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한 주간 안녕하셨어요?

날씨가 봄처럼 따스하네요. 벌써 복수초가 올라왔다는 꽃 소식도 들리더라고요. 그동안 방콕만 하기에는 하도 갑갑해 지난주 토요일(23일) 몇몇 친구들과 나들이 다녀왔어요.

어디를 다녀왔냐고요? 양주 회암사터 다녀왔어요. 의정부를 지나 경원 가도를 달리다 보면 동두천 못미처에 덕정리 삼거리, 여기서 동쪽으로 접어들어 20여리 쯤 들어가면 양주와 포천 땅을 가로질러 우뚝 서있는 천보산.

연이은 바위봉과 울창한 소나무 숲이 수려한 경관을 이루며 빈 절터를 감싸고 있는 천보산 자락, 거기 역사의 거친 회오리를 겪고 폐허 속에 침몰해 버린 회암사터가 있더라고요.

선생님, 제가 이 절터를 찾은 게 꼭 52년 만이에요. 제가 1967부터 1970년 까지 동두천에서 한의원을 할 때, 당시 소요산 자재암 신도회 회장직을 맡았던 적이 있어요.

지금의 이 회암사지가 당시에는 중앙여고재단 소유로 되어있어 조계종 측에서 이 땅을 찾으려는 운동을 벌였어요. 그래서 그때 이 회암사터를 몇 차례 찾아왔다 간적이 있어요. 그 땐 이 절터가 모두 밭이었고, 절도 조그마한 암자였어요. 헌데 이번에 둘러보니까 엄청 변했더라고요.

선생님,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말을 실감 했어요.

선생님도 잘 아시겠지만 이 절은 고려 충숙왕 15년(1328) 인도에서 들어온 지공대사(指空大師)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그 훨씬 전부터 절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요. 인도의 나란타사를 본떠 지었다는 이절은 당시 승려 수가 3천명에 이르는 3대 사찰의 하나였다고 해요.

그 뒤 지공(指空)의 제자 나옹(懶翁)이 중창했는데, 나옹이 왕명을 받고 밀양 영원사로 가던 도중 여주 신륵사에서 열반 하신 뒤 제자 무학대사가 머물렀으나 조선으로 들어오면서 억불 정책에 의해 절이 퇴락됐다가 조선 명종 때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은 허응당(虛應堂) 보우(普雨)에 의해 사세(寺勢)가 하늘을 찌를 듯 드높았으나 문정왕후의 죽음과 함께 보우도 사사되면서 절도 폐사가 되었다 해요.

선생님, 이번에 가보니까 그 절터를 양주시에서 사들여 발굴을 하고 그 뒤 천보산(天寶山) 중턱에 조계종에서 사찰을 지었더라고요.

일주문(一柱門)을 지나 계곡을 따라 오르니 '절골'이란 표석이 있더라고요.

일주문과 절골 표석
일주문과 절골 표석

이 표석을 오른쪽으로 끼고 다시 얼마쯤 오르니 중턱에 절이 우뚝 서서 우리를 반겼어요.

마침 재(齋)가 들었는지 구성진 염불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대웅전과 조사전
대웅전과 조사전

대웅전(大雄殿)을 향해 합장하고 조사전(祖師殿)을 왼쪽으로 끼고 산자락을 오르니 지공선사(指空禪師) 부도와 석등(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9호)가 있고, 그 위로 나옹선사(懶翁禪師) 부도와 석등(경기유형문화재 제50호), 그리고 맨 아래 무학대사(無學大師) 부도와 석등(경기유형문화재 51호)이 있더라고요.

지공선사 부도비. 지공선사비 좌부. 나옹선사 부도와 석등. 무학대사 부도와 석등(왼쪽 위에서 시계 방향으로)
지공선사 부도비. 지공선사비 좌부. 나옹선사 부도와 석등. 무학대사 부도와 석등(왼쪽 위에서 시계 방향으로)

설명문을 보니 순조28년(1828)에 세웠어요.

