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보은군 속리산에서 600여 년을 버텨온 소나무 정이품송(正二品松)은 자손을 얼마나 뒀을까? 백두산 천지는 얼마나 많은 강의 뿌리일까?

형시억(1900.10.14.-1968.02.17.) 선생은 진주형씨 병사공 형군철(邢君哲)의 17대손이다. 서당 훈장을 하셨다. 병사공파 종갓집(전남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아내미길 27번지)에 딸린 서당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초빙을 받아 다른 동네의 서당에서도 훈장을 하셨다.

▲ 정이품송이 600살을 넘기면서 폭설·강풍 등으로 가지를 잃어 직각 삼각형 형태의 초라한 모습으로 변했다(왼쪽). 오른쪽은 1990년대 초까지 정삼각형 형태의 우아한 자태를 뽐내던 정이품송. 충북 보은군 제공. 한겨레, :2019-04-04.

인격과 학문이 완숙기에 접어든 57세가 되던 1957년 정월에 진주형씨 병사공파보의 서문을 지으셨다. 정자(程子)의 말씀, 공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족보를 만드는 큰 뜻을 설명했다. 또한 족보 간행사업의 기초를 닦은 조상, 즉 1923년 계해보 서문을 지은 형광열(邢光烈), 계해보 간행 과정에서 병사공파의 각종 전거(典據)와 기록을 정리한 형태열(邢泰烈) 등께 늘 감사하고 기억해야 한다는 취지의 글월을 빠트리지 않았다.

이 서문의 번역문은 문단이 모두 여섯 개다. 첫째와 둘째 문단에서 정자의 말씀을 원용하고, 비유적으로 물의 원천론(源泉論)과 나무의 근본론(根本論)을 전개하여 족보를 만들어야 하는 당위성을 설명했다. 셋째와 넷째 문단은 진주형씨의 시조와 족보의 내력, 병사공파보 간행의 불가피성을 설파했다. 다섯째와 여섯째 문단은 기송부족징(杞宋不足徵)의 한탄을 면하도록 족보 간행의 기초를 튼튼히 만든 근수재 형태열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표현했다.

그가 지은 서문의 원문과 음, 번역문은 아래와 같다. 

▲ 자료: <진주형씨파보(병사공파)>, 1957.01.
▲ 자료: <진주형씨파보(병사공파)>, 1957.01.
▲ 자료: <진주형씨파보(병사공파)>, 1957.01.

<번역문>

가문이 족보를 갖춤은 나라가 역사서를 갖춤과 같다. 족보가 없다면, 씨족의 지난날 세대와 현재 세대가 대수(代數)가 아주 먼 후손에 대해서 문헌의 증거를 내세워 밝힐 수 없으니, 어찌 족보를 힘써서 만들지 않겠는가.

대개 시조부터 자손까지 이름난 가문은 씨족이 번성하여 조상을 존중하고 종친을 공경하여 친히 하는 도리가 조금도 빈틈이 없어서 계승하여 서로 전한다. 잘 만들어진 족보는 계통이 명확하다. 그러한 까닭에, 정자가 말씀하길, “성(姓)과 본(本)이 같은 겨레붙이를 거두고 풍속을 두텁게 해야 그 씨족이 이뤄진다.” 정부자의 말씀이 감흥을 일으키지 않겠는가. 자손에게 시조가 계신다는 것은 물은 그 나오는 샘이 있고 또한 나무가 뿌리를 둠과 같다. 옛 말씀 역시 그렇게 이르지 않았던가. 나무가 양분을 잘 받으려면 뿌리는 아주 튼튼하고 가지와 잎이 무성해야 한다. 물이 힘을 받으려면 샘물이 콸콸 솟고 물의 흐름과 갈래가 길어야 한다. 뿌리가 불어나면 나무가 제대로 잘 버텨 서고, 샘물이 청결하면 그 흐름이 길어진다. 그러한 이치를 가히 알 만하다.

곰곰이 살펴보니, 1808년에 간행된 족보인 무진보는 고려 시대 평장사 형방(邢昉)을 시조로 삼았다. 그 후 고려사를 고찰하건대, 학사공 형옹(邢顒) 이하부터 충장공의 7대까지 그분들의 이름과 직함(職銜)이 직첩(職帖)에 명확히 기록된 바를 근거로 하여 1923년에 만든 계해보부터 학사공을 시조로 삼았다. 돌아가신 큰아버지 형광열(邢光烈; 1923년 계해보 서문의 필자)께서는 (위의 내용을 계해보의) 서문에 기록하였고, 잘 모르는 사람이 신구본(무진보와 계해보)을 열람하고 의혹을 가질까 하여 염려하였다.

