과 법관 인사권을 온통 다 행사하도록 헌법에 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사법권은 당연히 재판의 권한을 말하는 것이고, 법원행정에까지 확장되는 것이 아니다. 법관의 인사는 사법권이 아니라 행정권이고, 그 행정을 어떤 식으로 할 것인가는 입법부에서 정하고, 행정부에서 시행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조선일보는 사법부를 입법부와 행정부의 소관을 벗어난 법관들의 독립왕국쯤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세상 어느 곳에도, 재판을 하도록 임명된 법관이 되레 법관 인사까지 다 하는 곳이 없고, 또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언론이 있는 곳이, 필자가 견문한 바에 따르면, 없다. 조선일보의 이런 사고는 몰상식뿐 아니라, 사법부를 입법과 행정의 소관에서 탈출시키고 싶어 하는 독선의 근성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헌법 104조에서 "판사 임명권이 대법관에 있다"고 한 것은 대법관이 원하는 이를 누구라도 마음대로 뽑아 쓰라는 것이 아니다. 입법부와 행정부에서 정해진 법과 시행령에 따라 관리를 잘하라는 뜻이다. 총장이나 대통령이 교수나 공직자를 최종 임명할 때도 그와 같다. 민주국가에서는 기관장이라고 해서 전횡하면 안 된다. 만일 그 같은 전횡이 가능하다면 제도에 헛점이 있는 것이므로, 국회에서 그런 법을 후딱 고쳐야 하는 것이다. 그런 법이 있으니, 법에 따라 대법원장이 외부 간섭받지 않고 법관 인사를 주물럭거려도 된다고 할 것이 아니다.

 

법원이 법관 인사권까지 가지고 있다는 조선일보의 주장은 그 자체의 진술과도 모순된다.  조선일보는, 한편으로, “헌법과 법률이 판사·검사의 파면이나 징계를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규정한 것은 권력에 휘둘리지 않도록 하려는 취지”라고 하고, 다른 한편으로, “사법 독립성을 지키기 위한 법치의 근간이 행정 권력과 입법권을 동시에 쥔 정파에 의해 허물어질 위기에 처했다”고 하기 때문이다.

 

조선일보의 주장은 행정과 입법의 권력을 동시에 쥔 정파(현 여당 및 정부)의 권력에 휘둘려 판사·검사의 파면이나 징계가 함부로 행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같은 현실을 두고 왜 조선일보는, 헌법 101조에 따라 사법부가 인사행정권까지 쥐고 있는 것이라고 강변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자못 간단하다. 행정권과 입법권을 동시에 장악한 정부여당에 의해 ‘사법 독립성’이 무너질 위기에 처해 있으니, 그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법원 행정권 및 법관 인사권을 독자적으로 행사하겠다는 뜻의 천명이다. 이런 조선일보의 강변은 그 자체로서 헌법의 왜곡이며, 해석의 비약이다. 그 사법권 독립의 범위에는 판사뿐 아니라, 급기야 행정부 산하 법무부 소속의 검사도 도매금으로 포함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조선일보는 정부 여당을 향해, “사법기관을 정권 지키는 도구로 만들려던 시도가 있었지만 국민적 저항을 불러왔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란다”고 경고했으나, 그 경고의 화살은, 부메랑같이, 사법기관을 반정부적 독립왕국으로 만들려고 획책하는 조선일보를 향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좀더 근원적 문제로서, 사법권력 독립이라는 개념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겠다. 세상 아무 데도 사법권력은 독립한 적이 없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내각제의 나라 영국은 사법권을 포함한 3권 자체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의회가 그 모든 권력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독일은 입법과 행정, 2권분립의 국가로서, 사법권은 행정부에 소속되어 있다. 

 

대통령 중심제의 미국에서도 사법권력은 독립해 있지 않다. 19세기 말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던 당시 제헌헌법에서도 3권분립 원칙은 적시되지 않았다. 사법부 관련의 논쟁은, 입법부, 행정부와의 관련이 아니라, 연방정부와 주정부 간, 혹은 정부관료와 시민의 배심재판 간에 주도권을 둘러싼 논쟁이 주가 되었다. 

