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겨울이 올 때까지 일획도 없이 강물을 찍는다 한다.

겨울 강, 그 두꺼운

얼음종이를 바라보기만 할 뿐

저 마른 붓은 일획이 없다

발목까지 강줄기를 끌어올린 다음에라야

붓을 꺾지마는, 초록 위에 어찌 초록을 덧대랴

다시 겨울이 올 때까지 일획도 없이

강물을 찍고 있을 것이지마는,

오죽하면 붓대 사이로 새가 날고

바람이 둥지를 틀겠는가마는

무릇 문장은 마른 붓 같아야 한다고

그 누가 일필(一筆)도 없이 휘지(揮之) 하는가

서걱서걱, 얼음종이 밑에 손을 넣고

물고기비늘에 먹을 갈고 있는가

                                       -  이정록, '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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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출근하며 강을 건너 퇴근하며 다시 강을 만난다.

태어나기 전부터, '사람'이라고 하는 생명체가 살기 이전부터 저 강이 흘렀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삶의 자잘한 고민들은 꼭 쓸모없는 파편 같기도 하다.

강이라고 변하지 않았을까. 흐름은 유구할지언정 풍경도, 흐름의 줄기도 변하였다.

겨울마다 얼어붙어 갈대로 붓을 삼아 휘내려갈 얼음종이는 보지 못했다. 예전 언젠가는 저 강도 얼어서 벗은 등처럼 종이 같은 얼음을 비쳤겠지만, 몇 해를 살고나면 스러지는 갈대 또한 내가 보지 못한 얼음종이를 대한 적 없었을 것이다.

얼지 않을 강물을 바라보면서도 끊임없이 바람에 의지해 갈대는 먹 가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얼지 않을 강물을 바라보면서도 끊임없이 바람에 의지해 갈대는 먹 가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그래도 갈대는 여유롭다. 여유로움에 열린 시공간 사이로 사이로 새가 날아들고 바람이 둥지를 틀어 소리를 낸다. 햇빛만으로 먹이를 삼고, 바람만으로 몸을 가리다 스러지는 몇 년의 삶에 만족한 것들의 여유일까. 선택받았다 생각하는 것들이 특권을 내려놓으려 하지 않은 채 뒹굴거리고, 스스로의 배설물로 터전을 좀먹어 들어가는 미련한 것들과는 분명한 거리가 있다.

겨울이 깊어지든 말든 일필로 내려 긋는 휘지는 생각지도 않은 채, 강물 아래 꼭꼭 숨은 물고기를 찾아내며 먹 가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내 발목에도 물이 차올라가니, 나 또한 그들의 심성을 닮으려 희망할 뿐이다.

 

편집 : 박효삼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김해인 주주통신원  logca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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