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기에 어느 날 국가산업단지인 여수 석유화학공단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는 분의 사택을 방문했다. 대낮인데도 사택이 들어선 아파트는 매우 조용했다. TV나 라디오도 켜지 않았다. 발소리조차도 내지 않았다. 야간노동을 하고 돌아온 이웃집 노동자가 깊은 잠을 자도록 서로 배려하는 묵시적 약속의 실천이었다.

화학공장이나 제철소는 장치나 기계를 24시간 가동한다. 또한 밤낮을 가리지 않는 생활의 보편화에 따라 잠깐도 쉴 수 없는 업종이 늘었다. 사적 영역에서는 편의점, PC방, 일부 택배업 등이, 공공 영역에서는 국방(특히 전방초소, 방공 레이더 등), 경찰, 소방, 병원, 항만, 공항, 톨게이트 등이 그런 부문이다.

현대제철 당진제철소. 현대제철 제공.    출처: 한겨레, :2021-07-06.
현대제철 당진제철소. 현대제철 제공. 출처: 한겨레, :2021-07-06.

교대노동(shift work)은 ‘x조 y교대’로 표현한다. x는 업무 수행에 필요한 인력으로 이뤄진 집합의 수를, y는 교대 횟수를 나타낸다. 대체로 교대 노동자의 실제 노동시간은 24시간을 y로 나누면 나온다.

여기 소개하는 직업병 사례 노동자의 노동형태는 ‘생산직 3조 3교대’이다. 아마도 9시간씩 3개조(오전, 오후, 야간)로, 혹은 주간(08:00-16:00; 10시간), 전반야(16:00-00:00; 8시간), 후반야(00:00-08:00; 8시간) 식으로 3개조가 나뉘어 근무했을 거다.

디스플레이 제조업 노동자 미만성 대B-세포림프종은 직업 관련성이 낮다는 판단이 나왔다(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누리집; 2021.07.07).

□사업장 소속 근로자 ○○○(남, 1990년생)은 21세이던 2011년 5월 16일 입사하여 2017년 5월까지 약 6년간 3조 3교대로 근무하였다. 근로자는 LCD액정공정이 위치한 곳에서 각 설비들을 관리하고 수리하는 엔지니어였다. 즉, LCD액정 공정 PM(Preventive Maintenance) 엔지니어였다. 업무는 크게 유기용제(세정제) 등의 준비와 각 설비들의 클리닝, 유리기판이 부서질 경우 처리 및 그 원인 파악, 이오나이저(Ionizer; 정전기 제거 장비) 부품의 교체 등이었다. 근로자는 근무 시 방진복, 방진모, 안전모, 마스크, 라텍스장갑 등을 착용하였다. 필요할 때 방독마스크를 착용해야 하지만, 바쁜 경우 착용하지 않는 경우가 50%였다고 말하였다.

국내 한 반도체 공장 생산라인의 모습. 반도체 제조업은 직업성 암 발생률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출처: 한겨레, 2021-03-24.
국내 한 반도체 공장 생산라인의 모습. 반도체 제조업은 직업성 암 발생률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출처: 한겨레, 2021-03-24.

만 27세가 되던 2017년 4월 근로자는 업무 중 심한 가슴 통증과 함께 식은땀, 오한, 발열 등의 증상을 겪었다. 같은 달 26일 대학병원에 가서 ‘일차성 종격동 대B세포 림프종’’(Diffuse large B-cell lymphoma)을 진단받았다. 이에 근로자는 □사업장에 입사하여 여러 유기용제와 전리방사선((ionizing radiation), 유해 화학부산물, 교대근무 등에 노출되어 상기 질병이 발병되었다고 생각하여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를 신청하였다. 근로복지공단은 2020년 5월 27일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 업무상 질병 인정 여부의 결정을 위한 역학조사를 의뢰하였다.

2021년도 제5회 역학조사평가위원회(2021.5.21)는 근로자의 상병이 업무관련성에 대한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하였다. 첫째, 근로자의 상병과 관련 있는 직업적 유해요인으로는 1,3-부타디엔이 충분한 근거가 있는 인자이고, 벤젠, 에틸렌 옥사이드, X-선과 감마선, TCE, 2,3,7,8-TCDD가 제한된 근거를 가진 요인으로 알려져 있다. 둘째, 근로자는 작업환경에 대한 노출평가 상 □사업장에 6년간 근무하면서 벤젠과 X-선에 노출되었다 하더라도 노출 정도는 낮을 것이다.