그런데 있죠. 선생님, 이 부도와 석등은 선각왕사비(禪覺王師碑, 보물 제387호)와 함께 옛 절터에 있던 것을 절이 폐사 되면서 순조 21년(1821) 광주 토호 이응준(李應峻)이 술사(術士) 조대진(趙大鎭)의 말을 듣고 이 부도와 석등을 없애 버리고 그 자리에 자기 선조의 묘를 썼어요.

7년 뒤 이러한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 그해 새로 천보산 중턱, 지금의 이 자리에 세웠어요.

다시 내려와 관음전을 지나 삼성각을 끼고 산등성이로 오르니 비석이 하나 우뚝 서있고 뒤에 옛 비단(좌부)이 앉아있더라고요.

이 비는 고승 선각왕사를 기리기 위해 1377년(우왕 3)에 건립한 것으로 1977년 화재로 보호각이 불타 버리고 비신이 파손되어 2001년 새로 세운 모조비이더라고요. 그런데 글씨가 하나도 안보여 읽을 수 없었어요.

선각왕사비 모조비(좌)와 선각왕사비 좌부(우)
선각왕사비 모조비(좌)와 선각왕사비 좌부(우)

그런데 있죠. 선생님, 함께 간 친구 우영(又英, 성균관대 전부총장, 박물관장, 금석학)이 1970년에 이 비문을 탁본 했대요. 현재 성균관대 박물관에 소장 돼 있으며 그의 금석문 도록에도 실려 있다 하더라고요. 우영도 50년 만에 다시 와 보니 감회가 깊다 하면서 "비 석질이 화강암인데, 돌을 잘못 골라 저렇게 글씨가 하나도 안 보인다"하면서 안타까워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친구에게 그 비문 내용을 찍어 카톡으로 보내 달라 했어요.

어제 아침에 그 탁본비문 받아 봤어요.

禪覺王師之碑(우영이 보내준 탁본)
禪覺王師之碑(우영이 보내준 탁본)

높이 3.9m, 너비 1.6m, 석질은 화강석. 제액(題額)은 '禪覺王師之碑', 비액(碑額)은 "高麗國王師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勤本智重興祖脣福國祐世普濟尊者諡禪覺ㅇㅇㅇㅇㅇㅇㅇㅇ幷書"라 되어 있는데, 8자가 없어졌더라고요.

비문에 따르면 선각왕사(禪覺王師)의 본명은 혜근(慧勤), 호(號)는 나옹(懶翁), 또는 강월헌(江月軒), 처음 이름은 원혜(元惠)이며 선각(禪覺)은 시호(諡號)예요.

글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짓고 글씨는 권중화(權重和)가 썼더라고요.

선각왕사비비액 예서체(우영이 보내준 탁본)
선각왕사비비액 예서체(우영이 보내준 탁본)

제액은 전서(篆書), 비액은 예서(隸書)로 이 예서체는 우리나라 비문에 유일한 서체로 예서체 연구에 중요한 자료적 가치가 있다고 우영이 귀띔해 주더군요.

선생님, 그 밖에 그곳엔 '회암사지부도'(경기유형문화재 제52호)가 있는데, 다음 기회로 미루고 서둘러 돌아왔어요.

선생님, 계곡 비탈길 내려오면서 나옹선사의 선시(禪詩) 읊었어요. 선생님도 즐겨 부르시는 그 선시 말예요.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 가라하네"

靑山見我無語居
蒼空視吾無埃生
貪慾離脫怒抛棄
水如風居歸天命

선생님, 그날 오랜만에 찾은 회암사터에서 나옹선사 선시 읊으며 즐거운 하루 보냈어요. 집에 들어오니 아내 한솔은 없고, 어느 비구니 스님의 서산대사 해탈시 읽는 소리 만 들리더라고요.

生從何處來
死向何處去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然

삶은 어디로 부터 오며
죽음은 어디로 향해 가는가?
삶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나는 것,
죽음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사라지는 것이네.
뜬 구름 자체는 본래 실체가 없는 것,
삶과 죽음, 오고 가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선생님, 제 이야기 끝까지 들어주셔서 고마워요. 그럼 오늘은 이만 총총 줄이겠어요. 안녕히 계셔요!

신축 정월 26일

김포 여안당에서
한송 포옹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정우열 주주통신원  jwy-hans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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