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은 사제들>을 보고 _

<검은 사제들>은 한국판 엑소시즘이다. 1973년작 영화 <엑소시스트(The Exorcist)>와 닮은꼴이다. 악령이 깃든 소녀, 즉 부마자(付魔者)에게서 악령이 튀어나오도록 하여 죽이는 구마(驅魔, 라틴어:exorcismus)가 주된 줄거리다. 부마자 영신(박소담)의 발작 연기는 분장술이 상승효과를 내어 생생하다.

구마사는 검은 ‘수단’을 입은 카톨릭 신부다. <검은 사제들>의 구마사는 김신부(김윤식)와 신학생 보조사제 최부제(강동원)다. 붉은 영대를 걸치고 구마의식을 집전하는 김신부는 의식을 잃은 정기범 신부(교황청 인정 구마사)의 대타다. 최부제도 대타다. 둘은 우여곡절을 치르지만 용케 살아남는다.

 

어느 종교나 구마를 행한다. 개신교에서는 축사(逐邪) 또는 축사 행위라 한다. 그것을 인정하는 쪽은 마가복음 16:17-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을 근거로 든다. 유대교에도 있었음이 문헌에 나타난다. 정교회도, 이슬람교도 행한다.

불교의 구병시식(救病施食)은 음식을 주고 법문을 알려줘 귀신을 불법에 귀의시키기 위한 의식이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엑소시즘과 다르다. 귀신을 쫓아내거나 없애는 대신 삿된 길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준다. <검은 사제들>에도 등장하는 민간신앙에서는 굿으로써 귀신을 쫓아낸다.

영화는 처음부터 긴박감이 흐른다. 소설에서나 접했던 ‘장미십자회’와 12마물(魔物)의 존재가 느닷없이 발설되면서 카톨릭교계에서 구마사가 처한 묘한 딜레마를 전달한다. 사로잡은 사령(邪靈) 마물을 필사적으로 부둥켜안고 달리던 교황청 소속 부마사들이 교통사고를 내고, 치인 영신이 부마자가 된다.

‘장미십자회’는 17~18세기에 활동했다는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비가시적인 비밀단체다. 영화에서 장미십자회는 12마물 중 하나를 쫓는다. 어느 것인가가 한국으로 들어왔다는 추측으로 시나리오는 가동된다. ‘12’라는 숫자는 예수의 12제자에도 동양의 12지신에도 쓰이니 얄궂다.

최부제가 끌고 다니는 “돈돈이” 돼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음기가 가장 센 동물이다. 마태오(개신교에서는 마태복음) 8장32절에 “마귀들이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는 구절에서 힌트를 얻어 선정한 구마물이지 싶다. 호랑이가 영적으로 민감하다는 속설을 따라 최부제를 범띠로 한 맥락과 같다.

최부제의 민감함은 여동생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의식에서 비롯된다. 영화 속 울고 있는 내면아이는 여동생을 물어뜯는 큰 개가 무서워 도망쳤던 당시의 최부제다. 신학생이 된 것도 그렇게 죽은 여동생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다. 논리적 잣대가 닿지 않는 무작정한 명분이 일상 속에 제법 있다.

요즘 영화들은 내면아이를 자주 불러낸다. 최부제를 향해 여동생 여아가 환히 웃는 장면으로 해피엔딩을 예고한 거친 연출이 흠이긴 하지만, 극복해야 할 현상에 도전할 수 있음은 그나마 내면아이를 알아챈 때문이다. 회한을 딛고 더 나은 지금 여기를 맞이하는 최부제들이 이왕이면 많아지기를 바란다.

뭐니뭐니해도 <검은 사제들>의 백미는 구마의식이 행해진 밀실의 장면들이다. 영신의 평온함과 기괴함, 김신부의 의연함을 갈구는 마물의 돌출, 거의 성공하던 집전 의식 끝자락에 오해하여 방해꾼이 되는 최부제 등. 그들의 팽팽한 기(機) 싸움을 생생하게 전하는 매끄러운 촬영술이 한눈팔기를 막는다.

정교한 연출이 없었다면, 밀실 구마의식의 사실감이나 마물과의 싸움 열기를 절정으로 끌어올리진 못 했으리라. '성 미카엘 대천사에게 바치는 기도'와 '해방의 기도'를 라틴어를 비롯해 한국어, 영어, 중국어, 독일어 등으로 구사한 것이 관건이었다. 그만큼 강동원과 김윤식이 자아낸 연기력이 돋보였다.

우리는 24시간 노출되어 있다. 악령이 ‘네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정보들을 일상에 널린 첨단기기들에게 낚이고 있다. 그러함에도 불감증에 걸린 우리는 계속 흘리며 살아간다. 국가기관의 사생활 침해가 상상울 초월하는 단계임이 보도되었어도... 구마자가 될 위험소지까지 가늠한다면...?

김신부가 최부제에게 한 말처럼, 여동생을 해친 개(악령)는 자기보다 큰 대상에게는 달려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마음밭 가꾸기’가 급선무다. 또 구마사들 개개인의 당찬 역할 수행이 필수적이듯, 연대와 자기추스림이 병행되어야 한다. ‘나’를 믿지 않으면서 ‘너’를 의지할 수는 없다.

사족 하나. 강동원의 비주얼쇼크가 없어 좋았다. 얼굴이 아니라 연기 덩어리 자체로 다가올 때 배우는 배우답다. 양감 풍부한 김윤식의 역할 존재감처럼. 아울러 구마물 돼지와 함께 한강에 몸을 던져 구마에 성공하는 결미는 너무 뻔해서 싱겁다. 그러나 장재현 감독의 다음 걸음을 주목할 만하다.

김유경 편집위원  newcritic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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