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주주통신원 워크숍 및 총회일이다. 11월 14일 새벽 5시 잠을 깼다. 밖은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시청광장 건너 대한문 앞에서 군산행 전세버스가 7시에 출발하니까 집에서 6시 30분에 출발하면 되는데, 너무 일찍 깼다. 이것저것 챙기다보니까 정작 버스에 도착했을 때는 7시가 갓 넘었다. 버스 앞에서 서기철부장과 이병 주주센터장이 도착하는 주주통신원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의 표정은 언제나 온화하다.

서부장의 안내로 차에 타고 있던 경영총괄 송우달 전무와 인사했다. 서부장은 나를 소개하면서 “주주통신원 허창무씨입니다. 『한양도성해설기』를 지금 하니온(Hanion.co.kr: 한겨레신문 주주통신원 온라인신문)에 연재하고 있습니다.”하고 소개했다. 전번 워커힐호텔에서 제6회 아시아미래포럼행사 때도 정영무사장에게 나를 소개했다. 행사 때마다 경영진에게 나를 소개하는 그의 배려가 고맙다.

차 안은 무덥고 답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일찍 잠을 깨어 허겁지겁 새벽밥을 먹은 것이 거북했는데, 자리에 앉아있자니 메스꺼웠다.

이동구팀장은 이것저것 챙기느라 부산하게 움직였다. 그는 항상 바쁘다. 며칠 전 아시아미래포럼 취재기사문제로 통화한 후 처음 대면했다. 항상 분주한 이동구팀장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하여 여러모로 미안한 생각이 든다.

조금 있으니 동행 예정이던 전무는 오후에 한겨레 직원의 결혼식 주례를 서야한다고 자리를 떴다. 떨떠름한 기분으로 앉아있는데 김미경 총무가 한겨레 취재수첩을 몇 명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나에게는 주지 않기에 이상하다했는데, “미안합니다. 허선생님. 이번 군산 전주행사 취재반을 10명으로 정했는데, 편집위원하고 10월중에 하니온에 5회 이상 글을 올린 사람 기준으로 선정하다보니까 선생님이 빠졌네요.” 하고 설명했다. 그런 일은 내가 바라지도 않는 일이어서 “괜찮아요.”하고 가볍게 받아넘겼다.

차는 예정보다 30분 정도 늦게 출발했다. 차가 출발하기 직전인지 직후인지 이요상씨가 나에게 와서 “기분이 좀 좋아 보이지 않네요. 뒷좌석이어서 그런가요? 그럼 저 앞 내 자리와 바꿔 앉아요.”하고 내 기분을 살폈다. 그녀는 지난 8월 홍대 앞 월례모임 이후 나에게 친절하게 대한다. 고마운 사람이다. 남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것은 연대의식을 갖고 있다는 표시가 아닐까? 연대의식은 인간 교류의 가교이니 반갑지 않을 수 없다. 시민운동행사라면 전국 어디라도 마다않고 쫓아다니는 열혈투사다. 그래서 그녀의 별명은 ‘요요천사’다. 

그밖에도 버스 안에서 윤명선씨와 나의 『한양도성해설기』보완점에 대하여 논의했다. 그는 성실하게도 10여 항목의 논점을 메모한 쪽지를 가져와서 진지하게 건의했다. 그가 전번의 전화통화에서 말한 사항은 대부분 이미 보완했지만, 앞으로도 그의 의견을 상당부분 반영할 계획이다. 

중간에 정안휴게소에서 화장실을 다녀온 후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솔직히 말하면 나의 이번 행사 참여는 공식일정도 일정이지만, 내가 이때까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전라북도 군산과 전주여행에 더 관심이 많았다. 

원래 계획은 군산청소년수련관에 10시에 도착해서 주주통신원 워크숍 및 정기총회를 시작할 것이었는데, 버스가 늦게 출발하고 늦게 현지에 도착하여 1시간 정도 일정이 늦어졌다. 주주통신원 참석인원은 수도권에서 20여명, 광주 1명, 전남 1명, 전북 1명, 부산 1명, 대구 1명 등 25~6명이었다. 충청권에서 온 주주통신원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게 의아스러웠다. 이래저래 생각보다 저조한 참석인원이었다. 전주의 최홍욱 편집위원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군산으로 오는 교통편이 불편하다는 점을 우선적으로 들었다.

