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날이 복장이 탔다. 핫뉴스마다 물기를 앗아갔다. 지하실 책장을 훑었다. 널뛰는 마음이 『이매창 평전』(김준형, 한겨레출판, 2013.)을 선택했다. 기생 매창을 그렇게 만났다. 메르스, 메르시~

 

해어화(解語花, 말을 알아듣는 꽃)

본명 이향금(李香今). 조선 중기에 중인 아버지(아전 이탕종)와 관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1573년). 관비(官婢)의 삶은 숙명이었다. 그녀는 관기(官妓)가 되었다. 관아 허드렛일을 하는 수급비(水汲婢)가 아니어서 다행이었을까. 관기는 기역(妓役)을 하는 공물(公物)이었다.

공물은 나라 것이라는 의미다. 나라가 부르면 언제든 달려가야 한다. 노역(奴役 또는 勞役)과 병역(兵役)의 공적 부름 중 지금은 병역만 남은 셈이다. 청문회가 열릴 때마다 병역 기피 시비로 시끄럽다. 예나 지금이나 기득권층은 공물 되기보다 공물 만들기를 좋아한다. 기득권이 나라다.

일반인이 공물로서 병역의 의무를 다할 때, 그래서 병역을 피한 가수 유승준이 입국을 거부당해 울고 있을 때, 청문회를 통과한 병역면제자들은 나라의 국무총리가 되거나 장관이 된다. 공물의 그물망을 빠져나간 그들이 나라가 되어 공물들을 징집한다.

기명(妓名)은 대개 7~8세에 받았다. 기생은 양반들에게 ‘상점의 요강(店中溺缸)’ 같은 존재였다. 보통 50세까지 기역을 감당했다. 행수 기생의 월급이 좁쌀 세 말이나 조 다섯 말이었다. 기첩(妓妾)이 기생의 꿈일 만큼 먹고살기 힘들었다.

부안 관기 계생(癸生), 자(字)는 천향(天香). 춤, 악기, 노래 등을 공연하며 기역을 다하는 중에 그녀는 시기(詩妓, 시를 잘 짓는 기생), 금기(琴妓, 거문고를 잘 타는 기생), 가기(歌妓, 노래를 잘 부르는 기생)로서 명성을 얻었다.

문인들의 ‘해어화’가 되어 차운(次韻)하며 스스로 지은 호(號)가 매창이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관련 시가 실려 있다.

 

떠돌며 밥 얻어먹기를 평생 부끄럽게 여기고(平生恥學食東家)

차가운 매화 가지에 비치는 달을 홀로 사랑합니다(獨愛寒梅映月斜).

고요히 살려는 나의 뜻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時人不識幽閑意)

맘대로 손가락질하며 잘못 알고 있네요(指點行人枉自多).

 

문헌이든 인터넷자료든 참고자료마다 몇 한자나 해석이 다르다. 참 척박한 학문 세계다. 고증의 어려움을 헤아려도 그 차가 너무 심하다. 이 글에 실린 모든 사료 및 해석은 앞의 책 『이매창 평전』을 따랐다.

‘말을 알아듣는 꽃’은 다소곳한 기생이다. 공물은 자기주장을 할 수 없으니까. 기역을 인욕하며 전문기예인의 아리따움을 보여야 한다. 차가운 날에 피는 매화의 인고를 드러낼 수 없어 ‘매창(梅窓)’이다.

대시인 권필은 자신의 문집 『석주집』에 「여자 친구 천향에게 주며(贈天香女伴)」를 실어 매창을 ‘여자 친구(女伴)’라 밝혔다. 최하층 천민인 기생을 수평관계인 여자 친구로 대한 것이다. 양반 아녀자도 남자 형제나 남편과 그렇게 지내기는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빼어난 미모는 아니었던 해어화 매창, 그녀의 매력은 무엇인가.

 

문사 유희경을 파계시키다(1586년 봄, 14세)

42세 시객 유희경은 예법에 밝은 바른생활자였다. 그 나이까지 한눈팔지 않았는데 매창을 만나 파계(破戒)했다. 그가 매창에게 준다고 밝힌 시는 모두 7편이다. 처음 만났을 때 주었다고 알려진 「계랑에게(贈桂娘)」는 그의 문집 『촌은집』에 실려 있다.

 

남쪽 지방 계랑의 이름을 일찍이 들었는데

시와 노래 솜씨가 서울에까지 울리더군.

오늘 그 진면목을 보고 나니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듯하구나.

 

매창은 고작 14세에 최고의 시인으로부터 시재(詩才)를 인정받았다. 함께한 날은 비록 봄날 며칠에 불과하지만, 서울에 있는 그를 그리워하며 그 해 가을에 읊은 유일한 시조가 『가곡원류(歌曲源流)』에 실려 있다. 매창 작품 중 가장 많이 알려졌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하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는구나.

