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막 고3이 된 19753월 3일, 86세의 할머니가 노환으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같은 해 819, 마흔아홉의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셨다. 할머니의 장례를 치른 지 다섯 달 만이었다. 어머니는 지혜롭고 어진, 그리고 생활력이 강한 분이셨다.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생사고락을 같이 하던 동지였고, 위로요 의지였다. 당시 대학 졸업반이던 큰오빠, 군대에 간 작은오빠, 3인 나, 1인 남동생, 초등학교 5학년의 막내까지 모두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시기였다. 우리 5남매는 각자의 아픔을 넘어 서로 도우며 어머니의 부재를 메우려 했다. 그러나 어머니와 아내를 한 해에 떠나보내야 했던 쉰셋 아버지의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할 수도 가늠할 수도 없다.

부산항이 내려다보이는 용두산공원에서 찍은 가족사진, 우리 가족은 특별한 날이면 용두산공원에서 기념사진을 찍곤 했다.  이 사진은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는 기념으로 긴머리를 자르기 전에 한복을 차려입고 찍은 사진이다.
부산항이 내려다보이는 용두산공원에서 찍은 가족사진, 우리 가족은 특별한 날이면 용두산공원에서 기념사진을 찍곤 했다. 이 사진은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는 기념으로 긴머리를 자르기 전에 한복을 차려입고 찍은 사진이다.

2년 후인 1977년에야 최운산 장군이 독립유공자로 서훈이 되셨다. 1961년에 시작했던 서훈신청이 오랜 노력 끝에 결실을 본 것이다. 사실 이렇게 긴 세월이 걸린 것은 처음 신청 당시 서훈 업무를 담당했던 총무처 직원의 뇌물 요구를 거절하고, 분노를 참지 못해 그에게 주먹을 날렸던 탓이었다. 그래서 더 안타깝고 답답했던 세월이었다.  그 일이 있은지 16년만에 서훈을 받게 된 것이다. 비록 서훈 등급이 너무 낮아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을 했지만  서훈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동안의 불효를 조금이라도 씻는 것 같았다.  

정말 기쁘고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기쁨을 함께 나눌 어머니도 아내도 곁에 없었다. 얼마나 안타까우셨을까! 이제 봉오동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양성한 최운산 장군의 삶을 현양하고 기릴 수 있게 되었는데, 누구와 함께 의논하고 누구와 힘을 합쳐 봉오동 독립전쟁의 역사를 바르게 세우는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버지는 그렇게 남은 자식들과 어머니도 아내도 없는 현실의 삶을 살아내야 했다.

그 후로 국가기념일이면 독립군의 후손으로 기념식에 초대 받곤 했다. 아버지는 삼일절과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하고 돌아오시면 기념식장에서 목도하는 "단상의 친일파와 단하의 독립군"이대비되는 기막힌 모습을 지적하시곤 했다. 매번 "다시는 기념식에 가지 않겠다!"고 분노의 술잔을 기울이던 아버지는 결국 삼일절과 광복절 기념식을 외면해 버리셨다.  오랜 시간 봉오동과 북간도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시던 아버지는 독립유공자 서훈이라는 첫 단계를 넘어선 그 자리에서 멈추고 말았다.

그 시절의 아버지는 자주 무너지셨다. 술집에 계신 아버지를 모시러 가야 했던 날이 많았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어른이 된 막내가 언제 엄마 생각이 가장 많이 나셨는지 여쭸을 때 아버지는 다섯 자식들의 앞날에 대해 뭔가를 결정해야 할 때였다고 답하셨단다. 우리 다섯 남매는 홀로된 아버지의 외로움을 살피며 각자의 삶을 씩씩하게 살아내려고 노력했고 아버지를 사랑했다. 그러나 다섯 자식들이 자라면서 인생의 한 단계를 지날 때마다 혼자서 감당해야 했던 무게와 시간들이 너무 깊고 길었나보다. 아버지는 그렇게 오래도록 외로우셨다.

1992년에 중국과 수교가 이루어졌다. 봉오동이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고향이 되었으나 이미 노인이 된 아버지를 가로막는 핑계가 너무 많았다. 건강도 경제력도 여의치 않았다. 그러나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던 아버지는 죽기 전에 고향땅을 밟아보겠다는 일념으로 1997년 홀로 봉오동을 찾으셨다. 당시 우리 5남매 모두 각자의 인생에서 제일 바쁜 시기를 보낼 때라는 핑계로 아무도 아버지를 동반하지 못했다. 우리 형제들이 가장 가슴 아파하는 기억이다시간 여유가 있던 큰며느리가 시아버지를 모시고 떠났다. 

스물넷에 떠난 고향을 일흔일곱의 노인이 되어 다시 찾은 아버지의의 귀향길에 어머니가 살아계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두 분이 손잡고 봉오동의 마을길을 걸으며 나누셨을 옛이야기가 얼마나 많았을까! 아버지는 해방 이후 아무도 관리하지 않아 방치되었던 증조부 연변 도태 최우삼의 묘소 위치를 확인했다. 마을 뒷산에 올라 산소를 찾아 봉오동에 살고 있는 조카에게 알려주셨고, 내년에 다시 돌아와 묘소에 비석을 세우겠다고 약속하셨다.