워크숍은 제1부에서 한겨레:온 운영현황보고 및 기사작성 오리엔테이션이 있었고, 제2부에서 기사작성 및 편집규약교육 등이 있었다. 그러나 교육도 교육이지만 그보다 먼저 요구되는 것은 필자 자신의 탐구정신과 기사작성을 위한 진지한 노력이다. 하니온이 언제까지나 지금과 같은 수준에 머물러서는 장족의 발전을 기할 수 없을 것이다. 양보다는 질적인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본지의 미비점을 보완하고, 더 나아가 본지와 어깨를 겨루는 수준으로 발전해야만 주주통신원의 위상도 제고될 것이다. 다른 말을 덧붙인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 

▲ 워크샵

군산청소년수련관 지하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나서 다시 오전에 모임을 가졌던 강당으로 돌아와 2015년 한겨레주주통신원 발전을 위한 전국모임을 가졌다. 먼저 지난 1년간의 한겨레:온 한겨레주주통신원 활동경과보고가 있었고, 이어 한겨레주주통신원 정기총회를 했다. 전국운영위원장에는 이요상씨가 선출되었다. 나는 이강윤씨의 추천으로 감사에 선출되었다. 사실은 광주를 대표하여 참석한 주주통신원이 먼저 감사로 추천되었다. 나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직책을 맡기가 싫었지만, 추천한 사람의 성의를 봐서 명분은 찾아야겠기에 어차피 감사를 한 사람 선출해야한다면, 먼저 추천된 사람이 하는 것이 좋겠다고 사양했다. 그 뿐만 아니라 이런 일에 표 대결을 하는 것도 볼썽사나울 것이었다. 그랬더니 나의 의도를 눈치 챈 어느 주주통신원이 그렇다면 감사를 2인으로 하자고 하여 그렇다면 내가 돕는다는 입장에서 수락하겠다고 했다.

▲ 총회를 마치고

군산문화여행도 한 시간도 더 늦게 4시가 훨씬 지나 시작되었다. 먼저 군산문화해설사의 안내로 군산시 해망로 240번지에 있는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을 구경했다. 근대역사박물관은 군산 내항 부두에 면해있었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전방 왼쪽으로는 군장대교가 충청남도 장항을 연결하고, 오른쪽으로는 금강하구둑이 가로지르고 있다. 그러니까 왼쪽이 바다로 통하고, 오른쪽이 육지와 연결되어있다. 부두에는 몇 백 톤급 선박에서부터 몇 천 톤급 선박에 이르기까지 많은 선박이 정박해있었다. 그런데 바다고, 배고, 부두고, 건물이고, 보이는 것은 모두 우중충하고 빛바랜 고물을 보는 것 같았다. 참신한 것이라고는 어디에도 없었다. 군산의 구시가지는 구시가지라서 그런지 나에게 어쩔 수 없이 퇴색한 도시였다.

▲ 군산근대역사박물관에서

본관에는 다섯 개의 관으로 분류되어있는데, 첫 번째는 해양물류역사관이다. 국제무역항 군산의 과거, 현재, 미래라는 표어로 군산의 과거를 확인하고 현재와 미래를 통찰하는 전시공간이다. 두 번째는 어린이체험관인데, 어린이들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증진시킬 목적으로 설치한 체험공간이다. 국내 최대의 농민항쟁이었던 옥구농민항일항쟁기념전시실인 특별전시관, 일제의 강압적 통제아래서도 굴하지 않고 치열한 삶을 살았던 군산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근대생활관, 다양한 주제의 전시물을 교체 전시하여 박물관 방문객의 관심을 유도하는 기획전시실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해양물류역사관의 조선시대 세곡(稅穀)을 운반했던 범선이며, 구명환, 그물망, 노 등 각종 선박용품이며, 닻이며 쇠갈고리 등 부두용품들이 눈길을 끌었다. 도시의 역사를 말해주는 근대생활관의 거리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그곳에는 시골에서 1960년대까지도 신었던 검정고무신과 흰 고무신을 파는 모형상점이 있고, 과자점과 한복집이 있는가하면, 박래품(舶來品)의 표본인 유성기가 보였다. 모형부두에는 수면의 높이에 따라 자유롭게 떴다 가라앉았다하는 부잔교(浮棧橋)가 흥미로웠다. 빈민들의 초막은 처량하다기보다 시대를 초월하여 구석기시대나 신석기시대의 인류의 삶을 그대로 떠올렸다.

