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형씨 계해보(1923) 서문을 지은 분은 세 분이다. 송철헌 선생, 판서공 형군소(邢君紹)16대손 형기창 선생이 지은 서문은 이미 살펴봤다. 이번에 보는 서문의 지은이 형광열 선생(18611933)은 진주형씨 병사공 형군철(邢君哲)16대손이다. 그분은 격동과 고난의 세월이라 할 만한 조선의 말기, 대한제국 시기, 일제 강점기를 견뎌냈다. 1923년 우리 나이로 63세에 족보를 수정하여 만드는 작업에 참여하였다. 선조의 직첩을 찾아내고, 진주형씨 종가와 제주양씨 종가의 소중한 인연을 밝힌 점은 진주형씨 족보의 내력과 가치를 알차고 단단히 했다.

서문의 원문과 음, 번역문은 아래와 같다.

자료: <진주형씨세보>, 권지일(卷之一), 1923,
자료: <진주형씨세보>, 권지일(卷之一), 1923,

<번역문>

족보란 그 일족(一族)의 계통을 좇아 열기(列記), 즉 죽 벌여서 기록한 책이다. 일족을 이뤘으되 족보가 없다면, 눈금이 없는 저울과 치(길이의 단위)가 새겨지지 않은 잣대와 같다. 눈금 없는 저울과 치 없는 잣대를 써서는 물건의 경중과 장단을 헤아리기 어려움은 당연하다. 일족에 족보가 없는 가운데, 소목(조상의 차례)을 확실히 밝힌다는 게 말이 되겠는가? 사람 노릇을 하고 씨족을 이루려는 자는 가장 먼저 서둘러 같은 성을 가진 사람들끼리의 친목에 힘써야 하니, 이번 족보 만드는 일을 잘 치러내야 한다.

놀랍도다! 생각건대, 우리 형씨 형옹(邢顒)은 당나라 학사로서 고구려 왕의 간절한 청을 받아 홍은열(洪殷悅)을 비롯한 여러 학사와 함께 중국의 동쪽인 우리나라로 왔다. 일찍이 형씨가 존재함은 이때부터 시작한다. (통일)신라와 고려 시대에는 고위 관료, 학덕이 훌륭한 문필가 등이 끊이질 않았다. 여러 번의 전쟁과 난리를 겪으면서 세계(世系), 즉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계통이 불분명해지고 문헌으로도 고증하지 못해오다가 무진보(1808년 족보)에 이르러 고려시대 평장사 형방(邢昉)을 시조로 삼았다. 그 후 고려사를 살펴본즉슨 학사공 형옹(邢顒) 이하 7대를 넘어 충장공(忠莊公) 형방에 이르러 이름과 직함(職銜)이 왕의 임명장인 직첩(職帖)에 잘 기록된 바를 근거로 하여 학사공이 비로소 우리나라에 왔음을 알았다. 계축년(1853)에 수정한 족보, 즉 계축보를 만들 때 학사공을 시조로 삼았다.

그 후 나의 4촌 형인 형도열(邢道烈; 병사공 16대 종손)은 더욱이 충장공 이하 5(병사공 형군철; 邢君哲)의 직함(職銜)과 더불어 병사공 이하 4대 배위 남평공(형자관; 邢子寬)의 직첩(남평 현감, 하양 현감 등으로 임명한 교지)을 제주양씨 종가에서 가져왔다. 그것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고, 그 불인(不仁)함 즉 거북함을 살피지 못했음이 부끄러워서 족보를 수정하여 만드는 큰 뜻을 세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에 몰두하였다. 결국은 몸과 마음을 다잡고 정진하는 일이 아직 이뤄지지 않았는데, 아들 형시풍(邢時豊; 병사공 17대 종손)은 불행하게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손자 형종욱(邢宗旭; 병사공 18대 종손)은 나이가 어려서 아직 그 뜻을 이어받지 못하니, 아아! 슬프도다.

이제 대동보를 만드는 일에 당하여 생각건대, 나는 오히려 잘못이 커 입을 다물고 말 한마디 못할 것 같은즉슨 어찌 이승과 저승에 대해 한함이 없겠는가? 이에 감히 그 전말을 간략히 말하노니, 같은 족보의 종친은 일가친척 사이에 오가는 두텁고 화복한 마음과 정의를 잘 지키고 또한 가훈의 자취를 잃지 말고, 한 세대 간격으로 족보를 수정하여 만든즉슨 비록 백대가 멀어지더라도 반드시 기()나라 이력을 충분히 고증하지 못하는 한탄이 나오지 않도록 여러 대 조상의 차례를 마치 저울질하고 잣대로 잰 듯이 보기 좋게 잘 드러냈다. 내가 보기에 여러 종친이 모두 다 함께 서로 격려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계해년(1923) 가을 7월 후손 형광열(邢光烈) 삼가 쓰다.

