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사리와 산책을 나섭니다. 구멍이 숭숭 뚫린 돌담을 벗어나면 귤 밭입니다. 황금빛 귤을 수확하는 농민들의 손길이 바쁩니다. 아주머니들이 가위로 귤을 따 담고, 귤이 가득한 컨테이너박스는 아저씨들이 옮겨서 트럭위에 차곡차곡 쌓아올립니다.

살랑살랑 걷던 삽사리가 갑자기 내달립니다, 저만치 보이는 노루를 쫓아갑니다. 노루는 겅중겅중 달아나고, 삽사리는 쏜살같이 쫓아갑니다. 희끗희끗 눈이 남은 무밭에 노루발자국이 드문드문, 삽사리의 발자국은 촘촘히 찍힙니다. 노루가 훌쩍 뛰어넘은 돌담 앞에 멈춰선 삽사리가 허공을 바라봅니다.

이미 수확을 끝냈어야 할 무들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눈이 내리고 녹으면서 무청은 조금 시들해졌지만 여기저기 사방에 무밭이 널브러져있습니다. 트랙터가 갈아엎는 밭을 바라보던 농민이 한숨처럼 담배연기를 내뿜습니다. 그런 무 밭이 수만 평인지, 수십 만 평인지 짐작하기조차 어렵습니다.

무만 이런 게 아닙니다. 자식처럼 공들여서 키운 배추나 당근, 양파, 브로콜리는 물론이고, 수확을 앞둔 벼를 갈아엎는 경우도 있습니다.

홍수나 가뭄 같은 천재지변으로 농사를 망쳤을 땐 어쩔 수 없다고 해도 풍년이 들어도 웃지 못하는 게 농민들의 현실입니다. 풍년이 들면 가격이 폭락하고, 흉년이 들면 기다렸다는 듯이 수입을 해버리니까요. 이래저래 농민들의 시름이 깊어져만 갑니다.

식료품을 싸게 사니까 좋은 것 아니냐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당장은 흉년이 들어도 가격폭등이 없으니까 좋다고 생각하는 거겠지요. 하지만 풍년이 들어도, 흉년이 들어도 이익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누가 힘든 농사를 지으려고 하겠습니까? 농사꾼이 사라지면 우리의 생존도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휴! 올해 농사는 망쳤어. 작년에 전국적으로 고추가 안 됐다고 해서 고추밭을 늘렸는데 싹 다 갈아엎어야 돼.”

“내년엔 잘 되겠지. 3년에 한 번씩은 맞으니까. 그래야 원상복구도 되고.”

전국 어디엘가나 농민들의 이런 말을 많이 듣습니다. 이렇게 농민들이 투기꾼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통계청에는 우리나라에서 1년 동안 소비하는 쌀·보리·콩, 무·배추·고추, 배·사과·감 등이 얼마나 필요하며 이런 작물들은 어디에서 얼마나 생산이 되는가에 대한 자료가 있을 겁니다. 그걸 바탕으로 쌀이 잘 되는 지역에 “얼마만큼의 쌀을 생산하세요. 그럼 정부에서 1Kg당 얼마씩, 전량 수매하겠습니다.”하고, 흉년에 대비한 양까지 생산하게 한다면 농민들이 투기할 이유가 없습니다.

농민들의 소득이 예측가능하고, 안정되는 것입니다. 젊은 층이 농사를 직업으로 삼게 되면 아이들도 태어날 것이고, 학교가 생기를 되찾으며 지방소멸에 대한 걱정도 사라질 것입니다. 더불어 식량주권도 회복할 텐데 정부는 왜 이런 노력을 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귀농한지 10년 넘은 친구가 이 얘기를 듣더니 말합니다.

“와!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인데.”

“……?”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오성근 주주통신원  babsangman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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