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누구나 보람되었던 일이나 후회되는 일이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렇다.
난 자라면서 마을 어른들의 이쁨을 받고 자랐다.

그래서였는지 20이 갓 넘은 나이에 마을 회의에 불러서 보고 배우라고 했으며, 크고 작은 행사 등에도 참여할 기회가 참 많았다. 그러다가 70년대 초반에 새마을 지도자라는 큰 감투?를 썼다. 그리고선 계도방송을 하고 마을길을 넓이는 데 앞장서서 일했다.

마을 안길은 3m, 큰 도로에서 진입하는 도로는 5m로 넓혀갔다. 당시로서는 차량이 없는 때라 너무 넓은 것처럼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 도로가 좀 좁게 느껴진다.

▲ 새마을지도자 모자

당시에는 207세대가 사는 큰 마을이었다. 5m와 3m 도로를 합하면 약 8km정도가 되었다. 이 엄청난 일을 어린 나이에 해냈다. 이러한 일을 하는 과정에서 칭찬도 많이 들었지만 비난의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관청에 가면 누구보다 우선이었고 대접?도 받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가식이 없는 순수한 봉사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약 8년 정도 새마을지도자를 하면서 가장 보람으로 생각하는 것은 무학자들에게 우리글을 알게 해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난 부모덕에 우리글은 알고 있었다.

당시 내가 사는 마을에서 7명의 아가씨를 모아 우리글을 가르쳤다. 돈이 없고 장소가 마땅찮아 걱정하고 있었는데 마침 빈방이 하나 있었다. 장소는 해결되었으나 칠판이 없어 합판을 사다가 검정 페인트를 칠해서 칠판으로 사용하였다.

아가씨들은 배우고 싶지 않아서 못 배운 것이 아니라 가난해서 학교에 갈 돈도 없었고 때를 놓친 것도 있었다.

당시엔 전등도 없어 호롱불을 켜 놓고 낮에는 일을 해야 먹고 살 수가 있으니 야간을 이용하여 대략 두 시간 정도 했다. 그때 공부를 했던 사람들이 이제 모두 70대다. 그 사람들이 지금은 그래도 자기 이름정도는 쓰고 산단다.

어려웠던 것은 없었는데, 정작 도와주어야 할 어른들이 저놈이 아가씨들을 좋아해서 저런 일을 한다고 수근 거릴 때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 일을 내 생애 최고의 보람으로 삼고 살고 있다.

가장 후회스러운 일은 30대 초반에 완도군으로부터 대통령상을 받게 되었다는 통지였다. 그러나 나보다 나이가 많은 새마을지도자가 먼저 상을 받게 하고 젊으니 나중에 다시 받게 해주겠다는 말에 그렇게 하라고 했던 일이다. 즉 내가 1등이고 나이가 많은 사람이 2등이라고 했다. 1등을 2등에게 양보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다시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고 나는 지도자를 그만 두게 되었다. 생에 단 한 번도 올까말까 하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 했으니 누굴 탓할 일은 아니지만 두고두고 후회하는 일이 되었다.

이제 나이가 들어 조용히 살고 싶었으나 마을 어른들의 성화?에 못 이겨 다시 마을 이장과 새마을지도자를 또 하고 있다. 길을 넓히고 선착장을 쌓고 지금도 할 일이 참 많다.

나의 지난날을 뒤돌아보니 나만을 위해 산 적이 없었다면 지나친 말일는지 모르지만 그런 것 같다. 내가 이렇게 살았으니 곱게 자란 내 각시가 했을 그 고생을 알고는 있지만 지금까지도 고생했단 말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엄청 힘들었을 농사일과 시할머니, 시어머니, 시아버지, 시누이 그래도 서방이라고 시중을 들었을 내 각시에게 참 미안하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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