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누군가가 주역에서 이렇고 저렇고 한다고 말하면, 괜히 주눅이 들었다. 그를 부러워하는 시샘이 뭉게뭉게 피어오름을 억제하지 못했다. 그래도 한문 공부가 매우 부족한지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2009년 초에 주역 강좌를 들으러 광주에서 서울행 고속버스를 탔다. 서울 종로구 동숭동 소재 흥사단 본부 건물을 매주 한 번씩 3개월간 들락날락했다. 속말로 ‘막고 품는’ 식이었다. 조그만 도랑에서 물고기를 잡으려면 위를 막고 물을 품어야 한다. 그런 식이다. 아직도 초보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형광열(1905. 08. 12.-1974. 01. 23. / 향년 70세) 선생은 족보가 존재해야 하는 근거를 주역에서 찾았다. 그분이 지으신 <진주형씨파보(병사공파)>의 서문의 원문과 음, 번역문은 아래와 같다.

<번역문>

주역에서 말하길, “부부가 이뤄진 후에야 부자(父子) 관계가 생기고, 부자가 된 후에야 형제와 무릇 그 구족(九族)이 모두 이제 삼친(三親), 즉 부자(父子), 부부(夫婦), 형제(兄弟) 등의 관계에 이르게 된다.” 일족은 구족에서 비롯되고, 족보는 가족에서 비롯되니, 비록 수천만에 이르더라도 그 시발점을 궁구하면 모두 한 할아버지의 손자들이기에 (누구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길가는 남’으로 볼 수 없음이 명백하다.

유독 우리 할아버지의 자손은 흩어져 각처에서 각 파(派)와 각 계통(系統)으로 살았다. 비록 어디서 유래한 지를 명확히 알지 못한다 해도 모두 뿌리는 하나다.

가만히 생각건대, 1808년 무진보와 1853년 계축보는 다 같이 병사공 형군철(邢君哲)부터 벽동군수 형자홍(邢自弘)에 이르기까지 수 세대의 배위(配位), 즉 돌아가신 분의 부인에 관한 내용이 누락되어 기록이 충분하지 않다. 집안의 형인 만회공 형도열(邢道烈; 병사공 16대 종손)이 제주 양씨 가문에서 문적(文蹟), 즉 여러 교지 등의 문서와 장부를 되찾았다. 이에 앞의 족보에서 누락된 배위는 비로소 1923년에 간행한 계해보에 실렸다. 양씨는 우리 남평공 형자관(邢自寬)의 외손이다. 생각건대, 친손(親孫)은 전쟁으로 인하여 흩어져 살았기에 외손 집에 문적(文蹟)을 두었다. 그런즉슨 나중에 어떤 경우에는 전쟁, 홍수, 화재 등의 재난을 그럭저럭 예견하고 족보를 제대로 간수하여 발견한 까닭에 어찌 세대가 또렷하지 못하겠는가. 집안에 족보가 없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이와 같은 이치이다.

정말 바라건대, 후손은 모여서 의논하여 한 마음으로 두터운 정, 효도하고 우애하는 마음을 잃지 말자. 때맞춰 족보를 만들어서 세대의 이어짐과 분파의 갈라짐과 나뉨의 상세함과 간략함을 불을 보듯이 밝힌 후에 이어서 나아가야 넉넉함이 뒤따르게 된다. 각자 힘쓸지어다.

정유년 1957년 음력 정월 열엿샛날

후손 형광열(邢光烈) 삼가 쓰다

원문 1열과 번역문 첫 문단에서 보이는 주역의 말씀은 아래에 제시한 <주역, 서괘하전>(周易, 序卦下傳)에 나타난 원문의 원용으로 보인다.

有天地然後 有萬物, 有萬物然後 有男女, 有男女然後 有夫婦, 有夫婦然後 有父子,

(유천지연후 유만물, 유만물연후 유남녀, 유남녀연후 유부부, 유부부연후 유부자,)

有父子然後 有君臣, 有君臣然後 有上下, 有上下然後 禮義有所錯.

(유부자연후 유군신, 유군신연후 유상하, 유상하연후 예의유소착.)

夫婦之道 不可以不久也.

(부부지도 불가이불구야.)

위 원문을 우리말로 옮겨보자.

“천지가 있은 다음에 만물이 있고, 만물이 있은 다음에 남녀가 있고, 남녀가 있은 다음에 부부가 있고, 부부가 있은 다음에 부자가 있고, 부자가 있은 다음에 군신이 있고, 군신이 있은 다음에 상하가 있고, 상하가 있은 다음에 예의를 두는 바가 있느니라. 부부의 도가 가히 오래 하지 아니하지 못하니라.”(김석진, <대산 주역강해 하편>(大山 周易講解 下篇), 대유학당, 2009, 430쪽.)

한편 원문 1열과 번역문 첫 단락에서 보이는 ‘구족’은 오늘날에는 들어보기 힘든 말이다. 구족은 고조ㆍ증조ㆍ조부ㆍ부친ㆍ자기ㆍ아들ㆍ손자ㆍ증손ㆍ현손까지의 동종(同宗) 친족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나를 중심에 놓은 다음 위로는 4대조에 해당하는 고조부까지, 아래로는 4대손인 현손까지의 친족이다.

원문 5열과 번역문 세 번째 문단에 나오는 벽동(碧潼)은 어디인가? 현재 북한의 평안북도 벽동군에 해당한다. 평안북도 중북부 최북단에 자리 잡은 군이다. 동쪽은 초산군, 남쪽과 서쪽은 창성군과 접하고, 북쪽은 압록강을 경계로 만주지방인 안동성(安東省) 관전현(寬甸縣)과 접한다.

평안북도 벽동군
평안북도 벽동군

“양씨는 우리 남평공 형자관(邢自寬)의 외손이다.” 제주 양씨와 진주형씨 병사공 후손 간의 인연과 교류에 관한 내용은 1923년에 간행한 진주형씨 족보 <계해보>의 서문을 조만간 풀이하면서 다루고자 한다.

형광열 선생은 내게는 할아버지뻘이다. 기억하건대, 육 척에 가까운 큰 키에 기골이 장대하셨다. 어린 눈에는 엄한 할아버지로 비쳤다. 나의 선친 청재 형선기 선생은 숙부뻘인 그분과 함께 문중의 대소사를 상의하셨다. 그분은 당신이 원용한 주역의 말씀대로 여러 종친이 ‘부자(父子), 부부(夫婦), 형제(兄弟) 등의 관계’에 힘쓰도록 훈계하고 격려하셨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형광석 주주통신원  f61255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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