근대역사박물관을 나와서는 시간이 부족한 탓에 바쁘게 설쳐대는 해설사를 따라 영화동 군산근대건축관(국가등록문화재 제374호)을 찾았다. 한국에서 활동했던 일본인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資平)가 설계하여 1922년 준공된 (구)조선은행 군산지점 건물로 일제강점기 식민지 경제수탈을 했던 대표적인 금융시설이며, 군산 근대사의 상징적 건물이다. 채만식의 소설「탁류」에 나오는 건물이기도 한데, 2008년 보수하여 지금은 근대건축 및 그 당시 은행관련 자료와 더불어 ‘경술국치’의 아픔을 잊지 말자는 취지의 전시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부근에는 채만식소설비가 세워져있다.

다음으로 장미동에 있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87호인 (구)군산세관 본관을 보았다. 1908년 6월에 국운이 다한 대한제국의 예산으로 지은 유럽풍의 근대문화유산이다. 독인인의 설계로 벨기에 벽돌과 건축자재를 수입하여 지었다고 한다. 건물의 지붕은 고딕양식이고, 창문은 로마네스크양식이며, 현관의 처마를 끌어낸 것은 영국식이다. 한국은행본점, 서울역 역사와 함께 국내에 현존하는 서양고전주의 3대 건축물 중의 하나인데, 건축당시에는 많은 부속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본관만 남아 호남관세전시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뒤이어 해망로 232번지의 (구)미즈상사를 찾았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식료품과 잡화를 수입해 판매하던 일본인의 무역회사건물이다. 한때는 은행 건물로도 사용되었고, 광복 후에는 검역소로도 사용되었다. 근대역사박물관 정면에 있던 건물을 이전, 복원하여 현재 북카페로 활용하고 있는데, 특이한 것은 이 건물 오른쪽 골목에 일렬로 놓여있는 커다란 주사위들이었다. 주사위를 던져 운명을 점쳐보라는 것일까?

미즈상사 인근에 있는 장미갤러리를 구경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쌀 곳간을 의미하는 장미동(藏米洞)이었다. 이곳에 조선미곡창고(주)가 있었는데, 이 건물이 바로 그 회사의 쌀 보관창고였다. 그러므로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호남 곡창의 쌀을 수탈했던 아픈 상처를 간직한 곳이다. 2013년 보수 복원하여 현재 체험학습과 예술전시장으로 쓰고 있다.

2008년 보수 복원 후 근대미술관으로 사용하는 (구)일본제18은행 군산지점도 보았다. 18은행은 일본 나가사키에 본사를 두고 있던 은행으로 18은 은행설립인가 순서를 나타낸다. 군산지점은 조선에서 7번째 지점으로 1907년 설립되었다.

이밖에도 군산미두취인소(群山米豆取引所)도 보았다. 채만식의 소설에 등장하는 쌀과 콩의 선물거래소로 실제로는 이름난 도박장이었다. 선물거래정보에 어두운 조선인들은 정보에 밝은 일본인들에게 판판이 당하기 마련이었다. 일확천금을 노렸던 조선인들의 패가망신의 현장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지주의 생활상과 이들의 한국 농촌 수탈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신흥동 일본식 가옥(구 히로스 가옥, 국가등록문화재 제183호)은 슬쩍 지나쳤다. 붉은 담장 안으로 보이는 가이스가향나무 고목이 우람하다는 것만 기억난다. 그곳에서 ‘장군의 아들’과 ‘타짜’ 등의 영화를 촬영했다고 한다.

이날 낮 시내관광의 마지막 차례는 초원사진관이었다. 1998년 개봉한 영화, 한석규와 심은하 주연의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지라는데, 나는 그 영화를 보지 못하여 별 감흥이 일지 않았다. 중앙로 신창동에 있는 작은 단층의 밋밋한 상가건물에 지나지 않았다. 기대했던 채만식문학관도, 한국의 슈바이처라는 이영춘박사의 가옥도 보지 못했고, 전라도 사투리로 ‘곱다’ ‘아름답다’는 고우당도 보지 못했다. 유한한 시간을 탓할 수밖에.

군산 구시가지 관광을 끝내고 저녁 7시쯤 저녁식사를 했다. ‘종로상회 소룡점’이라는 한식집이었다. 나는 한우 간판을 보고 소고기집으로 알았는데, 실제 나온 것은 삼겹살이었다. 돼지고기 알레르기가 있어 주저했지만, 동료들이 다 먹는데 나만 달리 주문할 수도 없어 같이 먹었다. 대신 상추를 많이 가져오라고 하여 고기 한 점 한 점을 일일이 상추에 싸서 먹었다. 마늘도 실컷 먹었다. 설사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2부에 계속

사진 : 차익환 한겨레 디지털이미지부장,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허창무 주주통신원  sdm3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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