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그놈이 우리집을 들락거리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다. 작년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거실 밖 마루 귀퉁이에 그놈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마치 1인 시위를 하듯이 꼼짝을 않고 오래도록 그러고 있었다. 그전부터 면식은 있던 터였는데, 그것은 분명 밥을 달라는 것이었다. 부잣집 행랑채에 당당하게 드나들던 식객인 것처럼 언제부턴가 그놈은 끼니때마다 우리 집에 얼굴은 디밀었다.

▲ 어느 날부터인가 새벽녘에 기약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는 저러고 한참을 앉아 있다. 행랑채 식객인 것처럼.

가끔 우리가 밥을 먹고 있을 때면 창 밖 탁자 위에 앉아서 유리창에 얼굴을 바싹 붙이고는 뚫어져라 우리를 들여다보고 있기도 했다. 우리 딸들이 처음 그 일을 당했을 때는 무척 깜짝 놀랐다. 소리도 없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으니. 그런데 그럴 때 그놈의 눈동자는 겨울철 창 밖에서 집이나 가게 안을 들여다보며 떨고 있던 성냥팔이 소녀처럼 간절했다.

▲ 성냥팔이 소녀의 간절한 눈동자로 우리 식구 밥먹는 것을 들여다본다. 유리창에 바짝 붙어 앉아 있다가 사진을 찍으려 하자 의자로 내려가 앉았다.

그놈은 얼굴이나 몸가짐이 천박하지가 않고 귀티가 흘렀다. 털도 흔히 볼 수 있는 고양이의 색깔은 아니었다. 우리 딸들은 그놈을 집안에서 키우자고 졸랐다. 이름도 '등식이'라고 지어놓고. 하지만 우리 부부는 절대 반대였다. 그냥 밖에 있는 놈을 보는 건 괜찮지만 집안에 동물이 있는 건 질색이다. 털도 날릴 테고, 냄새도 날 테고, 집안도 더럽히고 어지럽힐 테고, 목욕도 시켜야 하고...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일단 정을 붙이고 나면 나중에 정 떼는 일이 무척 힘들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놈은 자연스럽게 우리 집 식객이 되었다. 우리는 음식을 먹고 남는 것이나, 요리할 때 우리가 먹지 않는 부분은 따로 두었다가 그놈이 오면 내다 주었다. 미리 내다 놓으면 발 빠른 까치가 먼저 먹어버리기 때문에 꼭 그놈이 왔을 때만 내다 주었다. 미리 준비한 먹거리가 없을 때 그놈이 등장을 하면 먹고 있던 생선을 떼어 주거나 냉장고를 뒤져서라도 그놈이 먹을 만한 것을 꼭 주게 되었다. 우리 딸은 아예 '츄르'라는 고양이 간식을 사다 놨는데, 그걸 주면 그놈은 아주 환장을 하고 좋아했다.

​그런데 이놈이 음식을 먹고 난 뒤에 하는 짓이 아주 가관이다. 배를 채우고 나면 적당한 자리를 찾아서 드러눕는다. 양지가 좋을 때에는 화단 바위 위에, 더운 여름에는 거실 밖 마루의 탁자 밑 그늘에 드러누워서 늘어지게 잠을 잔다. 때로는 소나무 밑 꽃밭에 웅크리고 앉아서 한참을 졸기도 하고. 그럴 때 그놈은 왕자님이 된 듯하고, 세상에 부러울 게 없어 보인다. 삶을 사는 이유는 짧던 길던 간에 단지 이 시간을 즐기기 위함이라는 듯. 그러고 있는 그놈을 보면 아무 걱정 없이 생을 즐길 줄 아는 그놈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 배를 채우고 난 뒤 양지바른 곳에 누워 낮잠을 자는 모습. 세상 부러울 게 없는 고양이 디오니소스.