 

한국의 사법제도는 일본 식민지배의 잔재로서 대륙법계뿐 아니라, 해방후 미국의 정치제도가 다소간 이식된 것이라 할 수 있으므로, 미국의 사법권력을 둘러싼 논쟁을 일견할 필요가 있겠다.

 

김병록(조선대학교 법과대학 교수)은 18세기 말 미국 (연방)헌법 제3조와 법원조직법, 특히 전자보다 후자에 의해 다소간에 제3기관으로서의 사법권 독립이 보장된 것으로 보았다.(참조: 김병록, 미국의 법원조직법과 사법부의 독립, 미국헌법연구, 22(2), 2011, 59~86. 미국 헌법제정 당시 상황 관련 기술 내용은 이 논문에 의거함) 

 

그러나 사법권 독립 원칙을 미국 연방헌법에서 도출해내기는 어렵다. 연방헌법 그 어디에도 3권분립에 준한 사법권의 독립 관련 규정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연방헌법 제3조에는 오히려 사법권력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연방정부와 시민 간, 또 연방정부와 주(州)정부 간 알력의 흔적이 드러나며, 각기 전자보다 후자에게 우선권을 부여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미국 연방헌법 제3조 제2항 제3호에 따르면, “탄핵 사건을 제외한 모든 범죄의 심리는 배심제(jury)에 의한다. 그 심리는 그 범죄가 행하여진 주(州)에서 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 범죄가 어느 주 내에서도 행해지지 아니하였을 때에는 합중국 의회가 법률로서 정한 장소에서 이를 심리한다.” 그 함의는 연방정부 차원의 중대한 정치적 사건을 함의하는 탄핵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건은 연방정부의 관료가 아니라 시민 배심제에 의하며, 재판의 주체도 연방정부가 아니라 주(州)정부가 된다는 것이다. 

 

김병록의 이해와 달리, (연방)헌법 제3조는 연방정부 내 행정, 입법, 사법 등 3권의 관계를 규정한 것이 아니고, 사법권의 독립에 관한 내용은 더더구나 찾아볼 수가 없다. 이 같은 정황은 김병록 자신이 소개하는바, 헌법제정을 둘러싼 당시의 담론에서도 노정된다. 

 

당시 미국 시민이 생각한 자유, 공평, 독립의 재판관은 주(州)정부와 시민 배심재판관이 주를 이루는 것이었다. 더구나, 주정부 입장에서는 연방정부의 사법부가 연방정책들의 집행을 위한 연방정부의 무기로 간주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연방정부 측 담론의 초점은 주정부에 하급연방법원을 두어야 할 것인가에 있었고, 당시 헌법제정에 기여했던 매디슨(J. Madison)은, “적절한 집행부와 사법부 없는 정부는 행동하고 움직일 팔다리가 없는 몸종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주법원에 연방법의 집행을 맡길 수 없고, 사법권을 주정부에 양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았다. 피셔 에임스(Fisher Ames)도, “우리가 임명하지 않고 통제할 수 없는 사람들(즉 주정부)에 의해서 법이 해석되고 집행되는 것은 비정상”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연방주의자의 관점에서 볼 때 불편한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주재판관의 지방주의, 둘째, 재판관조차 주권자 국민의 대행자로 생각하는 국민주권주의(시민 배심제)였다. 한 예로, 메사추세츠 권리선언에서는,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 있다”는 점을 규정했고, 그것은  입법, 집행(행정), 사법을 망라한 것이며, (비정규직 시민) 치안판사들은 국민의 대리인, 대행자이며 항상 그들에게 책임을 진다는 점을 천명했다. 

 

연방지방법원 재판관과 주 재판관 사이의 입지의 차이도 언급되었다. 연방사법권의 축소를 지지한 윌리암 로턴 스미스(William Loughton Smith)는, “(연방)지방법원판사는 해당 주의 시민가운데서 선출될 것이고... 주재판관(판사)보다 독립적일 것이다. 주법원의 모든 사건들은 확실하게 배심재판에 의한 것이 될 것이다”라는 견해를 개진했다. 여기서 재판관의 독립은 연방지방법원과 주법원 간의 비교 차원에서 언급되는 것이고, 입법, 행정(집행)에 대한 사법권의 독립이 아니라는 점을 보게 된다.

