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추억 사이

                                                                                      필명   김 자현 

  눈이 내리네!

기온이 더 급강하한다는데 저 시멘트 바닥에서 오늘 밤은 어떻게 날을 지샐까. 어떤 동지는 안면 광대뼈 부분 동상을 입어 병원을 다닌다는데 인천시 박남춘 시장은 끄떡이 없다. 66일째 풍찬노숙하며 도둑을 잡으려는 <인천참언론시민연대> 동지들과 작별하고 귀가를 서두르는 발걸음들이 시청 건물을 돌아 나올 때부터 매서운 눈발은 날리기 시작했다. 지하철 역사를 향해 가는 발걸음이 무겁고 서럽다.

그때 카톡이 울린다. 청와대 앞에서 <기후악당 삼척석탄 블루파워> 피켓 들고 있다는 동지 하나가 소식을 전한다. 또 카톡이 울린다. 김진숙 복직연대 동지들이다. 우리는 무슨 죄를 많이 지어 이 나이 먹도록 이 거리 저 거리를 헤매고 있는가, 하는 서러운 생각이 치밀어오른다. 청와대 앞에서 광화문에서 인천시청 앞에서 여의도에서 서초동에서. 우리는 모두 집시들인가. 역마살이 낀 팔자들인가.

함께 탄 동지들이 하나둘 내리고 나도 환승하기 위해 용산역에서 내렸다. 바람이 어찌나 심한지 열차 속에서도 윙윙거리는 바람 소리가 맹렬하게 들렸는데 역사에 내리자 폭설이 바람을 타고 무섭게 휘날리고 있었다. 마침 퇴근 시간이라 역사는 사람들로 붐비고 반대편 인천행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눈보라 속에 길게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눈발은 누구를 찾는 듯 사람들을 헤치고 눈을 못 뜨게 달려들고 있었다. 상행선과 하행선을 찾아 종종거리는 발걸음들! 열차를 기다리는 몇 분 안에 눈은 벌써 바닥에 쌓이고 있었다.

아-어수선한 이런 역사, 이런 비슷한 광경이 있었는데~~ 그리고는 나도 모르는 사이 어떤 음률이 내 목을 타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시멘트 바닥에 동지들을 남겨놓고 돌아나올 때부터 저조하던 기분은 기어이 내 성대에서 단조의 가락을 실타래처럼 뽑아내는 것 아닌가. 머나먼 기억의 집 문을 밀고서.....

눈이 내리네 당신이 가버린 지금

눈이 내리네 외로워지는 이 마음

눈을 맞으며 걸어가는 이 길에

하얀 눈만 쌓이네 소복소복 쌓이네

시칠리아섬 출신의 아다모! 독특한 불란서 샹송의 분위기를 미국식 팝으로 만들어 격을 떨어뜨렸다고도 하고 샹송을 대중화시키는 데 공헌했다는 둥, 두 가지 평을 듣는 아다모가 한국에 공연을 왔던 해가 있었다. 어딘가 찾아보면 있겠으나 그가 왔다 간 연도가 뭐 그리 중요하랴! 몇 년도에 왔다 갔든 그 공연을 함께 갔던 사람과 그해 겨울이 가기 전에 헤어졌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지.

내가 작게 흥얼대는 가락 사이로 살바토레 아다모의 독백을 바로 귓결에 들으며 나는 환승역을 향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다본다. 어디였더라!! 이렇게 높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리던 역사가?? 아아—소피아 로렌과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 주연의 영화 썬플라워에 나오는 모스코바다. 규모가 크고 웅장했던 지하철 역사를 오르내리던 소피아 로렌의 그 불안한 눈빛, 2차 대전에 징집되어 전쟁에 나가 소식이 없는 애인을 찾아 이태리에서 러시아까지 애인을 찾아가는 그 불안과 초조의 여정! 그 필름에 잠깐 불이 들어왔다 나간다.

여전히 어깨를 부딪는 인파를 헤치며 <눈이 내리네>는 내게서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그는 지금 어느 하늘 아래서 어느 다리를 건너고 있을까. 겨울마다 찾아오는 나의 겨울나그네가 오늘은 유난히 보고 싶다.

눈을 맞으며 걸어가는 그 모습

애처로이 불러도 하얀 눈만 내리네

라라~~~ 라라라 라라라 라라라

꿈에 그리던 다정한 그 미소가

흰 눈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네

하얀 눈을 맞으며 걸어가는 그모습

애처로이 불러도 하얀 눈만 쌓이네

라라~~~라라라 라라라 라라라

다정하던 카페의 불빛, 그가 외국으로 떠나고 나서 따뜻했던 거리의 모퉁이 모퉁이에서는 황량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제 세월이 많이 지나 도처에 묻어있던 그의 냄새, 거리거리의 빌딩 숲에 숨어있던 그의 목소리도 이젠 흐릿해졌다. 오로지 남아있는 것은 어느 날 어느 때, 어떤 비슷한 영상, 비슷한 냄새, 어떤 소리 혹은 느낌에 의해 소환당하는 흐려진지도 모르고 있던 추억들, 사람들이다!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현실인가.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오히려 기억과 추억 그리고 그 어른대는 간헐의 그림자가 혹시 현실은 아닐까. 지금 술을 잘하는 나를 보면 그는 뭐라고 할까. 잔을 부딪으며 함께 눈 오는 거리를 내다보며 진한 칵테일 한잔하고 싶다. 그간 어떻게 살았느냐고!!

 

김승원 주주통신원  heajo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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