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0년 최성일 아버지

[은빛자서전]의 주인공 최성일 아버지(출처 : 김경희 시민기자)
[은빛자서전]의 주인공 최성일 아버지(출처 : 김경희 시민기자)

각혈(咯血)하듯이 살아오지는 않았지만 전쟁과 현대사의 파도를 넘나드는 역사의 소용돌이 한편에 나의 호흡도 품을 더했다. 산업역군으로도 36년의 세월 속에서 무명인이었지만 가족을 건사하고 사회의 한 귀퉁이에 벽돌 한 장 올렸다. 세상의 무수한 유혹과 탄식들에서 지켜진 나의 삶이 승자가 획득한 전리품이기보다 묵묵히 인생길을 걸어온 범인(凡人)의 열매이기를 바란다. 

불과 며칠 전까지도 잔설(殘雪)이 산자락 끝에 홀연히 존재를 지키고 있어 우리는 지난 겨울의 이야기를 기억한다. 나의 인생도 사계절을 다 지나왔다. 얼마나 더, 붉은 진달래의 향연으로 호사를 누릴 봄맞이를 할 수 있을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회한도 슬픔도 응어리도 남지 않은 것은 순종의 여정 속에서 살아온 귀한 열매이기도 하다. 이제 여한이 없다는 말을 건네준 앞선 이들의 말의 진위와 깊은 속내를 알 것 같다.

■ 방앗간 집, 인정의 허기를 채워주다 

태어나기는 1940년 함흥에서 5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최성일이라는 이름은 항렬에 맞는 돌림자와 첫째라는 의미로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이지만 돌아보면, 살아오며 겪는 모든 일에 한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사리에 맞게 이루며 살아가라는 뜻으로 생각된다. 본관은 경주 최가이다. 부모님께서는 함경북도에서 태어나 사시다가 해방 이후 내려와 서울에 정착하셨다. 함경남도 함흥에서 교직 생활을 하시던 아버님은 대대로 양반인 집안의 상당한 지식인이셨다. 특유의 꼿꼿한 성정과 현명함으로 이주 초기의 어려움을 극복하셔서 내가 태어날 즈음에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편이었다. 물론, 모두가 어려운 시절이었으니 상대적이긴 하다.

직원이 30여 명에 이를 정도로 엄청나게 넓은 쌀 창고를 포함, 꽤 큰 규모의 도정공장(방앗간)을 운영하시던 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은 남들이 모두 겪는 배고픔과 곤궁함을 겪지 않아도 됐다. 사업을 운영하시는 한편으로, 부족한 교육 시설을 대신하는 야학의 선생님으로도 활동하시던 아버님은 주위의 존경을 받으셨다. 굶주린 이웃을 모른 체하시지 않았을 뿐더러, 지역 사회의 크고 작은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 많은 선행과 활동을 베푸시는 어른이셨다. 그 덕분에 어린 나와 형제들도 별다른 어려움 모르고 자라는 한편, 자연스레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과 배려하며 사는 공동체 정신을 지니게 되었다.

자식에게 헌신적인 어머니는 어떻게든 사회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게 하려는 한마음으로 공부를 하게 하셨다. 1938년생인 큰 누님이 사범학교를 나와 교사 생활을 하신 것만 보아도 어머니의 교육열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어머니는 당연한 듯, 나에게 두세 개의 도시락을 매일 싸서 들려주셨다. 혼자 먹을 수 없는 도시락이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보이지 않는 아이, 맹물로 배를 채우기도 하는 친구들의 도시락을 함께 챙겨주신 것이다.

나 또한 우쭐하지 않고 나눠 먹는 것이 이치이듯이 친구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남의 자식까지 챙기는 어머니의 깊고 따뜻한 마음은 흉내조차 낼 수 없어 온통 그리움으로 남았다. 인정이 살아있던 시절이라 궁핍한 일상을 겪으면서도 마음이 폐허가 되지 않았다. 지금에 비하면 견줄 수 없이 마을은 초라하고 입성과 먹거리 또한 부족한 시절이었지만 친구들을 비롯한 이웃들의 심성은 순박했다. 하...그리운 시절이다.