 

한편, 연방주의자와 반(反)연방주의자 간의 알력은 보통법(Common Law)과 형평법(Equity Law) 간 대립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전자는 관습법으로서 배심원의 재판에 원용되는 것이고, 후자는 관습이 아닌 원칙을 적용하는 것으로서 국왕 및 정부, 사법 관료의 명령 혹은 판결이 근거하는 법원칙이다. 시민 배심원의 주권 혹은 주정부의 반연방주의적 기치는 당연히 형평법에 거부적이다. 영국은 보통법의 나라로 알려져 있는 만큼 형평법은 크게 성하지 못하였다. 

 

연방헌법 제정 당시에도 보통법과 형평법 간의 갈등이 미국 동부에서 전개되었다. 연방정부와 형평법에 대한 반감은, 위 김병록의 논문에서 소개하는 다음의 글에서 살펴볼 수 있다. 보통법과 형평법 간의 갈등은 사법 주도권을 시민 및 주정부와 연방정부 가운데 누가 갖느냐 하는 문제로서, 입법, 행정, 사법 등 3권분립의 개념과 무관하다.  

 

“영국에서 형평법 법원은 전부터 완전히 보통법의 엄격한 형식을 이용한 성직자들의 수중에 있어서 형평법이라는 그럴듯한 이름 하에 외국모형의 법학을 도입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미국의 모든 주들 중 가장 자유로운 펜실베니아는 현명하게도 그것(형평법 법원)의 설립을 거부했다. 그래서 형평법 법원의 이름조차 알지 못한다.”(펜실바니아의 민주연방주의자의 글, Pennsylvania Herald, 1787.10.17. 60, “3. 완전한 반(反)연방주의자”)

 

“배심재판은 사법권의 민주적 부분으로 입법부의 대표자들보다 더 필요하다.... 배심을 파괴하라, 그러면 사실을 억압하고 변화시킴으로써, 모든 것이 쉽게 법을 가장 잘 운용할 수 있는 재판관들에게 굴복한다. 그러므로 배심재판이 폐지될 때에는 언제나 사람들의 자유도 곧 상실됐다. 사법권은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보듯이 즉시 흡수되거나 행정부의 지도하에 놓여진다.”(매릴랜드의 농부, Maryland Gazette, 1788.3.21. 38-39, “3. 완전한 반(反)연방주의자”) 

 

같은 맥락에서 다음의 구절을 함께 옮긴다. “사람들은 법원을 호의적인 눈으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법원이 사회의 악덕을 고치도록 되어 있지만, 계속 인간의 본성과 대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까지 관찰한 바에 따라 저는 이 정부의 바퀴 중 사법부가 가장 해롭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매릴랜드 출신 미셀 스톤 Michael Stone)

 

다른 한편, 1776년 매릴랜드주(권리선언 제6조)와 버지니아 주정부에서 각각 “(주)정부의 입법, 집행, 사법권은 영원히 분리되고 구별되어야 한다”, “다른 기관에 속한 권한을 행사할 수 없으며, 어떤 사람도 자신이 가진 것 이상의 권한을 행사할 수 없다” 등 취지의 규정이 있었다. 

 

여기서 기관이나 개인의 권한 행사의 제한은 기능적 분리를 뜻하는 것일 뿐, 배타적인 주정부 사법권의 독립이라는 공식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하다. 첫째, 주정부는 독립된 권력이 아니라 연방정부와 견제와 균형의 관계에 놓여 있다. 정부 위에 연방정부가 있으며, 연방법원 혹은 연방지방법원과 주법원이 서로 견제하는 다핵적 권력구도 하에서, 어떤 기관아니 개인도 독립한 권력으로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 사법권의 행사는 정부 관료가 아니라, 시민 배심원이 우선적으로 행사하기 때문이다. 3권분립의 개념은 권력을 대리하는 정부 기관 및 관료들 간에 성립한다. 그러나 주권자로서의 시민이 행사하는 배심재판은 입법부를 초월하며, 그 판결은 반드시 법률에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라, 법률을 무시하기도 한다. 주권자가 행사하는 권력은 절대적인 것이고, 분립의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  

