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활기를 위해서 때로는 쉬어야 한다...

1박 2일을 일정으로 하루는 노고단을 오르고 하루는 평사리를 둘러보았다. 행정구역상 구례는 전남이고 하동은 경남이기에 이틀 동안 두 개 도를 걸쳐서 다녔던 셈이다. 섬진강 줄기를 중심으로 보면 구례는 상류에 있고 하동은 하류에 있다. 구례까지 가파르게 흐르던 섬진강물은 하동에 이르러서는 지리산 줄기의 여러 계곡물이 더해진다. 넓은 강폭에 맞추어 섬진강물은 흐르는 속도를 줄이며 유유히 하구로 흘러간다.

성삼재주차장에서 뱀사골 쪽으로 바라본 젼경
성삼재주차장에서 뱀사골 쪽으로 바라본 젼경

섬진강 하구를 지난 강물은 바닷물과 뒤섞여서 서로 하나가 된다. 바닷물과 뒤섞인 섬진강물이 이대로 계속 흐른다면 짐작건대 여수시와 남해군 두 개 큰 섬 사이로 흘러들 것이다. 섬진강물의 흐르는 기세로 보아 두 개의 섬 사이를 흘러서 태평양까지 이르고도 남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성삼재주차장에서 노고단으로 나있는 임도
성삼재주차장에서 노고단으로 나있는 임도

출발 첫날은 노고단 정상을 목표로 삼아 성삼재 주차장으로 향했다. 지리산 나들목을 통과하여 성삼재주차장까지 가는 길이 뱀 똬리를 튼 것처럼 구불구불하다. 뱀사골 이름의 유래와 관계없이 뱀사골 계곡을 지나는 길고도 좁다란 이 길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뱀사골이라 할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노고단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사전 예약이 필요하지만, 예약인원이 적은 기간에는 탐방관리소에서 바로 입장권 발권이 가능하다.

노고단 정상의 돌탑 모습
노고단 정상의 돌탑 모습

성삼재주차장에서 노고단까지는 정상 아래 위치한 노고단 대피소까지 임도로 정비되어 있어 완만한 편이다. 누구라도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책길로 보면 될 것 같다. 대부분의 산 이름은 ~봉이나 ~산으로 끝나는데, 노고단은 이름이 조금 특이하다. 당연히 그만한 사연이 깃들어 있다.

노고단(老姑壇)이라는 이름은 늙은 시어머니를 위한 제사 터를 의미한다고 한다. 노고단은 지리산의 산신을 모시는 신앙 지로 매년 제사를 올렸던 장소로써 처음에는 정상인 천왕봉에서 지내왔지만 고려 시대에 여기로 옮겨지면서 노고단이란 이름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노고단(老姑壇)은 역사성 있는 산이라 할 수 있다.

박경리 문학관 입구에서 문학관을 바라본 모습
박경리 문학관 입구에서 문학관을 바라본 모습

산 아래에서는 햇볕이 쨍쨍 내리쬐던 날씨가 노고단 정상으로 다가갈수록 안개가 심하게 끼기 시작한다. 노고단 정상 탐방관리소에 이르렀을 때는 급기야 비가 세차게 쏟아지기 시작한다. 모자와 우산을 준비해 가길 잘한 것 같다. 평소 산에 오르면서 나름 사전준비를 해온 보람이 있다. 노고단 정상에 이르렀을 때는 비가 서서히 그쳐갔다. 혹시 안개도 그칠까 싶어 기다렸지만 잠시 사라졌다가 순식간에 다시 몰려오기를 반복했다.

최참판댁 드라마  촬영장에서  바라본 평사리 들판과  멀리 보이는 섬진강 전경
최참판댁 드라마  촬영장에서  바라본 평사리 들판과  멀리 보이는 섬진강 전경

안개 때문에 노고단에서 천왕봉과 섬진강을 조망할 수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쉽긴 했지만, 비가 그쳐준 것이 어디인가? 하지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음 날 일정을 위해 하산을 서둘렀다. 늦은 오후인데도 아직도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제법 보인다. 그중에는 유치원생이 단체로 노고단에 오르는 모습도 보인다. 그만큼 노고단은 접근성이 쉬우면서 지역 명소로서 이름이 높다는 의미일 것이다. 

