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조기는 기운을 돋우는 생선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 다른 이름으로는 석수어(石首魚)라는 이름이 있다. 이것은 조기의 머릿속에 하얀색의 돌처럼 딱딱한 것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는 추어(䠓魚), 석어(石魚)라고 부르기도 한다.

조기를 말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굴비다. 굴비는 조기를 가공하여서 나온 것인데 조기보다 굴비(屈非)가 더 유명하여 모르는 사람이 없다. 전해오는 말로는 소금에 아무리 절여도 모양이 변하지 않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실로 전하는 말도 있다.

고려 말 이자겸은 인종을 폐하고 자기가 왕이 되려고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정주(靜州, 지금의 영광)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자겸은 정주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소금에 절여 해풍에 말린 조기 맛에 감탄하고, 말린 조기에 정주굴비(靜州屈非)라고 써서 임금에게 선물로 보냈다. 이때부터 굴비라고 부르기 시작되었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굴비라는 이름이 있었기에 이자겸이 정주굴비라고 써서 보냈을 것이다. 이야기의 사실 여부를 떠나 예나 지금이나 굴비 하면 영광을 떠올리게 된다. 영광굴비가 유명해진 것은 법성포 근해가 수심이 얕고 플랑크톤이 풍부해 제주도 남서쪽에서 겨울을 보낸 후 북상하는 조기들에게 최적의 산란장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참조기
참조기

 

매년 3월 말에서 4월 초순에 산란을 앞둔 조기는 살이 오를 대로 오른 조기를 잡으려고 전국의 어선들이 모여들었다.
1948년 6월 2일 자 동아일보의 기사에 의하면 매년 5월부터 약 20일간 全南 大黑島에 첫 사리를 거두는 조선의 石首魚잡이는 조선이 가진 특수어업의 하나로 우리들 생활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면서, 경기도 수산과에 보고 된 바에 의하면 각 어항으로부터 모여든 1천3백여 척의 어선과 3만에 가까운 어부들의 동원으로 지난 27일 끝 사리까지 6억 원의 어획고를 올렸다는 기사가 있다.

이렇게 호황을 이루다 보니 1925년 5월 4일에는 조기잡이의 출어기를 맞아 연평도에 해주 우편소 임시 출장소까지 두었던 것을 보면 얼마나 많은 어선이 모였었는지 알 수가 있을 것 같다. 그때 생겨 난 노래가 바로 ‘돈 실로 가세 돈 실로 가세 영광법성으로 돈 실로 가세’라는 노래가 당시의 호황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할 수가 있다. 이렇게 잡은 조기들을 소금에 절여 천혜의 조건을 가진 영광에서 말리는 것이 굴비다.

경세유표에는 연평(延平) 바다에 석수어(石首魚) 우는 소리가 우레처럼 은은하게 서울에 들려오면, 만(萬) 사람이 입맛을 다시며 추어(䠓魚 : 속명은 石魚)를 생각한다는 말까지 있으며 한 마리의 값은 8푼이라고 했다.

조기가 식용으로 사용하였지만, 약용으로도 사용한 기록이 고전번역서인 산림경제에 있다. 즉 오이의 독을 치료하려면 석수어(石首魚)를 구워 먹이거나, 달여 즙을 먹이면 자연히 없어진다. 또한 참외가 대서(大暑) 때까지 익지 않을 때는, 말린 석수어(石首魚) 뼈를 참외의 이마에다 꽂아 놓으면 꼬투리가 떨어지면서 쉽게 익는다는 기록도 있다. 아래의 시는 고전번역서인 옥담 시집에 실려 있는 시다.

조기(石首魚)

비릿한 바람이 바다 어귀에 불면 / 腥風擁海口
노란 배 조기가 어선에 가득하지 / 黃腹滿魚船
불에 구우면 좋은 반찬이 되고 / 爛炙知佳餐
탕으로 끓여도 맛이 좋아라 / 濃湯作美鮮
그 모습은 비록 크지 않지만 / 形容雖不碩
쓰임새는 한두 곳이 아닐세 / 爲物用無偏
가장 좋은 건 굴비로 말리면 / 最憐乾曝後
밥반찬으로 가장 으뜸이라네 / 當食必登先

이러한 조기가 완도에서도 많이 잡혔다. 50년대까지만 해도 완도의 명사십리(鳴沙十里)해수욕장 앞바다에서 잡혔다. 그러던 것이 60년대에는 청산도 근해에서 잡혔는데 그 이후로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아니면 길을 잃어서 인지는 몰라도 잡히지 않은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수온의 변화도 있겠지만 오염도 한몫하였을 것이다.

 

편집 : 박춘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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