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조선의 명필 하면 추사 김정희를 떠올린다.

그러나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는 또 한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바로 양사언이다.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시조 태산가(泰山歌)를 지은 사람이 바로 양사언이다.

 

이 기사는 1925년 11월 14일자 동아일보의 기사다.
이 기사는 1925년 11월 14일자 동아일보의 기사다.

양사언(楊士彦)의 본관은 청주이고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다.
1517년 경기도 포천 신북면 기지리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돈녕주부(敦寧主簿)를 지낸 양희수(楊希洙)다.조선 전기의 문신·문장가·서예가이며 초서에 능했다고 한다.

1540년에 진사에 합격하고, 154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삼등현감, 함흥부윤, 평창군수, 강릉부사를 지내고 성균관에 있다가 회양군수, 철원군수, 고성군수를 지냈다고 한다. 40여년의 관직생활동안 따로 재산을 모으지도 않았으며, 청렴하고 검소하게 살았다고 한다.

서예와 시문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으며, 금강산 만폭동에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岳 元化洞天)이란 친필을 남기는 등 자연을 즐기며 신선같이 살았다고 한다. 이때가 명종, 선조 연간에 회양 부사로 있던 때라고 한다.

또한 평창 군수로 있을 때는 궁핍한 백성의 실상을 상소하기도 하였다.(명종실록)

고전번역서인 성호사설 12권에는 봉래(蓬來) 양사언(楊士彥)의 글씨는 표표하여 마치 하늘에 치솟고 허공을 걸어가는 기상이 있으니, 그 글씨 속에 선골(仙骨)이 있음을 속일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농암집 23권에는 "양봉래(楊蓬萊 양사언(楊士彦)이 쓴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이라는 여덟 글자가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용이 꿈틀대는 것 같은 필치가 산세와 자웅을 겨루는 듯했다." 고 극찬을 하였다.

양사언의 글씨(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사진유리필름자료)
양사언의 글씨(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사진유리필름자료)

 

양사언을 두고 전설처럼 전해지는 말이 있다.
양사언의 아버지 양희수(楊希洙)가 전라도 영광의 군수로 부임하기 위해 내려가다가 전주에서 식사 때가 지나 몹시 시장하였으나 인근에 밥을 먹을 만한 곳이 없어 이리저리 해매다 허름한 집을 발견하고 밥을 먹을 것을 청하였다.

14세 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공손하게 나와 식사 대접을 하겠노라고 아뢴다.
그리고는 높으신 어르신께서 어떻게 밖에서 식사를 하시겠느냐며 안으로 모시고 부지런히 진지를 지어 올렸다.
하는 태도나 말솜씨가 어찌나 어른스러우며 예의 바른지 양사언은 너무나 기특하게 여겨 밥을 잘 얻어 먹은 고마움에 보답을 한다는 의미로 청선(靑扇)과 홍선(紅扇) 둘을 꺼내 소녀에게 농담 비슷한 말로 '이것은 고마움으로 내가 너에게 채단 대신 주는 것'이라고 전해 주었다. 채단이란 결혼 전에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보내는 청색홍색의 옷감들을 말한다.

이 말을 들은 소녀는 깜짝 놀라 안방으로 뛰어 들어가 급히 홍보를 가져와서 바닥에 내려 펴고 "여기에 靑扇과 紅扇을 놓으십시요." 라고 하였다.

어리둥절한 양서언은 왜 그러냐고 묻자 "폐백에 바치는 채단을 어찌 맨손으로 받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하자 두 개의 부채를 홍보 위에 놓자 소녀는 잘 싸서 안방으로 가지고 들어갔다.

그런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고 업무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 노인이 군수를 뵙자고 찾아왔다.