스스로 밝히기 좀 쑥스럽지만 학교에서 가르치는 모든 과목이 무척 재미있어서 성적도 늘 좋게 나와서 집에서도 믿음직한 장남의 싹수가 있다고 칭찬을 받았다. 정확하게 바뀌는 계절마다 빛깔과 색감을 바꾸는 자연과 더불어 꿈처럼 어린 시절이 흘러갔다. 동족 간의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 다시 없어야 할 전쟁의 상흔

두말할 필요 없이 전쟁은 무섭고 참혹한 것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인 나에게도 당혹스럽고 두렵기만 했으니 내 아래로 연이어 매달린 동생들은 물론이고, 어린 자식들을 건사해야 하는 부모님의 심정은 더 말할 나위 없이 애끓었다. 저마다 몸에 지닐 수 있는 살림살이를 이고 지고 문경새재 고개를 넘어 경상북도 화산(의성군)까지 피난길에 올랐다.

자산가이며 교육자 출신의 지식인인 아버지께서는 더 멀리 부산으로 혈혈단신 떠나시고 모두가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식구 많은 피난 가족의 하루하루는 참으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 

그야말로 비렁뱅이 신세가 되어 그나마 장남인 나는 동생들을 이끌고 문전걸식을 일삼아 다녀 찬밥 몇 덩이, 나물 한두 가지를 얻어 굶주린 배를 달래가며 3개월 동안의 피난 생활을 하다가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동생이 토사광란을 만나 옥천에 잠시 머물게 되었는데 바로 이동할 수 없어서 눌러앉게 되었다. 우리에게 내일을 알 수 없다는 건 운명이란 이름으로 포장을 해도 두려운 일이다. 

아버님은 서울집에 가셨다가 물어물어 옥천으로 오셔서 아버님이 돌아오신 날은 식구들 모두 부둥켜안고 통곡을 했다. 지금 생각해도 아버님이 옥천으로 우리를 찾아 오신 것은 기적이라는 말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돌아가신 아버님이 살아오신 것처럼 감격이 밀려왔다. 매일이 살얼음 판이라 생과사를 넘나드는 일상이 먼 이야기가 아닌 그날그날의 숙제였다.

여든 넘은 노인의 과거사가 뭔 의미가 있겠냐고 폄하될 수도 있지만 우리의 ‘하루’가 그토록 귀하고 아껴야 한다는 말을 후대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우리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대한민국, 그래서 좀 더 간절하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들이 모이기를 바란다.


■ 우리의 땀방울이 모여 일군 나라 

전쟁 후라 유년시절의 영화를 다시 찾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아버님이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내려오시면서 목돈을 준비하셔서 아버님은 영동과 왜관을 오가며 미군부대를 기반으로 부식사업을 하셨다. 부모님 덕분에 대학공부까지 했으니 내 또래의 삶의 여건에 비한다면 기회를 많이 얻은 편에 속한다. 대학공부까지 했고 서울에서 00건설에 취업을 했다.

그 무렵 어머님이 폐암에 걸리셨고 피란길에서 토사광란으로 우리가족을 옥천에 머물게 했던 동생이 오랜 지병이었던 위암으로 숨을 거두면서 나는 가장이 되어 있었다. 지금은 암보험이 즐비하니 암에 걸려도 치료비 걱정을 크게 하지 않아도 되지만 4-50년 전에는 암이라는 말만 들어도 암이 걸릴 정도로 무서운 병이었다. 당연히 치료비도 생활을 위협하는 정도의 거금이라 보통의 가정에서는 암환자 있으면 집안이 쑥대밭이 되곤 했다.

유교적인 정서상 가족의 치료를 방관하면 몹쓸 인간이 되어 가산을 탕진해도 환자를 살리곤 했다. 나 또한 가장의 역할을 하느라 한창 중동 붐이 일 무렵 사우디에 다녀왔다. 가정경제도 일으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당시 일반회계 업무를 보고 있었지만 서둘러 현관문 조립하는 기술을 배우고 사우디 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먼저 다녀온 분들이 찜통처럼 덥다는 말로 더위를 설명해서 마음의 각오는 되어 있었지만 공항에 내려 비행기 문이 열리자마자 바로 후회가 밀려왔다. 유난히 더위를 잘 타서 여름에 펌프로 퍼올린 지하수로 등목 없이는 살 수 없던 나인데 그 더위를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 두려움부터 앞섰다.

첫날부터 구토와 설사를 달고 살면서 귀국하라는 권유도 많이 받았지만 2년을 꼬박 채우고 집 한 채를 살 돈을 마련해서 돌아왔다. 사나이 자존심이 있어 죽을 힘을 다해 참았던 시간인데 살아오면서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그 때를 떠올리며 견뎌낼 수 있었다. 모두 가족을 위해 고생하고 그것이 당연한 줄 알았던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그 시절의 우리들이 지금의 우리나라를 만드는 데 벽돌 한 장 놓은 것은 분명하다.

