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가시오 (2010. 3. 11)
안과에 다녀왔습니다. 다향이가 눈이 나빠진 것 같다기에 시력검사를 받으러 다녀왔지요. 날은 춥고, 길은 얼어 있으며 눈발이 날립니다. 자연히 속도를 낼 수가 없습니다. 백미러로 슬쩍 보니 다향이 얼굴에 지루함이 묻어납니다. 그래 이야기를 하나 해줍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자린고비 영감이 한 명 살았는데 아주 대단했대. 뭐든 한 번 손에 쥐면 내놓을 줄 몰랐고, 남의 것은 모두 거저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렸단다. 하루는 그 구두쇠영감이 시장엘 갔는데 한 장사꾼이 갓이랑 잣을 팔고 있는 거야. 자린고비 영감은 그 잣이 먹고 싶었지만 돈을 내긴 싫은 거야. 그래서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가게 앞을 왔다 갔다 하면서 궁리했어. 어떻게 하면 ‘저 잣을 공짜로 먹을 수 있을까?’하고 말이야.

어느 순간, 자린고비 영감이 손뼉을 짝 쳤어. 그리고 잣을 가리키면서 “이보게 저게 무언가?”라고 물었어. 그러니까 장사꾼이 “예, 자시오(잣이오)” 하고 대답을 했어. 그러니까 자린고비 영감이 잣을 담아 놓은 소쿠리 앞에 앉아서 잣을 까먹어.

맛난 잣을 실컷 먹은 자린고비 영감이 이번엔 갓을 가리키면서 또 물어. “이보게 그럼 이건 뭔가?” 하니까 장사꾼이 “가시오(갓이오)” 했어. 그 말을 들은 구두쇠영감이 손을 탁탁 털고 일어나서 가는 거야. 그 모습을 본 장사꾼이 깜짝 놀라서 물었어. “아니 잣을 먹었으면 돈을 내고 가야지 그냥 가면 어떡합니까?” 그러니까 자린고비 영감이 구렁이 담 넘듯 능글대며 대꾸를 했어. “아니, 이보게. 난 자네가 ‘자시오(잣이오)’ 해서 먹었을 뿐이고, ‘가시오(갓이오)’ 해서 가는 건데 도대체 뭐가 잘못되었다는 건가? “……?”

다향이가 빙긋 웃습니다. 얘기를 다 들은 다향이가 재미있다면서 말합니다.
“그런데 아빠. 장사꾼이 ‘갓이오’ 하면 자린고비 영감이 ‘무슨 갓이오?’ 하고 물으면 어떨까? 그럼 장사꾼이 ‘그냥 가시오(갓이오)’ 할 텐데.” 다향이의 말을 듣고 한참을 웃었습니다.

△고맙고, 미안해 (2010. 4. 2)
다향이를 나무랐습니다. 어른들의 대화에 툭툭 끼어들어서 말참견을 했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내내 스트로베일하우스(볏짚을 활용한 진흙집) 워크숍에 참여하느라 저한테 신경 써주지 못해서라고 짐작하기에 좋은 말로 여러 번 타일렀습니다.

평생 땅을 가져본 일이 없었습니다. 집을 지을까 하는 참에 워크숍에서 인연을 맺은 분이 땅을 구경시켜준다고 해서 따라다녔습니다. 별일 아닌 것 가지고도 사사건건 부닥치는, 서로의 신경이 예민할 때였습니다. “아빠 금방 다녀올 테니까 집에 있을래?” 했더니 “싫어. 같이 갈래” 합니다.

그래서 셋이 움직였는데 결국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함께한 분과의 대화 도중에 자꾸 말을 잘라먹습니다.
“아빠. 카프라로 큰 배를 만들고 싶어.”
“아빠, 이 딱지가 제일 멋지지 않아? 이게 전투력이 가장 센 딱지야.”
대화와 전혀 상관없는 얘기로 끼어듭니다.

저한테 관심을 가져달라고, 심심하니까 놀아달라는 것인 줄은 알면서도 화를 내고 말았습니다.
“다향아 지금은 어른들이 중요한 얘기 중이니까 조그만 기다려 줘.”
안내해주시는 분과 아직 친밀해지기 전입니다. 그래서 몇 번을 부탁했는데도 일부러 어깃장을 놓듯이 합니다. 그래 결국은 목소리가 높아지고 말았습니다.
“오다향,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어른들이 얘기할 때는 끼어들지 말라고 했잖아. 그랬어? 안 그랬어?”