추석 명절 연휴가 시작하던 날 그놈이 누런 고양이 한 마리와 함께 나타났다. 나는 친구에게 제 집 자랑을 하려고 데리고 왔나 했다. 내가 등식이 먹을 것을 내다 놓고 물러나자 그놈이 음식 놓은 곳으로 다가왔다. 나는 등식이가 먼저 먹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는 그놈을 내쫓았다. 그놈이 후다닥 달아나자 멀찌감치 떨어져서 나를 빤히 보고 있던 등식이가 음식 있는 곳으로 왔다가는 음식은 거들떠도 안 보고 그놈이 달아난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안 보이는 곳에서 고양이들 싸우는 소리가 났다.

그날 이후론 등식이가 나타나질 않았다. 나는 궁금해 하는 가족들에게 걔도 추석 명절을 쇠러 고향에 갔다가, 연휴가 지나서야 오려나 보다고 농담을 했다. 그것은 내 바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추석이 지난 지 한 달이 다 되도록 등식이는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었다. 그 대신 배가 하얗고 등이 검은 도둑고양이가 동네를 돌아다녔다. 나는 밉상인 그 얼룩이가 나타나면 냅다 내쫓았다. 더 이상은 고양이 음식도 준비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사람이 아니니 전화를 걸어본다거나 실종신고를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어디 물어볼 데도 없으니 참으로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 가족은 별의 별 추측을 다 하였다. 배가 부르지 않았으니 새끼를 낳으러 간 것도 아닐 텐데, 혹시 죽은 것일까? 어느 집에서 가족으로 들여서 집 안에 데리고 사는 것일까? 아니면 고양이들도 자기 영역이 있어서, 힘센 놈에게 자기 영역을 빼앗긴 것일까? 다른 동네에서라도 그놈을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궁금함과 아쉬움에 한쪽 가슴이 늘 빈 것처럼 썰렁하다. 집 밖을 드나들던 고양이와의 이별도 이리 힘든데, 집 안에 데리고 살던 반려동물과의 이별은 얼마나 힘이 들까?

​추석 연휴 며칠 뒤 거실 밖 마루에 참새가 누워 있었다. 손에 비닐장갑을 끼고 나가서 그놈을 주워 손바닥에 올려놓고 들여다보니, 가느다란 발가락을 옹크리고서 눈을 반쯤 뜬 채로 죽어 있었다. 눈을 감기려 해도 감기지가 않았다. 몸은 아직 차갑지도 않았고, 굳거나 뻣뻣하지도 않았다. 마치 잠을 자듯이 누워있는 그 참새는 몸이나 발가락이 너무 약하고 여려서 만지기도 조심스러웠다. 이렇게 연약한 몸으로 어찌 세상을 살아냈을까? 그놈에게 말하고 싶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직 네 힘으로 살았을 텐데, 사는 게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느냐? 그래도 친구들과 함께 까불고 재잘거리기며 하늘을 날고,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햇알곡을 주워 먹을 때는 즐겁고 행복하였느냐? 그랬으면 됐다. 수고가 많았구나.' 나는 소나무 밑에 땅을 파고 그놈을 묻어주었다. 한 번쯤 머물렀을 법한 그 소나무에서 영혼이라도 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참새를 묻고 나서 거실로 들어와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다가 유리창에 아주 작은 새털들이 묻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불쌍한 그 참새는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치고서 죽은 것이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다 무거운 짐과 고통을 지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나름대로 달콤하고 행복한 시간도 분명히 있다. 짧은 순간이긴 하지만 그것으로 산 보람은 충분하며, 때가 되면 모두 떠난다. 그러고 보면 인간이나 동물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 서로 아름다운 지구에 함께 머물렀다 가는 동료이다.

▲ 좌 : 결혼기념일 선물로 사온 국화가 참 아름답다. 하루하루 더 예뻐지는 꽃을 보며 향기를 맡는 기쁨이 아주 쏠쏠하다. 우 : 단풍이 설핏 든 가을산과 파란 하늘이 참 멋지다.

고양이와 참새는 떠났어도 계절은 속절없이 아름답다. 국화도 그러하고.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이지신 주주통신원  jssy080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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