 

두 사람은 매창이 31세, 유희경이 59세 됐을 때쯤 해후했지만 미련 없이 곧 멀어졌다.

사랑하던 순간의 진실은 회상할 만한 애틋한 건더기일 뿐이다. 내가 변하니 임이 달리 보이는 걸 인정한 둘의 정신이 쾌쾌하다. 이 시조에 기대어 회자되는 매창의 지고지순한 열녀 식 사랑 해석은 그래서 억지스럽다.

 

걸물 허균과 교우하다(1601년 7월, 29세~1610년 임종, 38세)

당대 최고의 시 비평가였던 허균은 호색한이었다. 그는 10년 이상 육체관계 없이 매창과 우정을 이어갔다. 매창에게 시재 못지않은 장점이 있다는 증거다.

사람은 하나의 우주다. 기득권층의 문제아 허균은 매창에게 낯선 우주였다. 명기로 알려졌을망정 일개 기생을 고유 인격체로 대하는 대문호와의 사귐은 천지개벽이었을 터..

“허균을 통해 매창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세계를 열 수 있었다. 기생에서 시인으로 새로운 세계에 들어간 것이다. 매창의 시에 드러나는 도가적인 풍모와 불교적인 색채, 그리고 가끔 보이는 허균의 누이 허난설헌(1563~1589)의 시풍, 그 모두는 허균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졌다.”(p.180)

허균이 1609년 1월에 매창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 구절이다. “요즘도 참선을 하시는가? 그리운 정 간절하네.” 편지를 쓸 당시 그는 매창이 관련된 일로 정치적 추문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자신의 힘든 입장을 내색하지 않았다.

그 해 9월에 쓴 편지는 그가 매창을 “하고픈 말 마음껏 나눌 수 있”는 지기(知己之友)로 대함을 보여준다. 처음부터 친구의 감정으로 다가섰으니 중간에 마음을 바꾼 중국의 “진회해”보다 한 수 위라는 자평도 들어 있다.

“봉래산 가을빛이 한창 무르익었으리니, 돌아가고픈 흥을 가눌 길 없네. 낭자는 내가 구학의 맹세를 저버렸다 응당 비웃겠지. 그때 만약 한 생각이라도 어긋났다면 나와 낭자의 사귐이 어찌 10년간 끈끈하게 이어질 수 있었겠나? 이제야 진회해(秦淮海)가 사내가 아님을 알겠네. 하지만 선관(禪觀)을 지님이 몸과 마음에는 유익함도 있지. 언제나 하고픈 말 마음껏 나눌 수 있을지. 종이를 앞에 두니 서글퍼지는구려.”(p.309)

사랑하는 누이를 기려 만든 『난설헌집』에 대해 얘기하고, 다른 여인네들과 달리 특별하게 대했던 매창을 허균은 이후 만날 수 없었다. 정치적 불이익을 감수하고 그는 매창의 죽음을 시로써 애도했다. 「계랑의 죽음을 슬퍼하다(哀桂娘)」는 율시 두 수이다. 그 중 한 수만 옮긴다.

 

오묘한 시구는 비단을 펼친 듯하고 / 청아한 노래는 구름도 멈추게 했네.

복숭아 훔친 죄로 인간 세상에 귀양 와서는 / 불사약을 훔쳐서 이 세상을 떠났네.

부용 휘장에는 등불이 어둡게 비치고 / 비취색 치마에는 향내가 남았어라.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즈음에는 / 그 누가 설도의 무덤을 찾을는지.

 

시에서 허균은 매창을 “설도”에 비유해 그녀를 조선 최고의 여류시인으로 인정했다. 설도(薛濤)는 당나라 최고, 때로는 중국 최고의 여류시인으로 평가받는다.

허균에 앞서 매창에게 설도라는 찬사를 안겨준 이는 전라도 관찰사 한준겸이었다. 그의 문집 『유천유고(柳川遺稿)』 에 실린 「가기 계생에게 주며(贈歌妓癸生)」에서다.

 

변산의 맑은 기운 호걸을 품었더니

규수 천 년에 설도가 다시 있어라.

시와 새로운 노래 들으며 고즈넉한 밤 지내나니

복숭아꽃 가지 위에 둥근 달이 높아라.

 

당대 유명 문사들이 매창을 최고 여류시인으로 인정했다. 까칠한 노류장화(路柳墻花) 행태였으면 아무리 시재가 뛰어나도 그런 존재감을 획득할 수 없었으리라.