 

조선일보는 사법권 독립 운운하지만, 세상에 사법권이 독립한 데는 없다. 독재체제에서도 사법권은 독재권력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지 독립해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 아무 데도 없는 주장이 한국에서 횡행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이 비민주적인 상태에 있다는 반증이다. 사법권 독립의 주장뿐 아니라, 걸칫하면 여기저기서 들고나오는 ‘통합’의 원리도 그와 같다. 한국은 세계에 보기 드문 ‘통합’ 지향의 국가이며, 이 또한 식민지배와 독재정권의 잔재라 할 수 있겠다. 

 

정세균(전 국무총리), 정대철(대한민국 헌정회 회장), 엄경영(시대정신연구소장), 신율(명지대 교수) 등, 이른바 정치원로와 국힘당이 한목소리로, “국힘 ‘계엄의 강’ 건너고 민주 ‘내란 프레임’ 끝내야”, “양 진영 모두 계엄 1년을 맞아 태도 변화가 필요하다”, “처절한 사죄와 반성으로 '윤석열 계엄 사태'에 대한 종지부를 찍어야 하고, 정부·여당의 경우, 계엄을 단죄하는 일에만 주력하는 것에서 벗어나 국민통합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등 취지의 입장을 천명했다.(뉴스1 2025.11.30.) 

 

‘통합’의 개념도 다 같지 않다. 한편에 여야 통합이 있고, 다른 한편에 국민통합이 있다. 양자는 다른 것인데, 정세균 등 위정자들은 여야 간 정치권 통합(화합)을 국민통합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여야가 분쟁하지 않고 (짬짜미)하면, 그것이 곧 국민통합인 줄로 착각한 것이다. 

 

이런 착각은 정세균만의 잘못이 아니다. 이른바 정치 원로 몇몇이 나와 통합 운운하는 것은 권력이 여전히 소수의 손에 집중된 현실의 반증이기 때문이다. 권력을 가진 여야 정치인만 화합하면, 그것이 마치 국민통합이 된 것처럼 포장되는 것은 정세균류의 통합, 독재를 국민 통합으로 포장하는 것은 윤석열류의 통합이다. 

 

이재명류의 통합도 있다. 이른바 민생과 실용을 도모함으로써 전 국민통합을 이루자는 것이 그러하다. 이것은 내용에서 차이가 없지 않다고 하겠으나, 형식에 있어서는 정세균류, 윤석열류와 공통점이 없지 않다. 국민의 뜻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고, 그 뜻이 추정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권력구조적인 문제이다. 국민을 수동적 존재로 설정한 권력구조는 자칫 권력의 독주, 더 나아가 정권의 교체로 인해 다시 더한 질곡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잠재적 위험성을 안고 있는 것이다. 조선일보가 감히 사법권력의 ‘독립’을 외치며, 헌법 101조를 왜곡하여 사법부가 법원 행정 및 법관 인사권을 행사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행태는 어떤 권력도 국민 민중을 상회하는 권력이 없다는 점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망각의 관성은 변죽에서 들러리 서고 있는 국민 민중의 제도화된 침묵에 기인한다.

 

여기에 민생의 도모와 함께 두 가지 작업이 병행 혹은 선행되어야 하겠다. 첫째, 통합 아닌 각종 지역 혹은 기관의 분권을 통해 권력의 독주를 예방하는 것, 둘째, 유사시에 국민 민중이 바로 정치적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최후의 보루를 제도화하는 것이다. 그 보루는 국민의 주권을 활성화하는 것으로서, 국민발안 및 현안에 대한 국민투표권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

 

미국의 사례에 빗대자면, 전자는  연방정부를 견제하는 주정부 권력에 해당하고, 후자는 사법관료의 대척점에서 사법권력을 행사하는 시민배심제(혹은 비정규 시민 치안판사제도) 등에서 다소간 유사성을 찾을 수 있겠다.

 

편집: 최자영 객원편집위원.  조형식 편집위원

최자영 객원편집위원  paparuna999@gmail.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키워드

#배심원제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