원문 5열과 번역문 두 번째 문단에 홍은열’(洪殷悅)이 나온다. 형광열 선생은 그분을 진주형씨 시조 학사공 형옹과 마찬가지로 당나라 학사라고 말씀하셨다. 1923년 무렵에 자료의 접근이 여의치 않은 연유였는지, 인터넷에서 검색한 결과에 나타난 내용과 조금 다르다. 홍은열은 고려 개국공신이고, 당나라 학사로 오신 분은 홍천하(洪天河). 위키백과에 따르면, 남양홍씨(南陽洪氏) 당홍계(唐洪系)에서 시조로 하는 홍천하는 고구려 영류왕 때 당나라 8학사의 한 사람으로 고구려에 들어와 유학을 가르치고 문화 활동을 펼쳤다. 연개소문의 난으로 신라로 피신하였다. 선덕여왕 재위 때 당성백(唐城伯)에 봉해졌고, 신무왕 때는 태자태사(太子太師)로 추대되었다고 한다. 한편 선조의 계보를 고증할 수 없어 고려 개국공신으로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를 지낸 홍은열(洪殷悅)1세조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교지   /  2021년 현재, 이 교지의 춘추(春秋)는 577년   /   정통9년은 세종대왕(재위 1418년~1450년) 26년, 서기 1444년 
  교지   /  2021년 현재, 이 교지의 춘추(春秋)는 577년   /   정통9년은 세종대왕(재위 1418년~1450년) 26년, 서기 1444년 

원문 11열과 번역문 세 번째 문단에 충장공 이하 5세의 직함(職銜)과 남평공의 직첩을 제주양씨 종가에서 가져왔다는 내용이 나온다.  제주양씨 종가에서 병사공 형군철(14211483)과 남평공 형자관에 대한 교지를 1923년 무렵까지 약 370년간 보관했다고 추정할 만하다. 아주 값지고 소중한 사연이다. 어떤 연유일까? 첫째, 두 가문의 종가는 거리가 멀지 않다. 오늘날 승용차로 10분 정도면 왕래가 가능하다. 내가 어렸을 때 제주양씨달아실 양씨로 부르는 분이 많았다. 제주양씨 종가는 전남 화순군 도곡면 월곡리(月谷里; 일명 달아실)이고, 진주형씨 종가는 전남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이다. 둘째, 두 가문은 집성촌을 형성하던 초기에 혼인 관계를 맺었다. <제주양씨 대동보>(1)를 살펴보니, 남평공 형자관(14881546)의 여식이 학포 양팽손(梁彭孫; 14881545)의 큰며느리이다. 학포 선생은 1510(중종 5)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51910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김정 등을 위해 소두(疏頭)로서 항소하였고, 이 일로 삭직되어 고향인 능주로 돌아왔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편 남평공은 아들은 두었으나 그 뒤를 잇지 못했다. 직계 후손이 없다. 이러한 배경에서 남평공, 그의 부, 조부, 증조부 병사공에 대한 교지를 남평공의 여식이 간수했다고 봄 직하다.

요컨대, 학포 선생과 남평공이 사돈 간임은 아래에 제시한 <제주양씨 대동보>에서 확인된다.

자료: <제주양씨대동보>, 권지일(卷之一).

방주(傍註)에 제시된 내용을 설명하면, 첫 번째 문단은 학포 선생의 큰아들 양응기의 성품과 삶에 관한 압축이다. 두 번째 문단은 학포 선생 큰며느리의 가문에 관한 내용이다. 남평공 형자관은 생원시에 합격했고, 장사랑 중부참봉, 남평 현감, 하양(현 경북 경산지역) 현감 등에 임명됐고, 임금이 내린 특별한 은혜인 특몽(特蒙)2회 받았다. 진사 형용인(14701516)1485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형경(14501507)은 호조 참판으로 추증됐다.

​                                                          교지: 특몽(特蒙)                                                               가정12년은 중종(재위 1506년~1544년) 28년으로  서기 1533년.  2021년 현재 이 교지의 춘추는 488년​
​                                                          교지: 특몽(特蒙)                                                             
2021년 현재 이 교지의 춘추는 488년​
 가정12년은 중종(재위 1506년~1544년) 28년으로  서기 1533년. 

제주양씨와 진주형씨의 값진 인연을 밝힌 형광열 선생은 서문을 여러 종친이 모두 다 함께 서로 격려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끝맺었다. 코로나19의 온 세상 대유행이 1년을 넘었다. 아직도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는 중이다. 우리 다 함께 서로 격려하고 공동선(common-good)을 쌓을 때이다.

형광석 객원편집위원  f61255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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