집안의 아우인 형시백(邢時伯), 아저씨인 형광열(邢光烈) 씨가 이를 염려하여 어느 여유로운 날에 말하길, 계해보는 나온 지 이미 35년이 흘렀다. 영호남 간에 족보를 함께 만든다는 정신자세는 아름다우나 일의 형세나 세상의 형편이 하나일 수는 없다. 어찌 시일을 미루겠는가? 곧바로 우리 병사공파는 여럿이 모여 의논하고 한가지로 일을 꾀하고 각각 임원을 정하고 협력하여 또박또박 바르게 글씨를 써서 우리 후손이 효도와 우애하는 마음, 정이 두터운 뜻을 계발하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혼자 가만히 여러모로 생각해보건대, 1923년 계해보는 집안의 아저씨인 근수재(近水齋) 형태열(邢泰烈; 병사공 16대손)이 심혈을 기울여 이뤄놓은 공이 적지 않다. 옛날, 가까이 모시던 시절 항상 말씀하시기를, “한 세대 안에 족보를 잘 만듦은 근본을 잊지 않으려는 의로운 작업이다.” 그 말씀이 아직 귀에 잔잔한데도 그간 35년이 지났으니, 한 세대 안에 족보를 만들어야 한다고 경계하신 말씀을 어긴 것이 아닌가? 그분의 존함이 비록 계해보의 임원록에 실리지는 않았더라도 족보를 손으로 다듬은 윤기가 아직 그대로 존재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오직 원하는 대로 후손들이 반드시 근수재 형태열(邢泰烈)의 유훈을 따라 우리 씨족이 화목하게 지낸다면, 앞세대 조상의 순서가 기(杞)나라와 송(宋)나라의 이력을 검증하지 못한다는 탄식, 즉 전거(典據)가 없어서 고증하지 못한다는 한탄에는 이르지 않으리라.

이에 문장력이 부족함을 개의치 않고 위와 같이 기재하여 앞으로 올 후예들에게 내려주는 바이다.

정유년 1957년 정월 상순

후손 형시억(邢時億) 삼가 쓰다

 

원문 7열과 번역문 세 번째 문단에 나타나는 평장사(平章事)는 어떤 벼슬인가? 고려 시대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은 수상(首相), 평장사는 아상(亞相), 참지정사(參知政事)는 3상(相), 정당문학(政堂文學)은 4상(相),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는 5상(相)이었다. 평장사는 중서문하성에 둔 정이품 벼슬이다. 고려 제6대 국왕 성종(재위: 981~997년)이 처음 두었다. 몇 번 그 이름이 변하였으나 1369년에 평장사로 고쳐져 고려 말에 이르렀다.

원문 19열과 번역문 다섯 번째 문단에 나오는 기송무징(杞宋無徵)은 원래 기송부족징(杞宋不足徵)이다. 그 전거는 <논어; 팔일, 제9장>이다. 그 원문과 번역문을 보면,

子曰 “夏禮, 吾能言之, 杞不足徵也; 殷禮, 吾能言之, 宋不足徵也. 文獻不足故也. 足, 則吾能徵之矣.”

선생 “하나라 법도는 나도 알지만, 기나라 이력은 증거 댈 길이 없고, 은나라 법도는 나도 알지만 송나라 이력은 증거 댈 길이 없으니, 문헌이 부족한 탓이다. 있기만 하다면야 나도 증거 댈 수 있으려만 (이을호 역 | 현암학술문화연구소 보(補), <한글 논어, 팔일>(論語, 八佾), 2011, 43-44쪽)

 

공자님이 말씀한 기송부족징(杞宋不足徵)과 같은 아쉬움이나 후회는 일상생활에서 적지 않게 다가온다. 제때제때 개개인, 지역, 나라 등의 상황을 정리하여 문헌으로 남기지 않으면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증거를 찾아 대기가 어렵다. 더 시간이 지나면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를 쥐락펴락하는 특수 수사 경험이 풍부한 검찰의 도움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일본의 주요 세력이 끊임없이 철저하게 시도하는 역사왜곡, 중국의 일부 세력이 중국 변방의 여러 민족의 역사를 한족(漢族)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역사왜곡 등에 대응할 때 기송부족징(杞宋不足徵)의 탄식은 없어야 한다.

역사왜곡에 대응하려면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평소에 물의 원천과 나무의 뿌리를 찾아보고 잘 살펴야 한다. 형시억 선생이 말씀하길, ”나무가 양분을 잘 받으려면 뿌리는 아주 튼튼하고 가지와 잎이 무성해야 한다. 물이 힘을 받으려면 샘물이 콸콸 솟고 물의 흐름과 갈래가 길어야 한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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