2018년 7월4일 저녁 서울 서초구 서초동 삼성 본관 앞에서 문송면 원진노동자 산재사망 30주기 추모와 반올림 농성 1천일 맞이 삼성 포위행동 행사가 열리고 있다. 삼성 액정표시장치(LCD) 공장에서 일하다 뇌종양에 걸린 한혜경씨(39)와 그녀의 어머니 김신영씨가 손을 잡고 삼성 본관을 둘러싸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출처: 한겨레, :2020-09-23
2018년 7월4일 저녁 서울 서초구 서초동 삼성 본관 앞에서 문송면 원진노동자 산재사망 30주기 추모와 반올림 농성 1천일 맞이 삼성 포위행동 행사가 열리고 있다. 삼성 액정표시장치(LCD) 공장에서 일하다 뇌종양에 걸린 한혜경씨(39)와 그녀의 어머니 김신영씨가 손을 잡고 삼성 본관을 둘러싸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출처: 한겨레, :2020-09-23

한편 “대법원 2015두3867 삼성전자 직업병(다발성 경화증) 산재요양불승인처분 취소청구 사건”에 관한 보도자료(대법원 공보관실, 2017.08.29.)를 보면, 첫째, 유해화학물질 노출에 의한 직업병의 경우 상당인과관계의 증명책임 완화에 관한 법리가 대법원 판례로 확립되어 있다. 상당인관계는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증명될 필요는 없고, 근로자의 취업당시 건강상태, 작업장의 유해요인 유무, 작업장에서 근무한 기간 등의 제반 사정을 고려하여 경험칙과 사회통념에 따른 합리적은 추론을 통해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있다. 둘째, 이 판결의 의의는 산업현장에서 비록 노출허용기준 이하의 저농도라 할지라도 상시적으로 유해화학물질에 노출되는 근로자에게 현대의학으로도 그 발병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는 희귀질환이 발병한 경우에도 보다 전향적으로 업무와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하여 산재요양급여를 지급하여야 함을 강조하였다는 점이다.

생소한 용어가 많다. 우선 TCE(트리클로로에틸렌, trichloroethylene)는 호흡기 또는 피부를 통해 체내에 흡수되어 중추신경계를 억제하고, 간 조직과 심혈관계에 손상을 입힌다(www.reseat.or.kr). 2,3,7,8-TCDD(2,3,7,8-TetraChloroDibenzo-para Dioxin)는 베트남 전쟁(1961-1971)에서 미군이 사용한 고엽제의 하나인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에 함유된 물질이다(ko.wikipedia.org). 1,3-부타디엔을 유엔 산하 국제암연구소(IARC)는 “사람에게 암을 일으킬 수 있는 유력한 물질”로 ‘발암성 등급 2A군(Group 2A)’으로 분류한다(환경부 화학물질과).

올해 ‘리영희상’에 선정된 노동인권단체 ‘반올림' 활동가들이 지난 15일 오후 서울 사당동 반올림 사무실에서 고 황유미씨를 모델로 한 ‘백혈병 소녀상'을 두고 앉아 있다. 왼쪽부터 전성호, 이상수, 조승규, 이종란 활동가. 사진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출처: 한겨레, 2018-11-18
올해 ‘리영희상’에 선정된 노동인권단체 ‘반올림' 활동가들이 지난 15일 오후 서울 사당동 반올림 사무실에서 고 황유미씨를 모델로 한 ‘백혈병 소녀상'을 두고 앉아 있다. 왼쪽부터 전성호, 이상수, 조승규, 이종란 활동가. 사진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출처: 한겨레, 2018-11-18

역학조사평가위는 산재 신청인의 질병은 직업 관련성이 없다고 판단하지는 않았다. 아직은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한편, 판단 서면의 ‘고찰 및 결론’에서 산재 신청 노동자의 질병과 장기간 ‘3조 3교대’ 근무 간의 관련 확률에 관한 언급은 없다. 아쉬운 대목이다.

참고로, 산재 신청인이 림프종 진단을 받은 이후 역학조사와 역학조사평가위원회 심의가 완료되기까지 4년 걸렸다.

 

편집: 형광석 객원편집위원

형광석 객원편집위원  f61255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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