고향의 산천이 그대로인 것이 기쁘기도 했지만 당신이 살던 집도 허물어지고 남아있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경비에 여유가 없어 생활이 어려운 고향의 조카들에게 몇 푼이라도 쥐어주고 싶은 마음도 참아야 했다. 기쁨과 함께 마음 고생도 심했던 귀향길이었다봉오동에서 돌아오신 아버지는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셨다

오랜 지병인 당뇨로 인해 합병증으로 신부전증이 발병했는데, 당장 투석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투석을 거부하셨다. 고향 봉오동에도 다녀왔고 이제 별 여한도 없으니 더 이상 구차하게 살지 않겠다는 단호함이었다. 아버지를 설득할 수 없던 둘째오빠는 나에게 긴급 호출을 보냈다. 내가 아버지를 설득해야 했다. 마음이 급했으나 나는 당시 시어머니의 임종을 지키던 중이었다.

장례를 치르고 삼우제 다음날에야 부산으로 달려갔다. 그 사이 아버지는 혈액이 탁해져 혼수상태가 되어 응급 투석을 시작한 뒤였다. 위기를 넘겼지만 섬망 증세가 남아있었다. 헛소리를 하면서도 나를 알아보고 반가워하시는 아버지는 다행히 아기처럼 순해지셨고 투석치료 바늘을 빼버리지 않으셨다. 며칠 후 오빠와 상의해 아버지를 서울로 모시고 왔다. 간호사인 내가 곁에서 아버지의 마지막 시기를 돌봐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두어 달 병원에서 투석치료와 물리치료를 집중적으로 받으면서 아버지는 매일 조금씩 좋아지셨고 통원치료가 가능할 만큼 회복되셨다. 비록 일주일에 두세 번 투석치료를 계속 해야 하고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으나 기적적으로 다시 일어나신 것이다. 우리 집으로 오신 아버지는 계속된 투병생활을 잘 받아들이셨다. 사위의 등에 업혀도 보고 주말이면 맛있는 식당도 가고 교외 나들이도 하셨다. 그렇게 아버지는 우리 형제들에게 이런저런 추억을 만들 수 있는 시간을 2년 정도 더 주신 뒤 어머니 곁으로 떠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15년이 지난 2015년 7월 4일, 아버지 기일에 모인 우리 형제들은 최운산 장군과 봉오동의 역사를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대한민국의 군대가 일본군을 상대로 통쾌한 승리를 거둔 봉오동과 청산리의 독립전쟁사가 바로 우리 가족사였고, 그 역사의 진실을 평생 되새기면서 살고 있는 우리 형제들이었다.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길을 나서기로 결정한 둘째오빠와 나, 여동생은 두 달간의 준비 끝에 짐을 꾸렸다.

2016년 1월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발기인 모임에서 둘째 아들 김민국 최형주 최성주 최윤주 최흥주 최은주 5남매와 최성주의  큰아들 김형국
2016년 1월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발기인 모임에서 둘째 아들 김민국 최형주 최성주 최윤주 최흥주 최은주 5남매와 최성주의  큰아들 김형국

연길에 도착해 연변대 역사학자들을 만나고 역사 자료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살펴보다가 처음으로 봉오동을 방문한 날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봉오동 수남촌은 봉오동을 건설한 최운산 장군의 집, 아버지 최봉우가 살던 집이 있던 마을이다. 그 마을 촌장을 만나고 수남촌에 살고 있던 최진동 장군의 외손자 부부를 만났다. 그들의 안내로 마을회관으로, 공동작업장으로 사용하다 1980년대에 허물었다는 최운산 장군의 집터를 확인하고 미을 뒷산에서 증조부 연변도태 최우삼의 산소도 다시 찾았다.

2015년 봉오동에서 증조부 최우삼의 묘를 찾고 기념촬영하는 증손자들

동네를 둘러보다 밭 한귀퉁이에서 최운산 장군이 쌓은 토성이 있던 마을이라 토성리라 불렸던 마을의 옛 이름이 적힌 오래된 표지석을 발견하기도 했다. 모두 기적 같은 일이었다마치 할아버지 최운산 장군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 같았다. 이제 봉오동의 역사를 제대로 찾아가라고 손주들을 봉오동으로 부르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봉오동에서 돌아온 우리는 북간도 무장독립전쟁의 역사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최운산장군이 1945년까지 살았던 봉오동 수남촌 밭 귀퉁이에서 토성리 표지석을 발견했다.
최운산장군이 1945년까지 살았던 봉오동 수남촌 밭 귀퉁이에서 토성리 표지석을 발견했다.

삼남매 고향 방문단은 매순간 아버지 생각에 마음으로 울고 웃으며 아버지의 눈으로 고향 마을을 돌아보았다. 그래서인지 연길, 도문, 왕청, 석현의 거리 풍경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봉오동 최운산 장군의 집터에 서서 명절날 부모님을 따라 고향집을 찾은 손자들의 설렘도 생전 처음 느껴볼 수 있었다어린 아버지가 뛰어다니셨을 마을길을 걸으며 아버지와 대화할 수 있었다. 정말 좋았다. 나에게도 고향이 있었음을 확인했던 시간. 아버지와 함께 한 연변여행. 아버지의 귀향이었다.

편집 :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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