고국에 와서 대전에 작은 건설회사를 차리고 건설경기가 좋을 때 호황을 누렸다. 다세대 주택을 셀 수 없이 짓고 그 덕분에 5남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책상에 사장이라는 명패만 놓았을 뿐 나도 건설노동자들과 같이 아침 6시부터 벽돌을 날랐다. 같이 땀흘리며 고생한 식구가 되어 일의 진척도 빨랐고 성과도 좋아서 작은 회사였지만 30년을 꾸준히 일해왔다. 

30년간 건설회사를 하고 60살에 은퇴한 후에 다시 옥천에 내려와 시골생활을 하고 있다. 80이 넘으니 튼튼한 다리가 제일 큰 효자다. 돈이며 학벌이 무슨 소용이냐. 잘 걷고 잘 먹을수 있으면 최고의 삶이다. 살아보니 멀리 보면 인생이 평균점이 있어 누구나 한번은 죽도록 괴롭고 한번은 파안대소하는 날이 분명있다. 남의 떡이 커보이느라 내 삶을 평가절하 하곤 하지만 그저 나답게 사는 것이 최고의 선이다.

1940년대 생이니 나는 운이 좋아 상급학교 공부를 계속 할 수 있었지만 내 동년배 친구들은 중학교도 간신히 졸업하고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사회에 나가게 된 친구들도 많다. 허나 지금은 그 친구들 중 나보다 더 건강하고 나보다 더 큰 부를 이루어 어려운 사람들도 큰 손으로 도움을 주는 친구들이 많다. 결국, 내 삶의 주인공은 나다.

■ 쇠락해가는 몸은 자연의 섭리 

먼 미래를 꿈꾸다 오늘을 놓치지 말고 오늘을 알차게 보내는 것이 이치에 맞다는 생각이다. 작은 밭을 일구고 고구마도 심고 블루베리 체리나무를 심어서 가꾸고 있다. 자연의 섭리가 크게 다르지 않아 정성을 들이면 잘 자라는 이치는 같다. 농사기술은 없지만 그저 새끼 키우듯이 보살폈더니 한 해 두 해 성장의 기쁨을 맛볼 수 있게 해준다.

무릎이 안 좋아져서 올해부터 농사를 할 수 없어 아들한테 주말농장으로 맡겼지만 산업역군으로도 30여년 일했고 20여년 농사꾼으로 사회의 한 축을 담당했다. 무위도식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특별히 대단한 결과를 내지 않았지만 80년 아낌없이 썼고 자식농사도 평균점수보다 높고 내 자신의 점수도 80점은 된 듯하니 이만하면 족하다.

다리가 불편한 아내가 된장국을 끓여주고 전화벨소리 울릴 일이 없어 그윽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어 이만하면 신선이라 해도 흠 잡힐 일이 없다. 몸은 쇠락해가지만 자연의 이치로 받아들였으니 서럽지 않다. 그저 조용히 아침마다 종이 신문을 읽고 한나절을 보내면서 살살 텃밭을 돌며 밭에서 키우는 새끼들을 돌아본다.

텃밭에 자리를 튼 녀석들의 숨소리가 거친지 평온하지 귀를 기울이면 거짓없이 나에게 알려준다. 때때로 부모를 찾는 자식들이 있으니 억울할 것이 하나도 없는 여여한 일상이다. 지금은 작정하고 쉬는 때라 세상의 흐름에 끄들리지 않고 그저 시골노인으로 조용하게 살아가는 날들이 주는 평온함이 다른 무엇보다 일상의 우위를 점한다.

아내가 끓여주는 된장찌개를 먹고 햇살이 부서지는 창가에 앉아 잠시 졸음이 찾아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졸음을 따라 낮잠 속에서 열 살 사내아이가 되어 아주 오래전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된장찌개를 식구들이 밥상에 둘러앉아 먹던 그때로 찾아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김치를 쭉 찢어 내 숟가락위에 올려주시는 어머니의 얼굴, 토사광란으로 힘들어 하던 동생의 하얀 얼굴까지 보이면 그날은 횡재한 날이다. 아, 그리운 사람들!

출처 :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

※ 이 기사는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하성환 편집위원

김경희 시민기자  minho@okinews.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