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원작 『소수의견』(손아람, 들녘 ,2010)의 제목을 그대로 땄다. 제작은 2013년, 개봉은 2015년 6월 24일에 했다. ‘용산 참사’를 소재로 한 ‘법정 영화’라서 소문처럼 ‘따’를 당한다? 동네 CGV의 상연시간표는 조조할인(10:20)뿐이었다. 달랑 4명의 관객에 합류했다.

가슴이 약~~간 두근두근했다. 자본과 정치의 야합을 들춘댔자 안 봐도 비디오지만, 혹여 낯선 숨통을 발견할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예상 밖 자막이 먼저 떠올랐다. 영화의 내용은 사실이 아니며, 등장인물도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용산 참사’를 모티프로 했는데...?

영화에서 “소수의견”은 무슨 의미인가? 감독 김성제는 조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영화에서도 소설에서도 '소수의견'은 박재호(철거민, 이경영)에서 판사(권해효)로 끝나는, 양면적이고 중의적인 제목이었다"고 설명했다. 전자가 사회적 약자의 억울함을 하소연한다면, 후자는 강자의 견고한 노회함을 대변한다. 영화는 내심 후자를 조명한다.

김 감독은 ‘국민참여재판’의 "배심원단 9명의 평결을 뒤집는 판사의 판결을 통해서 다수의 감정에 반하는 소수의 결정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용산 참사’, ‘세월호 참사’, ‘메르스 사태’ 같은 “비극이 처리되는 한국 사회의 프로세스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냄비처럼 들끓던 관심도가 ‘피로감’으로 식도록 호도하다가 책임지는 사람 없이 흐지부지 끝내고 마는.

그런데... 불쑥 살맛이 났다. 법정 장면들이 돋아낸 변수들이 세상을 붙어볼 만한 게임장으로 돌아보게 했다. 가진 자(들)일지라도 농간으로써 세상의 흐름을 완전히 장악할 수는 없다. 세상에는 난데없는 변수가 작용하므로 그렇다. 어디로 튈지 모를 ‘사람(들)의 마음’이다. 영화 상영 전에 강제로 시청되는 ‘위대한 나라 대한민국’의 선전이 겨냥하는 것도 그것이리라.

영화에서 법정 공방은 원고 측이 기대 않던 증인 등장으로 반전된다. 여검사(오연아)의 여우 같은 언변과 ‘권력바라기’ 홍재덕 검사(김의성)의 상황 땜질식 악함이 공권력의 ‘죄(인) 만들기’에 성공하다가 실패한다. 회유되거나 겁박당했던 전직 경찰(장영)과 용역 깡패(김형종)가 피고 측 증인으로 나온 탓이다.

심지어 의경(義警)의 아버지(장광)는 자기 아들을 죽인 철거민 박재호(이경영)의 당시 정황을 동병상련으로 헤아리는 발언을 하며 울음을 터뜨려 여검사의 아전인수를 제압한다.

그러나 또 한 번의 반전이 공판장을 술렁이게 한다. 중립 이미지를 유지했던 판사(권해효)가 기득권의 잣대를 휘둘러 징역 3년형을 선고하며 배심원단의 무죄 평결을 거스른 탓이다.

그것은 검사 옷을 벗고 대형 로펌으로 옮긴 홍 변호사(김의성)가 자기를 물먹인 윤 변호사(윤계상)에게 날린 비웃음과 내통한다. 국가 시스템은 박재호 같은 희생자와 알아서 기는 ‘권력바라기’ 봉사자에 의해 앞으로도 문제없이 작동하며 존속할 거라는 역설이다. ‘용산 참사’, ‘세월호 참사’, ‘메르스 사태’ 등을 줄줄이 유발하는 메진 재난관리시스템과 달리 차지다.

영화는 그렇게 가해자와 피해자 양측을 조명하며 현실을 압축해 보여준다. 그래서 답은 있되 길이 막힌 스토리 전개에 집중할수록 더 답답해진다. 의지할 것은, 제 것까지 포함해, 양심뿐인 두 변호사(윤계상, 유해진)가 거둔 작은 승리의 수혜자 박재호가 “저는 죄인입니다”를 공표할 때 공권력의 폭력은 아예 가려진다. 마치 부지불식간에 슈퍼전파자가 된 메르스 환자를 가해자로 몰아 정부의 방역 실패 책임을 묻히게 하는 것과 같다.

답한 세상이지만 ‘요지경 속’은 아니다. 세상은 쌍방향의 변수들을 내장한 채 가해자나 피해자로 서로 얽힌 관계망일 뿐이다. 신문기자 수경(김옥빈)과 윤 변호사가 티격태격하는 입장 차이처럼, 윤 변호사가 살인교사 변론을 맡아 새 차를 구입하는 잠깐의 외도처럼, 그리고 화장실 거울에 비친 홍검사(김의성)의 악역에 대한 찰나적 번뇌처럼 너나없이 변조 가능한 마음밭을 지닌 채 순간순간 선택하며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선택의 바탕은 주인정신이다. 나는 나의 주인이 되어 타자를 대하는 선택으로써 세상의 관계망에 기여한다. 캐스팅된 배우들을 살피면, 선택에 따른 주인정신을 엿볼 수 있다. 장면의 바탕 화면이 되는 리드미컬한 연기 변주로 동료 배우들을 부각시키며 유해진은 공생한다. 좋은 배우들과 함께할 때 자연스레 제 표정을 드러내는 윤계상은 타자에 대한 믿음을 전송한다. 다른 출연 배우들 역시 제 몫의 존재감을 창조하며 영화의 일부로 스며든다.

그렇게 전체는 부분의 합이다. 영화라는 창을 통해 나를 돌아보는 연유다. 영화 <소수의견>이 마지막 내레이션으로 전하는 비극의 미결 처리는 그래서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내 몫도 거기 있다.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는 ‘마음밭 가꾸기’만으로도 ‘위대한 나라 대한민국’의 틀을 제대로 짤 수 있지 않을까.

내 마음밭이 꾸렸을 관계망을 헤아린다.

김유경 주주통신원  newcritic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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