이 노인은 군수에게 "몇 년 전 부임할 때 시골집에 들려 식사를 하고 어느 소녀에게 靑扇, 紅扇 두 개를 주고 간 적이 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군수는 조금 생각하다가 "그런 일이 있었다. 그리고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말하며 아직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인은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그러셨군요. 그 여식이 과년한 제 딸년인데 그 이후로 시집을 보내려 해도 어느 곳으로도 시집을 안 가겠다고 해서 영문을 몰라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군수는 "내 어찌 모른 척할 수 있겠소." 라고 말하며 날짜를 잡아 아내로 맞겠다고 했다."식사 한 끼 얻어먹고 미안해서 대가로 부채 두 개를 준 것이 아내로까지 맞이하게 된 셈이 되었다.  이 소녀가 바로 후에 楊士彦의 어머니가 된다.

군수는 정실부인이 있었고, 이 부인과의 사이에 '양사준'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리고 후처, 즉 소실인 이 소녀와의 사이에 士彦과 士奇, 두 아들을 낳았다.

사준(士俊), 사언(士彦), 사기(士奇) , 이 삼형제는 자라며 매우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 났으며 풍채도 좋아 주변으로부터 칭송이 끊이질 않았다고 하며, 형제애가 깊어 중국의 소순(蘇洵)ㆍ소식(蘇軾)ㆍ소철(蘇轍)' 삼형제와 비교되기도 했다고 한다.

정실부인이 죽고 모든 살림살이를 후처인 사언의 어머니가 도맡아 하면서 세 아들을 훌륭하게 키웠다. 그러나 아들들이 아무리 훌륭하면 뭣 하냐 서자들인데...

이 소실부인의 꿈은 자기 아들들에게서 서자의 딱지를 떼내는 일이었다.

이제 남편도 죽어 장례를 치르고 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양씨 가문에 들어와 두 아들을 낳았으며, 아들들이 총명하고 풍채도 있으나 첩이 낳았다 하여 서자라는 딱지를 벗겨주지 않는다."고 하면서 장손인 양사준에게 울면서 부탁한다.

"서모인 내가 죽은 후라도 우리 큰 아드님께서는 내가 지금 영감님 성복(成服)날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복제가 혼돈하여 사람들이 잘 모르게 될 것입니다. 내 이미 마음을 다진 몸, 무엇을 주저 하오리까마는 내가 죽은 뒤 사언, 사기 두 형제한테 서자라고 부르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죽어서도 기꺼이 영감님 곁에 누울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양사언의 어머니는 가슴에 품고 있던 단검을 꺼내 자결하고 말았다.

자기 아들들에게서 서자의 멍에를 풀어주고 떳떳하게 세상을 살아가게 하고 싶었던 어머니, 이 어머니의 마음이 모든 어머니들의 마음일 것이다.

楊士彦은 후에 높은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 내용은 9월 초 KBS 제1라디오에서 03시부터 04시 사이에 방송을 하기도 하였다.

아래 시는 고전번역서인 임하필기 37권에 기록되어 있는 양서언의 시로 경포대에서 쓴 것이라고 한다.

봉호에 한 번 들어가니 삼천 년 / 蓬壺一入三千年
은빛 바다 아득한데 물은 맑고 얕구나 / 銀海茫茫水淸淺
피리 불며 오늘 홀로 날아왔건만 / 鸞笙今日忽飛來
벽도화 아래에는 보이는 사람 없구나 / 碧桃花下無人見

고전번역서인 성소부부고 한정록 4권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다.

좌태충(左太冲)은 이런 시를 지었다.

공(功) 이루고 상 받지 않은 채 / 功成不受賞
예(禮) 올리고 전야로 돌아갔네 / 長揖歸田廬

또 이태백(李太白)은 이런 시를 지었다.

일 마치고 분연히 떠나가 / 事了拂衣去
몸과 이름 깊이 감췄네 / 深藏身與名

이런 말이 있다.

“창랑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을 만, 창랑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을 만.[滄浪之淸兮 可以濯我纓 滄浪之濁兮 可以濯我足]” 하였듯이 윗물이 고와야 아랫물도 곱다는 말과 같을 것이다.

이 시를 쓴 사람들과 마음이 같은 사람들은 없는 것일까요. 우리나라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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