소설 토지의  TV 드라마 촬영장 최참판 댁 
소설 토지의  TV 드라마 촬영장 최참판 댁 

1박 2일 둘째 날은 하동 악양면 평사리를 둘러보기로 했다. 전날 노고단 등산의 피로도 풀고 평소에 느껴보기 어려운 마음의 여유도 느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평사리는 언론을 통해서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지리상의 정확한 위치는 몰랐었다. 봄이면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하동 벚꽃 구경을 하거나 여름 피서지 쌍계사 계곡을 찾아가다 보면 하동 악양삼거리를 반드시 지나게 된다. 지금까지 무심히 지나쳤던 악양삼거리가 오늘 찾아가는 평사리와 인접해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녹차밭과 다원 전경. 그 너머는 지리산 형제봉 모습
녹차밭과 다원 전경. 그 너머는 지리산 형제봉 모습

평사리를 찾은 이라면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 있다. 박경리 문학관이다. 지금의 하동 악양면 평사리를 대중들에게 널리 알린 소설 '토지'를 쓴 박경리 작가를 기념하기 위해서 하동군에서 직접 건립하였다고 한다. 사실 나는 박경리 작가의 '토지'를 읽은 적이 없다. 하지만 TV 드라마를 통해서 본 기억은 어렴풋이나마 남아 있다. 처음에는 얼떨결에 가족들과 함께 보게 되었지만 볼수록 내용이 흥미진진했던 것 같다. 만약 '토지'가 단편 문학이었다면 벌써 읽었지 않았을까 싶다. 그만큼 드라마가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녹차밭과 지리산 자락에 둘러싸인 마을 전경
녹차밭과 지리산 자락에 둘러싸인 마을 전경

그래서 만약 '토지'가 드라마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과연 이곳 평사리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대표적으로 나 같은 사람은 찾아올 리가 만무할 것이다. 소설 '토지' 완독에 대한 미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세월이 흘러 어느 시점부터인가 20권이 되어버렸다. 이번 방문이 소설 '토지' 완독의 좋은 계기가 되기를 마음속으로 바라 마지않는다.

다원 입구에서 바라본 녹차밭 전경
다원 입구에서 바라본 녹차밭 전경

박경리 문학관에 인접한 곳에 소설 '토지' 속의 최참판댁이 있다. TV 드라마 촬영세트장이다. 마치 방금이라도 집 안 구석구석에서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올 것 같은 현장감이 살아 있다. 드라마 세트장이 아닌 실제 최참판댁이 온존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현실을 벗어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소설 속의 한 인물이 된 느낌이 든다.

여기는 마을보다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보니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평사리 넓은 들판을 오가며 농사를 짓고 있는 농부들의 모습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소설 속 세상과 현실 속 세상이 뒤섞인 세상을 경험하는 느낌이 든다.

평사리마을 전경
평사리마을 전경

평사리에는 녹차 밭을 일구면서 직접 다방까지 운영하는 곳이 몇 군데 있다. 찻값을 내고 원하는 차를 고른 다음 비치된 보온물통과 다기 세트를 직접 챙겨서 자리를 잡으면 된다. 실내 다방이나 녹차 밭에 설치된 야외 테라스에서 차를 마실 수 있다. 녹차 밭에서의 차 한 잔은 도시의 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것과 비교하면 아주 색다르다. 차를 한 잔 앞에 두고 녹차 밭 인근에 산재한 마을과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지리산 자락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이런 상황은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준다.

하동 악양면 평사리의 시간은 째깍 걸리며 앞으로만 달려가는 도시의 시간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평사리 들판에 내리쬐는 햇살과 땅심의 기운 탓인지 녹차 밭 찻잎이 무성하다. 차 한잔에서 평사리의 햇살과 땅의 기운이 듬뿍 스며든 느낌이다.

평사리마을과 섬진강 젼경
평사리마을과 섬진강 젼경

여행을 나름 정의해보려는 말이 많이 있다. “여행은 집에서 멀면 멀수록 그 효과가 크다.”든지 “집 떠나면 개고생이다.”라든지 “여행의 최종 도달지점은 결국 집이다.” 등등...  겉으로 드러난 말은 서로 달라 보이지만 그 의미는 상통하는 것 같다.

방랑자와 여행자는 종착지가 다르다. 방랑자는 돌아갈 곳이 없다. 여행자는 어디를 가든지 다시 생활 근거지로 되돌아와야만 한다. 1박 2일 동안 삶의 근거지에서 벗어나 얼마간의 힘을 충전하였다. 충전을 원천 삼아 잠시 세워둔 다람쥐 쳇바퀴를 다시 돌려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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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 : 허익배 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이강근 주주통신원  lplove199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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