잠자코 듣습니다. 아빠 목소리가 높아지니까 고개를 떨어뜨린 채 조용합니다.
“사람들이 얘기할 때 잘 들을 줄 아는 것도 귀한 재산이라고 했잖아. 말도 잘하게 되고. 그랬어? 안 그랬어?”
“그랬어.” 다향이가 풀죽은 목소리로 겨우 대답합니다.

아! 거기까지만 해야 했는데 화를 꾹꾹 눌러두었던 터라 더 나가고 말았습니다.
“너 하고 아빠는 하루 24시간 붙어 지내니까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고 했잖아. 이게 서로를 배려하는 거야? 집에 있으라고 하면 있을 것이지 왜 따라다니면서 괴롭혀?”
“…….”
“그렇게 네 주장만 하면 우린 지금처럼 지낼 수가 없어. 방법은 하나, 기숙사가 있는 대안학교에 다니는 것뿐이야. 이따가 집에 가서 여행 가방에 네 짐 다 챙겨.”
“…… 알았어.”

마지못해 대답하는 다향이의 얼굴 위로, 가슴께로 눈물이 뚝뚝 떨어집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후회가 됩니다. ‘또 너무 나갔구나? 못난 아비가 저를 쫓아낸다고 생각할 텐데.’

집으로 돌아와서 사과를 합니다.
“다향아 미안해. 아깐 아빠가 너무 화나서 실수했어. 하지만 너도 잘한 건 없으니까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자.”
다향이가 많이 서러웠는지 꺽꺽 울음을 삼키면서 품안에 안깁니다.

흙집 짓기에 참여한다고 함께 놀아주지도 못했습니다. 요리대회에 나간다고 몇 주나 몸국만 끓여대도 불평하지 않고, 잘 먹어주는 고마운 딸인데 왜 그랬을까요? 이럴 때마다 아빠로서의 자격이 있는 건지 회의감이 들곤 했습니다. ‘다향아! 미안하고 고맙다.’

△손 잡아주는 다향이 (2010. 5. 20)
2010년 4월 23일은 아마도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다향이가 처음으로 생리를 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학습한대로 성대한(?) 파티를 해주려고 했지만 심각하고 예민해진 다향이의 기분저하로 그만뒀습니다.

축하 꽃다발과 케이크라도 준비하고 싶었는데 함구하라는 다향이의 말에 입에 지퍼를 채웠습니다. 조금씩 어른이 돼 가는 것 같습니다. 그냥 어린아이에서 살금살금 여자로 변신 중입니다.

나이 대여섯 살까지도 응가를 하고 나면 “아빠 똥” 하면서 뒤처리를 하라고 엉덩이를 내밀던 녀석이 툭하면 방문을 딸깍 걸어 잠급니다. ‘딸깍’ 소리를 들을 때마다 조금씩 멀어져 감을 느낍니다. ‘딸깍’ 한 걸음, ‘딸깍’ 두 걸음, ‘딸깍’ 세 걸음…….

이성적으로는 당연한 것이라 여기지만 마음 한켠의 섭섭함은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다향이와 함께 목욕탕에 다니는 걸 그만뒀을 때도 상실감이 컸습니다. 본디 답답한 걸 싫어하는지라 사우나를 좋아하지 않지만 아이랑 노는 재미에 다닌 것인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아내가 다향이랑 사우나에 가겠다고 하면 바래다주고, 차 안에서 책을 읽거나 어슬렁거리면서 산책을 합니다.

무덤덤한 엄마랑 점점 친해집니다. 더 늦기 전에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마음 한켠의 섭섭함은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나들이를 할 때마다 다향이가 손을 내밀어서 내 손을 꼭 잡고 걷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손을 꼭 잡고 걸을 때마다 오동통한 고사리손의 감촉과 체온이 참 좋습니다. 이것도 얼마 누리지 못할 호사겠지요?

오성근 주주통신원  babsangm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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