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깊은 나무, '한국의 발견' 전권을 구입했다.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쌔, 곶 됴코 여름 하나니.
 새미 기픈므른 가마래 아니 그츨쌔, 내히 이러 바라래 가나니"

새로 받은 교과서를 들쳐보다 이 문장을 보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낯설었었다.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그 시대의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는 없겠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고(故)한창기 선생은 나와 달랐다.

그는 옛 사람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한국인과 대화하려고 했다. 그의 역작  '한국의 발견' 열 한권 전권(全卷)이 중고거래 앱에 '연락주세요'라는 사진과 함께 매물로 올라왔을 때, 마음속에 절로 환희가 일었다. 학창 시절 아버지 책꽂이에 꽂혀있던 '부산'편을 책이 상할세라 조심스럽게 펼치며 더 없나 하고 아쉬워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20대로 보이는 아가씨는 마스크 위 환한 얼굴로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해요'라는 인사와 함께 끙끙거리며 책을 건네주었다. 나도 소유하게 된 기쁨을 담은 인사를 잊지 않았다.

귀가해서 책을 펼쳐보는 순간 그녀의 미소가 환한 이유를 일부 짐작할 수 있었다. 책은 낡아 있었다. 책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얘기가 아니다. 빽빽하고 촌스러운 낡은 활자, 아파트를 찾아보기 힘든 사진들. 그것은 20대에게 있어서 타국과 다름없는 풍경이었을 것이다.  

경상남도 편을 들춰보면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쓴 초로의 두 사내가 막걸리 잔을 기울이는 모습의 사진이 있다. 젓가락들은 수저통에 꽂혀'있고 스테인레스 술잔위로 플라스틱 병 받침에 담겨 있는 막걸리가 보였다. 안주접시에는 큼직하게 썬 깍두기나 배추김치가 가득 담겨 있었지 싶다. 탁자위에 휴대폰이라도 놓여있었다면 책들은 여전히 옛 주인의 품에 있었을까.. 

언젠가는 누군가가 나서서 고산자와 한창기 선생을 이어 우리를 돌아보아야 했으면 한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를 책임진 세대로서의 책무가 아닐까.
언젠가는 누군가가 나서서 고산자와 한창기 선생을 이어 우리를 돌아보아야 했으면 한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를 책임진 세대로서의 책무가 아닐까.

나는 사진속의 풍경들이 익숙하면서 그립기까지 하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취하실 때마다 염색한 군복을 멋부려 입고, 미군부대 식당의 잔반을 끓여팔던 '꿀꿀이죽'으로 허기를 채우던 시절의 얘기를 반복하셨다. 어찌나 들었던지 지겹기만 했는데 당신에게는 지겹지 않았던 혹은 그리웠던 그 시절의 이야기가 이제는 내게로 왔나보다. 한 장 한 장을 넘겨보는 데 아이가 옆에 있다면 붙들고 앉아 "이 때는 말이야"라고 말해주고 싶은 충동까지 들었다아이는 지겨워하며 내가 내 아버지를 보던 눈으로 나를 바라 볼 것이다.

내 아버지가 살아온 날들의 뿌리도, 내가 살아온 날들도, 서로 다른 토양에 뿌리를 내렸다. 깊이 뿌리를 내려 흔들리지 않으려 했다. 이 책들은 우리 세대 '오늘'의 수많은 증거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책의 서문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이 책을
따돌림과 억누름을 받으면서도
청구도와 대동 여지도
그리고 인문 지리지 대동 지지를 편찬한
이 나라 지리 연구의 외로운 선구자
고산자 김 정호 선생에게 바칩니다.


새 것을 익혀내기도 힘든 시대에 자취를 담은 책을 바라볼 여유가 쉽지는 않겠다.  이 헌사라도 우리 세대를 대표해서 한 창기 선생에게 다시 바쳐져야 하겠지, 그는 우리의 뿌리를  깊게 했으니까 하고 책을 꽂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 기억에 있는 원문은 세종 초판의 것이었지만 하니온에서는 지원하지 않는 표기들이 있어 후대의 것을 수록했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김해인 주주통신원  logca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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