매창은 정쟁이 치열했던 임진왜란 전후기를 살았다. 문사들과의 연회 분위기가 늘 밝지는 않았을 터. 유흥을 돋우려면 위로가 먼저니, 그녀는 매창이라는 호처럼 자기를 감춘 채 기역으로써 그들의 아픔을 품었으리라. 그 품어줌이 그들의 원기를 돋우거나 살맛나게 했기에 그들 또한 그녀를 자기들 무리에 두었으리라.

 

거문고와 함께 묻히다(1610년 봄날, 38세)

그녀는 아팠다. 마음이 아프니 몸도 상했다. 죽기 1년 전, 1609년에 지은 「병이 들어」다. 막연하게나마 억울한 소문 때문에 병이 났음을 밝히고 있다. 그 헛소문 때문에 허균도 곤욕을 치렀다.

 

잘못되게 헛소문을 입었는데

도리어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네.

공연히 시름겹고 한스러워지니

병을 핑계 삼아 사립문을 닫으리라.

 

병든 심사를 보다 잘 드러낸 「가을날의 그리움, 병든 상태에서(病中愁思)」다.

 

독수공방 외로워하다 병에 지친 몸만 남아

가난과 추위 속에 40년이 흘렀네.

인생을 살아야 얼마나 산다고

시름 맺힌 가슴에 눈물로 옷깃을 적시지 않는 날이 없는지.

 

그렇게 앓다가 1610년 38세에 매창이 죽었다. 「새장에 갇힌 학(籠鶴)」이 되어 만물이 생동하는 봄날, 그녀의 바람대로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

잘 죽었다, 했다. 8년 더 살았으면 형장의 이슬이 된 허균의 험한 소식을 들었을 테니. 늙고 병든 채 기역으로써 목숨을 부지함도 욕스러웠을 것이다. 그녀의 주검은 현재 부안의 ‘매창공원’ 안에 있다.

생몰연대가 분명한 해어화는 극히 드물다. 매창과 함께 사조(詞藻)를 인정받았던 황진이는 무덤조차 없다. 황진이와 달리 자존심을 숨긴 게 자리이타(自利利他)가 되어 돋보였을까. 매창은 21세기 부안의 문화 상품이 되어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기생 문학의 쌍벽은 그렇게 빛깔이 다르다.

 

매창뜸, 매창집, 매창공원, 매창문화제

매창이 죽은 후 그녀를 기리는 ‘매창 현상’이 발생한다. 그것도 몇 십 년씩 지나면서 계속 이어진다. 17세기 나무꾼, 농사꾼, 사당패, 아전 등에서 시작되어 21세기 일반시민과 관이 주도하는 행사까지 생겼다.

매창은 거문고와 함께 공동묘지에 묻혔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그녀의 주검 주변을 ‘매창뜸’이라 불렀고 자발적으로 묘를 돌보았다. 인근에 온 사당패들은 그 무덤에 제를 지낸 다음 공연을 했다.

1655년 어느 날, 나무꾼과 농사꾼들이 그녀 묘지에 돌비석을 세워주었다. 1668년에는 개암사에서 매창의 시 58편을 묶어 『매창집』을 간행했다. 아전들이 외워 전하던 시들이다.

그녀와 어울렸던 뭇 명사나 문사가 아닌 후대의 낯선 이들이 왜 그녀를 아쉬워할까. 일화는 없이 시만 전해지니, 아전들이 외워 전했다는 『매창집』의 시 58편을 분석해야 할까보다.

기존 돌비석의 글이 닳아 없어지자 1917년 부안의 시인 모임인 부풍시사(扶風詩社)가 ‘명원이매창지묘(名媛李梅窓之墓)’라고 쓴 비석으로 교체했다.

1997년에 부안읍은 ‘문화개조사업’으로 매창이 묻힌 공동묘지를 ‘매창공원’으로 만들었다. 매창의 무덤은 전북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었고, 매창공원 앞 거리는 ‘매창길’이 되었다.

매년 음력 4월 5일에는 부안의 국악인 모임인 부풍율회(扶風律會)가 매창의 묘제를 지내고, 2010년부터는 부안 향교에서 제사를 돕고 있다.

부안군은 2001년부터 ‘매창문화제’를 열어 백일장, 서화전 등 각종 문화행사를 진행한다.

외모를 보고 실망했던 허균이 10년 지기가 되어 아꼈던 해어화 매창! 아마도 그녀는 시기, 금기, 가기로서 프로 정신을 지녔으리라. 프로는 그 깊이 때문에 아름답다. 아름다운 사람은 조용히 머물러도 빈자리가 느껴진다.

간~절하게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 ‘매창 현상’이 아름다운 사람들을 쏟아냈으면 좋겠다.

 

김유경 주주통신원  newcritic21@hanmail.net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