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卷一百二十二 列傳 卷 第三十五 方技 설경성 편에는 '설경성이 원 세조의 병을 치료하다' 라는 제목과 함께 설경성에 대해 기록하였다. 이때가 충렬왕 11년 3월이다.

설경성은 계림(鷄林) 사람이고, 스스로 말하기를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대대로 의술(醫術)을 직업으로 삼았으며, 그도 의술에 정통하였다고 한다.

설경성은 처음에 상약의좌(尙藥醫佐,정9품)에 임명되었다가 여러 번 관직을 옮겨 군부총랑(軍簿摠郞,정 4품)이 되었으며, 갑자기 뛰어올라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종2품)가 되었다가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종2품)로 옮겨 치사(致仕, 사양하고 물러남)하였다.

충렬왕(忠烈王)은 병이 들 때마다 반드시 설경성을 시켜 치료하도록 하였으므로, 이로 인해 설경성의 명성이 높아졌다.

원 세조(世祖)가 병이 들자 사신을 보내 명의를 구하였는데, 안평공주(安平公主)가 노잣돈과 옷 2벌을 설경성에게 하사하여 원으로 보냈다.

설경성이 처방한 약이 효과가 있자 세조가 기뻐서 집과 곡식을 하사하고, 대궐 문을 지키는 자들에게 명하여 아무 때나 출입할 수 있게 하였으며, 심지어 자기 앞에서 바둑을 두게 하고 직접 와서 구경하기도 하였다.

설경성이 원나라에 2년 동안 머무르면서 귀국하고 싶다고 요청하자 세조가 아주 후하게 상을 내려주면서 말하기를, “집 생각이 안날 수 있겠는가? 너는 돌아가서 가족을 데리고 오너라.”라고 하였다.

설경성이 돌아와서 처와 함께 원나라에 가려고 하였으나, 처가 반대하였으므로 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조가 그를 불렀으며, 이때부터 자주 왔다 갔다 하기를 아주 편하게 궁에 드나들었다고 한다. 세조의 대우가 더욱 후해져서, 그동안 하사받은 물품이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고 한다.

원나라 성종(成宗)이 병이 들자 다시 그를 불렀으며, 이 때문에 원나라에 머물게 되었다.

1300년 음력 4월 5일에는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인 설경성(薛景成)을 원(元)에 파견하여 황태후의 상(喪)에 조문하기도 하였다.

충선왕(忠宣王)이 왕위를 이어 받은 뒤에 한국공주(韓國公主)가 조비(趙妃)를 질투하여 조비의 아버지인 조인규(趙仁規)가 죄를 지었다고 무고할 만큼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그래서 원나라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국문하면서 설경성을 보좌하게 하였는데, 설경성은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사람들과 왕래하지 않았다고 한다.

설경성은 특별히 찬성사(贊成事,정 2품) 벼슬이 더해져서 치사(致仕)하였고, 77세로 죽었다. 이때가 1313년 음력 2월 5일이다.

설경성은 키가 크고 외양이 아름다웠으며, 성품이 조심스럽고 온후해서 비록 천자(天子)의 인정을 받고 국왕의 총애를 받았음에도 자손을 위한 은혜나 혜택을 구하지 않았으며, 또한 집안의 살림살이도 돌보지 않았다. 아들인 설문우(薛文遇)는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이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에 이르렀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설경성과 같을 수는 없을지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특히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편집 : 박춘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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