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사랑 H를 생각하며

필경에는 하고 넘어가야 하는 얘기가 있다

무거운 안개구름이 밀려들어

귀밑머리에 젖어도

한번은 꼭 해야만 되는 얘기가 있다

잠든 나귀 곁에 앉아서

나귀의 귀를 닮은 나뭇잎으로

밤바람을 깨워서라도

그래서라도 꼭은 하고 싶은 그런 얘기가 있다

 

   - 김태형, ‘당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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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에게

우리가 헤어진지도 서른 해를 훌쩍 넘었습니다.

아니 ‘헤어졌다’고 말한 것은 정정하지요. 그건 단지 내 소망일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좋아한 적도 없었습니다. 나만이 당신을 몰래 좋아했지요.

처음 만났던 그 때, 신록은 참으로 풍성했습니다.

창문 바깥으로 햇볕에 반짝이는 플라타너스의 잎사귀들이 넘실거렸지요.

당신은 그 신록보다 빛났고, 신록을 키워낸 햇살보다 찬란했습니다.

당신은 무척이나 아름다웠지요.

단언하지만, 나는 당신보다 더 예쁘고 매력적인 사람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쉬익거리는 소리와 불꽃들이 멈추지 않던 그때,

교정 곳곳의 핏자국이 쉬이 마르지 않던 그때, 

하필 당신의 사랑을 얻고 싶었을까요.

우리 모두는 말을 잃었고, 흔적들은 배고픈 들짐승처럼 어슬렁거렸기에.

겁먹은 나는 당신 앞에서 '떳떳이' 무엇이라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리운 H,

깨어난 밤바람이 그 시간으로 다시 데려갈지라도,

나는 당신에게 고백하지 못하겠지요.

나도 그 때의 내가 아니며,

당신 또한 그 때의 당신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하고 싶었던 얘기'만 오래 남아

마음을 끝내 붙잡겠지요.

이제 당신의 귀밑머리에도 안개구름이 맴돌고 있을까요.

내내 건강하길,

그리고 행복하길 바랩니다.

      - 2020년 7월, '당신 생각'을 읽다 당신을 생각하며

              

편집 : 박효삼 객원편집위원       

김해인 주주통신원  logca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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