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차이나타운’으로 수다 떨기

일영(김고은)이 의식을 치른다. 죽은 엄마(김혜수)가 하던 대로다. 향을 피우고 잔을 채워 고시레를 한 후 삼배하고 잔을 들이켠다. 엄마처럼 엄마를 죽이고 그 자리를 이었음을 알리는 마지막 장면이다. 앞세대를 선(善:너나없이 유리함)하게 뛰어넘은 살부(殺父) 정신은 없다. 쓸모 있는 엄마상(相&像)을 기리며 자신을 다잡는 데 기일(忌日)은 맞춤할 뿐이다.

‘쓸모’ 여부는 영화의 흐름을 주도하는 키워드다. ‘쓸모 있음’에는 막되게 돈벌이를 할 악바리 근성이 필요조건이다. 어린아이였지만 내달리던 차에서 낯선 길에 던져진 후 엄마에게 돌아왔던 일영(버려진 사물함 번호 10에서 따옴)이 그 예다. 그렇게 선발돼 동거하면 식구다. 누나고 오빠라 부르지만, ‘너, 내 식구냐?’는 엄마 물음에 답할 수 없다. 식구지만 진짜 식구는 아니다.

‘엄마’는 보스에 대한 거짓 일컬음이다. 제도권 권력과 협업하는 범죄 조직의 눈속임이다. 영화에서 보스의 모계(母系) 집권은 여자가 남자보다 더 비정할 수 있음에 대한 묵인이다. 쓸모를 중시하는 엄마는 인간도 짐승도 아닌 괴물을 사육한다. 괴물만 있어야 조직이 건재하다. 일영처럼 채무자의 인간성에 이끌려 돈벌이를 방해하면 가차 없이 아웃이다.

영화에서 괴물은 외롭다. 괴물의 정체성으로만 기능해야 한다. 갈등이 눈에 띄면 장기 적출감되므로 누구에게든 무슨 일로든 연민이나 주저함을 내색하면 안 된다. 당연히 세밀한 감정 표현을 배울 기회조차 없다. 감정이 폭발하면 ‘씨~발’이나 ‘씨~~~발’을 외칠 뿐이다. 그러나 엄마의 표정은 감정이 없어 늘 무색이다. 어조조차 잔잔한 엄마는 더 외롭다.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아버지를 닮는다. 존경과는 거리 먼, 부지불식간에 그 언행을 습득한 수동성이다. 일영은 엄마를 죽이면서 엄마를 닮기로 마음먹는다. 막된 조직에서 내심 후계자로 점찍은 일영에게 자발적 죽임을 당한 엄마의 복은 선견지명 덕이다. 일영이 버려졌던 사물함에 입양한 서류를 넣어둠으로써 엄마는 일영이 괴물의 탯줄, 즉 보스임을 밝힌다.

인간 의식은 몇 겹이다. 맨 아래층 무의식이나 아뢰야식에는 드러나지 않은 잠재요인이 씨앗처럼 내재해 있다. 어느 씨앗에든 물을 주거나 햇볕을 쐬는 노력을 하면, 선한 또는 비선(非善)한 행동이 발현될 수 있다. 일영의 탈선은 잠재한 선한 씨앗이 태동한 탓이다. 엄마는 그것을 눈치채고 괴물성을 강화되도록 사건을 엮는다. 괴물은 환경의 산물이다.
 
김혜수는 엄마 역할에 빙의(憑依)한 듯하다. 그녀의 고요한 카리스마에 녹아든 불특정다수의 괴수(魁首)가 생길까 걱정한다. 생계형 범죄가 속출하는 현실에서 약을 먹고 일하는 외곬 괴물(조현철)이 많아질 수도 있다. 이런저런 괴물에게 짓눌려 몸조차 굳어 아프다. 그러나 나도 너다. 내 텃밭(아뢰야식)에 너(괴물)도 있다. 너를 반면교사(反面敎師) 삼아 너를 억제할 선한 씨앗들을 부지런히 활성화해야겠다. 마음먹으니 전혀 무섭지 않다.

김유경 주주통신원  newcritic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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