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이 세상을 바꾼다』(오준호)를 읽고

최근 다단계발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하고 있다. 대부분 노인들이다. 이들에게 기본소득이 주어졌다면 어땠을까? 많이 다른 결과가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자살률도 그렇다. 우리나라는 세계 자살률 1위 국가이다. 자살의 원인은 경제적 어려움 때문인 경우가 많다. 취업이나 교육 문제로 인한 자살도 궁극적으로는 경제적 문제로 귀결될 것이다. 국민소득은 오르는데 경제적 문제로 인한 자살률이 줄어들지 않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경제적 불평등이 더 심화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경제적 불평등을 보완하기 위해 복지수준을 높여가고는 있지만 아직 저소득층의 방을 따뜻하게 해주지는 못하고 있는 듯하다.

『기본소득이 세상을 바꾼다』에서 오준호는 “한국의 복지제도는 스스로 신청하지 않는 대상자를 애써 찾아내서 지원하지 않는다. 수급권을 얻으려면 신청자는 자신이 얼마큼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지, 자신의 ‘불쌍함’을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신청자는 모멸감을 느끼고 자존감을 잃는다. 복지를 권리가 아니라 남부끄러운 일로 여기게 된다.”고 지적했다. 또한 한국의 복지제도는 낙인효과는 물론 ‘빈곤의 덫’이 되기도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언제든 잘릴 수 있는 저임금 비정규직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적으나마 안정적으로 제공되는 복지 혜택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이처럼 한국의 복지제도는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오준호는 그 대안으로 기본소득제를 제안하고 있다.

 

“기본소득은 첫째, 자격심사가 없다. 따라서 복지 사각 지대가 생기지 않는다. 둘째 시민의 보편적 권리로 주어진다. 가난한 사람만 골라 주지 않으므로 낙인효과가 없다. 셋째 일로 해서 추가로 노동소득이 생기더라도 기본소득 지급은 중단되지 않으므로 ‘노동소득이냐 기본소득이냐’의 딜레마를 겪지 않는다. 넷째 기본소득은 사람들의 소득‧자산‧부양가족을 확인하라고 요구하지 않고 부정 수급자를 찾아내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기본소득은 낭떠러지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그런 일 하면 너 굶어죽기 딱 좋다’ ‘너 그러다가 잘린다’ 같은 말에 주눅 들 필요가 없다. 돈 때문에 원하지 않는 일을 꾸역꾸역 하고 부당한 대우도 꾹 참아야만 한다면, 그것이 감옥이 아니고 무얼까? 기본소득이 있으면 우리는 미지의 일에 과감히 도전할 수 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에 ‘노No’라고 말할 힘이 생긴다. 기본소득은 우리로 하여금 삶을 되찾게 해준다.”

 

이 책을 가지고 독서토론모임을 하는데 한 어머니께서 “기본소득제도가 진즉 시행되었더라면 아들이 그렇게 가고 싶어 하던 심리학과를 말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여 그 필요성을 절실하게 토로하였다.

기본소득의 필요성에 대한 근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어쩌면 앞의 이유보다 더 절실한 이유가 될 수도 있다. 사회 구조가 급격히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대량생산‧대량소비‧완전고용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과거와는 사정이 완전히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성장할수록 고용이 줄어드는 사회로 변화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은 컴퓨터와 인간의 지능이 같아지는 해를 2029년으로 잡고 있으며, 2045년이면 컴퓨터가 인간보다 수십억 배 똑똑해지리라 본다. 앞으로 20년 후에는 지금 인간이 하는 일은 거의 모두 기계에게 맡겨도 된다는 뜻이다. 일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데, 또 굳이 모든 사람이 풀타임으로 일하지 않아도 사회를 충분히 유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노동윤리만 망령처럼 버티며 ‘취업해서 밥벌이를 하는 것은 너의 의무다’라고 고집스럽게 말한다.”라며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노동윤리는 이제 그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본소득이 생기면, 사회적 가치도 없고 보람도 적은 일을 단지 보수 때문에 하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으로 옮겨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이윤의 사회 환원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 분야도 활성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기본소득이 개인의 삶의 질을 높여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어느 정도 경제적 평등이 보장되는 사회가 경쟁이 극심한 사회에 비해 행복지수가 훨씬 높고 공동체성이 높은 것으로 보아 매우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 할 만하다.

그런 의미에서 기본소득은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에 대해 보상해주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이 앞으로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선택해서 할 수 있도록 소득을 보장해주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 또한 탁월하다.

그는 존 롤스가 『정의론』에서 밝힌 ‘실질적 자유와 평등의 추구를 위한 새로운 정의의 원칙’을 제시하며 각자의 각성을 호소하기도 한다.

 

“먼저 ‘무지의 장막’을 설정한다. ‘무지의 장막’은 그 장막을 걷고 나갔을 때 자신이 어떤 능력, 어떤 환경에 처할지 전혀 모르는 상태이다. 자신이 장차 남자일지 여자일지, 부자일지 가난한 사람일지, 장애인일지 비장애인일지 모르는 상황인 원초적 입장에서 앞으로 내가 살아갈 사회의 원칙을 다른 사람들과 합의하여야 한다. 이 상태에서 롤스는 우리가 두 가지 정의 원칙에 합의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원칙에 대해서 적어도 이성적으로는 누구도 반대의 손을 들지는 못할 것이다. 자신의 출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초능력자가 아니라면 말이다.

내 눈길을 강력하게 끄는 구절은 또 있다. ‘취업이 개인과 사회의 주요한 목표가 되지 않는 사회라면 학교 교육도 더 이상 취업을 목표로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학교는 자기를 들여다보는 법, 타인을 사랑하는 법, 공적 문제를 이해하고 참여하는 법을 가르치고 배우는 공간이 될 것이다.’라고 기본소득은 교육의 패러다임도 전환시킬 것이라 예측한다. 충분히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실제 우리 교육의 심각한 문제는 경제적 차별이라는 사회구조에서 비롯되는 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이 주어진다면 경쟁교육, 사교육비 지출은 많이 완화될 가능성이 높다.

저자는 마지막 소망을 얘기한다.

“빈곤과 불평등의 거대한 벽에 도전하려는 책임감과 포부를 지닌 정치세력이 나와야 한다. 기본소득 보장과 노동시간 단축 그리고 복지혁명이라는 ‘현실 가능한 유토피아’를 대안으로 내걸고 국민을 설득하는 그런 정치세력을 보고 싶다.”

아마 실현 가능성의 관건이 되는 대목이라 하겠다. 기본소득을 실현시킬 만한 정치세력이 나와야 한다는 것에 동감한다. 그런 정치세력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나와 당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며 글을 맺으려 한다.

 

편집 : 박효삼 객원편집위원

 

이현종 주주통신원  hhjj5599@hanmail.net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